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갑과 찰갑

2025.08

by 유영준


판갑(板甲)과 찰갑(札甲), 어느 갑옷을 입고 계신가요?

고대의 갑옷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었다. 정주민들이 주로 입던 판갑옷과 유목민이 주로 입던 찰갑옷이다. 판갑옷은 큰 철판을 이어붙여 만든 갑옷이며 찰갑은 작은 철조각을 가죽끈 등으로 연결한 갑옷이다. 우리가 흔히 유럽 기사와 함께 떠올리는 갑옷은 판금갑옷으로 판갑옷과는 다른 물건이다.

판갑옷은 가장 오래전부터 쓰였던 갑옷 유형이다. 판갑옷은 유연성을 희생하고 방어력을 강화한 갑옷으로 우리가 로마군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로리카 세그멘타타와 같은 느낌의 갑옷이다. 근접전에서 방어하기 좋았고 뛰어난 대장장이가 있다면 원거리 방어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멋들어지는 외양에 비해 무게 분산이 잘 되지 않았기에 무거웠고 갑옷을 걸치는 느낌이기에 불편했다. 철판이 공격을 받아 찌그러지면 전체 방호력이 같이 낮아지기에 대장장이가 다시 두들겨 펴든 교체하는 등 부분 보수가 어렵고 한 판을 갈아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 찰갑옷은 원거리 방어에서 적의 화살을 흘려보냈고 상대적으로 무게 분산이 잘되어 가벼웠다. 절대적인 방어력은 판갑에 비해 떨어졌지만 갑옷 두께라면 겹겹이 늘어진 찰갑이 더 유리했다. 특히 찰갑은 손상된 부분의 갑찰만 떼어내서 보수하면 되기에 유지보수도 훨씬 용이했다. 하지만 단일 철판이 아니기에 틈새로 파고느는 창이나 쇠뇌같은 직선형의 관통 공격에 취약했고 연결부는 가죽끈이나 실이기 때문에 여름이나 습한 기후에서의 전투 이후에는 연결 부위가 해지거나 상해 갑옷의 제 기능을 못하기도 했다.

그래서 비교적 자원이 많고 상대적으로 덥고 습한 농경 지역에서는 판갑옷이, 건조하고 자원이 제한된 초원 지역에서는 찰갑옷이 각광을 받았다. 실제 고대 우리나라도 가야를 위시한 남부에선 판갑옷이 유행했으나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모두 찰갑옷으로 교체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하나는 판갑옷을 입은 채 높다란 성곽을 쌓은 정주민의 조직,
다른 하나는 찰갑옷을 입은 채 넓은 초원을 달리는 유목 제국의 조직.


판갑옷을 입은 조직은 단단하고 일사불란하다. 외부 위협 앞에서 철인哲人과도 같은 리더의 결단으로 한 몸처럼 움직이며 굳건히 버틴다. 그러나 금이 가면 치명적이다. 판갑옷에 상처가 나면 한 판을 모두 갈아야 하듯, 리더가 흔들리면 조직 전체가 흔들린다.

반면 찰갑옷을 입은 조직은 유연하다. 마치 초원의 말들이 흩어졌다 모이는 모습과 닮았다. 개별 구성원이 흩어졌다가도 다시 모여, 흐르는 물결처럼 위협을 흘려낸다. 조직원 일부가 떨어져 나가도 시스템의 힘으로 곧 회복된다. 그러나 경험하지 못했던 강력한 일격 앞에서는 얇은 미늘이 버티기 어렵다. 결국 끈끈해보였던 조직은 한 번의 위기에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만약 미늘을 이었던 '끈'이 건재하다면 그런대로 버틸 수 있지만 끈이 삭고 끊어지면 위협이 없어도 스스로 무너져버린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정답도 없다.

강력한 철판에 의지하는 조직인지, 갑찰 하나하나의 연대에 의지하는 조직인지.

우리 조직이 지금 어떤 갑옷을 입고 있는지 안다면 내일 적을 맞아 싸울 때 조금은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오늘의 위협과 내일의 변화를 함께 견디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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