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후 미련이 남는 이유

사랑했던 관성

by Mano

빅나티라는 가수의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이란 노래가 있다. 가사가 좋아서 기억하고 있던 노래였다. 그 노래를 장혜진 씨가 리메이크한 버전을 듣고 나서 한동안 가사를 곱씹었던 기억이 있다. 유튜브에서 들었는데 평소에 댓글을 잘 남기지도 않으면서 그날은 한마디 안 적을 수가 없었다.


‘에세이가 철학이 되는 순간이네..’


부른 장혜진 씨도 노래를 너무 잘했지만, 빅나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 곡이 12년간 짝사랑하던 상대를 보내주는 마지막 노래라고 하더라. 이런 작품을 만나게 되면 정적 속에 상상과 기억을 잠시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감정과 생각의 줄다리기 속에 나온 글이나 예술작품들은 언제나 청자들로 하여금 질문을 던진다.


‘너는 어떤 경험을 했니?’


나의 경험이라...그 질문 앞에서 하루 종일 머물렀던 하루다.



추억이라 믿었던 것들은 오래 썩는 기억일 뿐

헤어진 사람이 가장 보고 싶은 시기가 찾아온 것 같다. 경험상 이 시기만 지나면, 내가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내 생활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그런 어떤 사람으로 점점 내 우선순위와 마음속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에 감정은 더 요동치게 된다. 한번 더 그 사람을 붙잡으라고, 다시 연락해 보라고, 보고 싶으니 집 앞으로 가보라고. 감정은 내 생각을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간다.


이럴 때 이성의 개입이 없다면 정말 마지막에 안 좋은 기억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감정을 달래기 위해 하루 정도는 지질함으로 무장한 채 추억 속을 헤매고 다녔다. 이 추억이란 게 웃긴 건, 어떤 기준을 가지고서 내 기억의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평소의 나라면 별 쓸 데 없다며 신경도 안 썼을 법한 것들이 머릿속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일상과 관련된 것이라서 그렇다. 일상이라는 게 꼭 몸이 함께 있어 경험하는 순간 이상으로 넓은 범위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을 마음으로 같이 보냈다면 그게 일상이다. 함께 했던 일상. 그게 진짜 아픈 거거든.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 당신의 흔적을 발견한다는 것.

당신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 흔적이 다시 한번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될 때,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은 쉬이 달랠 수 있고 가라앉힐 수 있는 류의 것들이 아니다. 어쩌면 나의 고통과 슬픔만이 시간의 연속 안에 있고, 나를 뺀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의 소외감을 드러내는 듯한 기분.


이별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않을까?

이별의 이유와 종류가 어찌 되었든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당신과 내가 함께 살아내던, 당신이 나를 위해 감당하던 세상에 대해 강제 노출을 뜻한다. 강제로 노출되는 삶의 영역은 대부분 일상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비어 있음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 삶의 균형이 무너진 것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기울어진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당신의 흔적을..내 슬픔을 지도 삼아 헤쳐나가야 할지 모를 일이다.


미련이라 믿었던 것들은

미련은 사랑의 잔여물이라기보다, 바뀌지 않은 일상의 관성에 더 가깝다. 헤어진 뒤에도 손이 먼저 움직이고, 눈이 먼저 찾고, 마음이 먼저 결론을 만든다. 그래서 잊지 못한다는 말은 종종 그 사람 자체를 뜻하기보다, 그 사람을 포함한 ‘하루의 방식’이 아직 내 몸에 남아 있다는 뜻이 된다. 습관처럼 함께 보냈던 시간의 동선, 대화의 톤, 기다림의 길이까지도. 관계가 끝났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데, 그 사실만으로는 일상이 곧바로 새로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에 감정이 요동치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붙잡으라는 충동도, 연락하라는 상상도, 집 앞으로 가보라는 장면도, 모두 “기존의 루트로 돌아가려는” 몸의 반사 같은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반사를 그대로 따랐을 때 남는 결과가 대개 더 나쁘다는 데 있다. 잠깐은 달래질지 몰라도, 결국 마지막을 망치는 기억이 추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붙잡지 않기로 한 선택이 성숙해서가 아니라, 더 나쁜 기억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감정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감정이 내 행동을 결정하게 두지 않겠다는 쪽에 가깝다.


미련을 끊는 일은 마음을 단속하는 일이 아니다. 일상을 다시 조립하는 일이다. 흔적이 머물던 자리에 다른 일을 놓고, 비어 있던 시간에 새로운 리듬을 부여하는 것. 그렇게 하루를 재배치하다 보면, 미련은 사라지기보다 ‘자리’를 잃는다. 오늘은 그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럼에도 질문하고 싶다.

‘다시 돌아오면 안 돼? 이제 그만 좀 버티면 안 돼? 안 되는 거 너도 알잖아.’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이유는 사랑을 포기하는 일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적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상하게도 끝내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없어지지가 않아서다.

하지만 부질없다. 연락이 없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이미 결론은 내려진 것이다.

보고싶다는 연락 한 통이면 될 것을..


사실 이 질문들은 결국 상대에게 던지는 말이 아니라, 내가 나를 붙잡기 위해 만들어낸 말에 가깝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일련의 생각과 감정이 지나는 과정을 지켜보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아, 내가 진짜 좋아했나 보다.’

적어도 나는 내 진심을 가볍게 취급하지는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이런 방식으로 확인하게 되니까.


맞다.미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