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관계, 다른 속도

by Mano

연애를 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서, 어느 순간 설렘의 장이 끝나고 편안함의 장이 열리는 때가 온다는 걸 알게 됐다. 처음에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던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이 지나자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워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이 변화를 관계가 식은 신호라기보다,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과정처럼 느꼈다. 다만 이 편안함은 자칫 상대에게 무관심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알게 됐다.


문제는 우리가 이 편안함에 도착하는 속도가 같지 않다는 데 있었다. 나는 이미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전히 설렘을 통해 관계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 차이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을 때, 상대의 서운함은 자연스럽게 쌓여갔다. 그 서운함이 왜 생기는지 이해하기 전까지는, 나 역시 당황스러웠다. 같은 관계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온도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나는 ‘인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렸다. 조금 더 이해해 주고, 조금 더 기다려주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어떤 순간에는 그 기다림이 관계를 지켜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내가 언제나 좋은 해답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구조에서는, 인내가 점점 사랑이 아니라 버티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중요한 건 누가 더 참느냐가 아니었다. 서로가 이 속도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는지가 더 중요했다. 내가 이미 편안해졌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고, 상대가 느끼는 서운함을 가볍게 넘긴 순간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인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조율을 미루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편안함의 장이 관계의 끝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만 그것이 다음 단계가 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필요했다. 상대 역시 관계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있을 때만, 기다림은 희생이 아니라 선택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관계가 끝까지 조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기도 한다. 그때까지 무작정 참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 경험 안에서 사랑은 끝까지 버티는 능력이라기보다, 서로의 다른 속도를 어떻게 다룰지 함께 고민해 보려는 태도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진짜 사랑의 시작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답하지 못한다. 다만 적어도 내 경험을 통해 비춰보니, 그것은 한 사람이 더 오래 참는 순간이 아니라, 서로의 어긋난 속도를 외면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순간에 조금 더 가까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