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 대하여

by 김만소

-1. 날씨에 대한 피드백에 대한 피드백-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좋은 수필이란, 구조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수필은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누구나 그 생각을 조리있게 전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저는요, 수필을 읽을 때 그 구조를 보곤 합니다. 수필이라는 창문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와 독자가 그 창문의 굴절률을 들여다보기 때문이겠죠.

글 전체로 오늘의 날씨가 풍겨오기 때문이고, 굳이 날씨에 함몰되지 않고 그 날씨에게 얻었던 사유를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날씨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아끼는 자동차가 더러워져도 내일 비가 온다는 예보에 세차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옛 연인과 폭우 속에서 미끄러운 슬리퍼를 신고 이자카야를 갔던 밤처럼, 좀처럼 연락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어느새 차를 바꾼 것과 그 이유가 참으로 안 좋은 일이었는데 그 소식을 들었던 공원에 정말 죽이는 햇빛이 내렸던 어느 봄 날 처럼요.

해마다 이맘 때면 따뜻해지는 건 당연하고 조금만 지나면 지겨운 여름이 오는 것도 당연하고 여름이 싫다고 외치다 보면… 어느새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당연한데 그럼에도 우리는 첫 모금의 탄산 음료처럼 날씨에게 당하고야 맙니다. 오늘의 아픔이, 저번 주의 아픔이, 혹은 작년 이맘 때의 아픔이 여러 번 겪었다 하더라도 늘 아픔은 아픔인 것 처럼요.

저는 한국에 살지는 않으니 한국의 날씨는 이젠 잊어버렸습니다. 여름에는 더웠고 겨울에는 추웠던 것만 기억나요. 그러나 아마 이곳과 비슷하겠죠. 일교차가 크고, 저는 점심에 돌아다닐 일이 없으니 아직은 셔츠와 외투가 아니면 쌀쌀하다고 느껴요. 단조로움에 노출되어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요.

제가 사는 동네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날씨가 좋은 동네라고 합니다. 비도 별로 오지 않고 일조량도 많은 동네예요. 저희 집에서, 저희 회사에서는 너무나도 신기하게 후지산이 보입니다. 벌써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일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그 산을 힐끔힐끔 쳐다봅니다. 후지산은 의외로, 볼 수 있는 날보다 볼 수 없는 날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거로 저는 오늘의 날씨에 대해 생각해요. 아침에 해가 뜰 즈음 출근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퇴근을 하는데, 창문 밖에 후지산이 있는 자리를 보며 오늘 날씨는 흐리구나. 라는 생각을 해요.

그것과 동시에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은 생각도 가끔 들어요. 그럴 때면 보이지 않는 후지산을 탓하며 마음의 소란이 일렁이곤 합니다. 누구나 마음의 소란이 있을건데, 당신의 마음의 소란은 제가 감히 상상할 수 없겠죠. 그러나 저 역시, 당신 역시, 여타 다른 분들 역시 그 소란을 가지고 항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출렁거리는 파도를 막을 수 없듯이요. 날씨 또한 그러하겠죠. 저희가 아무리 막고 싶어도 양말의 밑 부분부터 젖어오는 비가오는 날처럼, 그렇게 존재하고 또 변화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아직 수필이 어렵게 다가오는 것 또한 있어요. 아마 UV밀도가 높게 해서 집 안이 잘 안 보이게 하고 싶은 마음이겠죠. 마음을 전달하면서 진짜 마음이 전달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일까 싶어요.




-2. 좋은 수필은 무엇인가.-


사실 저는 수필과 시와 소설에 구분을 확실히 하는 편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법적 접근이지, 근본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것이에요. 전부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씀드리고자 하면, 이 글이 100페이지가 넘어갈 것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생략하겠습니다만은, 이번에는 수필에 대해 이야기는 조금 해볼까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에세이는, 자신이 한 경험- 자신이 겪은 사건- 자신이 생각을 전환하게 된 사물을 통해서 그 사건을 나열하며 그 때의 기분, 감정, 혹은 생각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쓸쓸함과 이별에 대한 글을 써본다면, 우리는 주로 그 쓸쓸하다는 추상적인 감정을 이별에 대입해서 나열하고 있어요. 방법론적으로는 절대 잘못된 글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 이별을 나열하는 과정이 너무 직설적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자신이 했던 경험과 사유를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려면 독자에게 감정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닌, 온천의 열탕에 처음 들어갈 때처럼 발끝부터 서서히 적시며 몸을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독자가 서술자에 이입이 된 후, 혹은 ‘납득’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쓸쓸하다는 감정을 동화시키는 과정이 에세이에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방법적인 해결책을 제시해보자면 조금 더 구체적인 경험과 구체적인 사유와 구체적인 사물이 주가 된 에세이를 쓰는 연습을 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제가 맥도날드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제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의 말머리에서 였을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맞벌이 하는 부모님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제 부모님은 맞벌이였고 저는 유치원이 끝나고 아주 긴 시간을 대부분 혼자 지내야 했죠. 혼자 지낸다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 꽤 힘든 일이었으나, 저는 그 모험을 나름 좋아했어요. 환경에 잘 적응하는 연습을 그때부터 해온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저에게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그 분들의 탓을 하진 않아요. 어머니는 어린 저를 위해 매일을 오천 원씩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꽤 큰 돈이었어요. 그렇게 일주일에 삼 일을 맥도날드에 갔습니다. 간편하고, 맛있고, 그 몸에 안 좋다는 것을 멋대로 먹을 수 있는 특권 같았거든요.

그리고 저는 늘 불고기 버거를 먹었어요. 일본에 살게 되기까지 매번 불고기 버거만 먹었던 것 같아요. 매주 삼 회 불고기 버거를 이십 년 가까이 해왔으니, 제가 먹은 불고기 버거를 쌓으면 성층권에라도 도달할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 물으면 고민 없이 불고기 버거라고 대답할 정도로 좋아했어요.

안타깝게도, 맥도날드 이 층 창문에 붙은 일인석 자리에서 혼자 햄버거를 먹는 행위는 저보다는 부모님에게 상처였던 것 같습니다. 군대를 갈 때에도 처음으로 해외에서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에도 그들과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별로 들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들은 당시 매우 어려웠고, 그 어려움을 가족이서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것도 분명 있었겠죠.

그 결과가 제 자신이라는 사실을 저는 나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저인데, 어째선가 그들이 앞에 다오면 말문이 턱 막힙니다. 콜라라도 마시고 싶은 감정이에요. 감정에 컴포트존에서 벗어난지 오 년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불고기 버거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이제는 그 맛도 기억에 나지 않아요. 부모님과는, 두세 달에 한 번 전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들의 나이가 된 지금은 그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제 새로운 컴포트존에 그들을 초대해볼까 해요.


이렇듯, 우리는 에세이를 쓸 때, 사유와 자신의 거리감을 일부러 만들어야 합니다. 에세이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길게 써보라 하는 것은 참으로도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 무인도라는 동떨어진 오브제를 잡아서 그것에 대해 나열하며 나열한 문단에 입체감을 담으면 굳이 쓸쓸함을 말씀하시지 않아도 굉장히 서술자가 쓸쓸한 상황이라는 것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쉬운 작업입니다. 언어를 아는 이상, 엉덩이를 붙이고 컴퓨터를 켜서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면 글이 나오죠. 그러나 감정을 전달하는 작업은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글의 사유와 서술자의 거리감을 한 번 느껴보고(주로 독자의 입장이 되어보며) 앞으로 어떤 글을 쓰실 때 제가 주절주절 나열한 말들이 당신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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