정말 ‘뿅’ 하고 사라지고 싶어

다비드 이야기 1. 하지만 사라져서 도착할 다른 세계가 없다면

by 마누아 브르통

1. 휴일아 어딨니?


“어라 바질이 여기 있네.”

리츠호텔에서 토요일 밤에 서류를 서명했다고 하면 믿을까? 넘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로펌을 놔두고 양측 클라이언트는 모두 이곳에서 서명하기를 원했다.


이 건은 매주 특정 요일에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 진행 후 며칠 동안 자료를 보완했고 주말 전에 서로 주고받으면 받은 걸로 팀회의 하고 다시 협상할 근거 찾고 그래서 협상하고, 그렇게 무한 반복하며 주말 없이 일만 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 그런 리듬으로 쉴 새 없이 달린 몇 달이었지만, 오늘 끝이 난다니 후련한 마음이었다.


드디어 서명식이 끝나고 모두 샴페인을 들고 있는데 답답한 마음에 미팅 장소에서 나와 어슬렁거렸다. 그러는 중에 호텔 바에서 나오는 바질 얼굴을 멀리서 보게 되었다.


‘인사를 해볼까?’

잠깐 생각했지만 지금 여기 상황을 설명하기에 귀찮기도 하고 그냥 돌아섰다. 내일부터 당분간 주말에 일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신난다. 당장 내일 일요일에는 밀린 잠을 실컷 자보리라 마음먹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뭐야 몇 신데 전화야.”

서명식을 마치고 피곤했지만 몇 달을 같이 고생한 동료들과 한잔에 한잔을 더하다 보니 아침이 거의 다 돼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씻고 옷 갈아입고 금방 잠이 들었었다.


아직 몇 시간 못 잔 것 같은데 계속 울리는 전화에 잠이 깨 시계를 쳐다보았다.

“일요일 오전 11시에 누가 전화야.”

마지못해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다비드, 고객이 널 찾아. 어디야?”

얀의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야 일요일 오전에 고객이 왜 날 찾아?”

짜증이 올라온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냈다.


“뭐라고? 지금 월요일이야.”

얀이 깜짝 놀랐는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어? 월요일이라고? 아 어쩌지. 어쩐다”

당황스럽다 못해 어디론가 다른 세계로 ‘뿅’ 하고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

숨을 깊게 쉬고 다시 얀에게 말했다.

“얀, 일단 회의 진행해. 네가 진행할 수 있지? 이야기하기로 했던 것만 전달하고 다음 주에 다시 날짜 잡아줘.”


‘아 실컷 잔다는 게 24시간 넘게 잔 거야?’


멍하니 창문에 다가가 암막커튼을 열어 재치고 밖을 바라보았다. 아침은 아침인데 햇살이 이미 집 깊숙한 곳까지 한 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물 잔을 들고 물을 따르면서 다시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열고 물 잔의 물을 들이켰다. 밖에서 바람에 실려오는 마로니에의 푸른 잎사귀 향이 물을 마시고 있는 나의 코에서 더욱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 시원하다. 오늘 회사 쨀까?


제미나이는 다비드를 왠지 미드에 나올 것 같이 그렸다.


2. 감히 머리를 쉬려 했어?


어차피 미팅은 얀이 맡기로 했겠다 일정표를 열어보며 고민하려는 찰나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여보세요.”

‘누구야 이건 전화가 핸드폰이 아니네. 회산가?’

처음엔 핸드폰 번호도 아니고 광고 전화인가 해서 전화를 받지 않으려다 회사번호인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다비드, 어시스턴트 팀의 안나예요. 토요일에 참석하신 건과 관련해서 상대측에서 접촉이 있는 것 같아요.”

“안녕하세요 안나, 무슨 일이죠?”


“상대측에서 절차적 결함을 언급하며 시비를 거는 것 같아요.”

“토요일에 서명하고 샴페인을 터트렸는데 월요일에 시비를 건다고요?”


“네 개런티로 약속한 부분을 이행시키고 싶나 봅니다.”

“서명하고 이틀 만에요? 납득이 안되는데. 그런데 이걸 왜 얀이 말을 안 하고 안나가 알려주는 거죠?”


“저도 브리스 대표님 이메일에 참조로 들어가 있어서 알게 되었어요. 방금 파트너 변호사님 이메일로 받은 내용 그대로 포워딩했습니다. 알려드리려고 연락했습니다.”

“그렇군요. 알려주어서 고마워요 안나. 더 알게 되는 것 있으면 또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탈깍”


잠시 마로니에 풀 향기를 느끼며 튈르리 공원 산책이나 해볼까 했던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한동안 아무 문화활동도 못했다. 박람회도 미술관도 들린 적 없고 다비드 호크니 전시회도 게하흐드 히슈터 전시회도 모두 놓쳐버렸다.


오벨리스크와 오랑쥬리 좌우 반전으로 그렸길래 바꾸라했더니 말은 안듣고 에펠탑 그리던 제미나이 덕분에 원래 그림을 업로드했다.


서명식에 꼭 참석할 필요가 없었던 얀은 브리스와 함께 오페라에 보냈건만 나는 그나마 쉬려고 했던 하루도 밀린 잠으로 강제로 삭제당하고, 또다시 회사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워졌다.


정말 ‘뿅’ 하고 사라지고 싶다. 하지만 ‘뿅’ 하고 사라져서 도착할 다른 세계가 없다.

비비드 라라 러브 가사가 생각이 난다. ‘빛나는 눈으로 너는 말했지… 기필코 있다 있다 했던… 귀가 닳도록 들었던 빛나는 세상 어디에 있나.’


그 빛나는 세상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에게는 빛나는 한 순간도 잘 허락되지 않는다. 분명히 이 건도 일을 하며 불안하고 힘들었던 각각의 과정은 다 기억나는데 그 빛나는 세상은 아니 그 순간은 협상이 끝나고 서명식을 해도 나에게 오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꿈이 사라진다는데 꿈이 사라진다기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꿨다는 것에 대한 허망함이랄까? 실체가 없는 불가능한 상상 하나를 믿고 조금만 더 가면 있겠지 조금만 더 가면 있을 거야 하며 버텼던 인내가 무너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날 때 받은 에너지가 100이라면 이미 80은 다 써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있을 거란 기대도 없지만, 꿈이 있다 한 들 이행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그냥 꿈꾼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모든 것에 조금씩 금이 갔다. 열정으로 버텼던 벽이, 꿈, 소망 희망으로 붙들었던 강한 손이, 그리고 벅참이 있었기에 물 위도 걸을 수 있었던 초인 같은 능력의 쥐어짜 냄이 이제는 말라버린 것 같았다.


그 속에서 내 하루는 마치 밀폐된 공간 속에서 분필가루로 된 바닥을 영원히 걸어야 하는 벌을 받는 것만 같았다. 발이 빠지고 숨이 가쁘고 끝내 몸도 깊이 가라앉고 고통받다가 나도 하얀색으로 끝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며 이제 또 한 건을 마무리한 줄 알았는데, 좀비 같이 죽지 않고 돌아왔다. 이건은 죽지 않았다. 종료되지 않았다. 다시 돌아왔다.


‘단 하루만이라도 내 머리를 쉬는 것이 허락될 수는 없었을까?’


"근데 내가 뭐 간다고 해결되는 게 있을까 지금. 필요하면 연락하겠지. 그냥 쨀까?"


창 밖의 초록색이 자꾸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것 만 같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이제 꺼져 몰리토, 자책과 두려움


[글쓴이의 말: 가브리엘의 동료 다비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비드처럼 에너지가 80쯤 까지 닳아버린 적이 있거나, 어디론가 '뿅' 하고 사라지고 싶지만 ‘뿅’ 하고 갈 수 있는 다른 세계가 없어 그대로 있어야 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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