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에 대한 생각
어릴 적에 나는 내 취향이 남들과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유행을 내 취향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곧 내 관심의 주가 되는 그런 걸 잘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좋은 것이 좋은 것이었다. 대중성보다는 내가 좋냐 안 좋냐 를 기준으로 보았기에 어쩌면 주체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도, 아니면 중2병이 늦게 왔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낯간지럽지 않은걸 보니 중2병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 내 취향은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확실히 내 취향에는 방향성이 있었고, 질량과 속도가 있었고 관성이 있어 취향이 지나온 자리에는 '나'라는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했다. 추천해 준 음악, 책, 사진들을 추천받은 사람들이 만족해서 다시 물어오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랬다.
그때는 취향을 통해 내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했었다. 비록 지금처럼 온라인을 통해 넓은 대중들에게 미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아쉽게 생각된다. 지금 같은 시기에 젊은 나를 데려온다면 SNS에 내 팬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사실 시도해보지 않아 결과가 없기 때문에, 근자감으로 하는 상상이란 걸 알고 있지만 기분 좋은 상상이기에 굳이 비판적으로 이성의 날을 세우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이 취향이라 것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내 삶의 년수가 축적될수록 나의 취향을 통해 조금씩 편협하게 변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필터로써 작용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보고 듣고 마시다 보면 이것들만 정답지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런 필터를 통해 접하게 되는 것들도 전에 없던 새로움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들이면서 동시에 낡은 것이기도 하다. 기발함, 신선함에 노출되는 경험이 극히 드물어지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취향은 나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가두기도 한다.
취향은 소비할 때 필터가 되고, 표현할 때 무기가 된다.
이렇게 스스로 반론도 해본다. 그러면 더욱더 전문적이게 되는 것 아닌가? 맞다 그렇다. 하지만 '나'의 세계를 확장한다는 관점으로 보자면 편협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불편함이 없다면 쭉 이렇게 살아도 되지만 창의적이거나 창조적인 삶을 살아내자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어느 정도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관점이나 감각이 살아있음을 느끼려면 말이다. 전에 없던 새로움이 내 안에서 잉태되어 나를 통해 표현되고 드러낼 때 취향은 곧 무기가 될 테니까. 그것은 세상에 유일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취향이 나를 가두지 않고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일단 드러내는 기술이 필요한 것 같다. 글이든 음악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말이다. 꼭 어떤 예술의 한 종류가 아니어도 삶을 살아내는 태도나, 가치관, 일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이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머무는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취향이라는 것은 종국에는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 취향을 무기로 쓰고 싶다면 이 질문 앞에 먼저 서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어떤 가치를 드러내고 싶은가?'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이쁜 장면을 포착해서 찍은 기술적인 장면은 많다. 그런 사진들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잘 찍은 사진에 언제나 자리를 내줄 뿐이다. 여백의 정도와 구도, 곡선과 선의 조화, 자연과 인공 공존 이런 것들을 포착하고 잘 찍어내는 기술 끝에는 내가 이 사진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어떤 모습을, 어떤 가치를 드러내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답이 있어야 한다.
결국 차이는 여기에서 생긴다. 잘 만든 것은 감탄을 만들고, 가치가 담긴 것은 끌림을 만든다. 그런데 경험이 많아지면 이 질문에 답이 저절로 채워지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전하고 싶어 지게 되는 것이다. 의미의 발견이랄까.
모든 활동이 이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 삶의 역사로써, 기록으로써 남기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본인 만족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면 끝이다. 하지만 기록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감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인생에 주기적인 공허함이나 허무가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근래에 알게 됐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비슷한 감각이 반복된다고 말한다. 삶이 안정되어도, 문제가 없어도 다시 찾아온다고 한다. 삶에 새로움이 없다는 표현을 자주 하던데, 이것이 단순한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적인 삶의 부재에서 오는 감각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나를 통해 해석되는 세상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 내가 알게 된 특별함을 나누고 싶은 본능(뭔가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욕구가 있는 걸 보니 이건 본능이 맞는 것 같다.)을 마주한 게 아닐까?
그래서 다시 취향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무엇을 드러내고 싶은지. 취향이 나를 가두는 필터가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것 같다. 그때 취향은 소비가 아니라 표현이 되고, 표현은 창조가 된다. 그리고 그 창조는 결국 나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하나의 세계가 된다. 청소하다가 번뜩한 글 쓰느라 시간이 너무 많이 갔다. 다시 청소나 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