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과거

2025.08

by 유영준

과거는 늘 왜곡되어 다가온다.

사람은 종종 과거를 빌려 오늘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때의 과거가 언제나 사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속 장면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요동정벌을 두고 우왕 앞에서 맞선 최영과 이성계의 대화는,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어 명분으로 쓰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다. 다음은 당시 드라마의 대사이다.

최영: 그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린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는 안된다? 우리가 비록 저들 명나라보다 작다 하나 고구려의 웅혼한 기백을 이어받은 대고려다. 일찍이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 당나라를 벌벌 떨게했던 고구려의 후손이야!

이성계: 언제 고구려가 수나라를 정벌했습니까? 언제 고구려가 당나라를 정벌했습니까? 고구려의 기상과 기백은 저 대륙의 큰나라에게 국토의 강역을 단 한뼘도 내어주지 않은것이지, 무모한 정벌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최영은 '고구려의 후예'라는 허상을 들이대며 대륙을 향한 무모한 정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성계는 단호히 말한다. 고구려는 정벌로 영토를 넓힌 것이 아니라 단 한 뼘의 땅도 빼앗기지 않고 지켜낸 데에 진정한 기개가 있었다고. 역사를 잘못 해석한 결과는 무리한 요동정벌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릴 뿐이라는 경고였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이성계는 결국 회군한다.

비슷한 일이 일상 속에서도 반복된다. 십여 년 전, 출장길에 나와 센터장님은 미세먼지로 인해 뿌연 하늘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나는 "어릴 적 하늘은 말 그대로 하늘색이었는데"라며 옛 시절의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56년생이었던 우리 센터장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예끼, 옛날이 더 뿌..아니 까맿지. 뭐 그때 규제가 있나, 누가 환경을 아나. 마 기냥 굴뚝에서 펑펑 검은 연기가 새까맣게 나왔는데. 아침에 흰 셔츠 입으면 저녁엔 검은 셔츠야~" 센터장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건 사실 그 시대가 나아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나'가 좋았던 것일 뿐이라고.

맞다, 기억은 힘든 것은 지우고 좋은 것만 남기기에, 시간이 흐른 뒤에는 언제나 아련한 빛깔을 띠게 된다. 아무리 힘들었던 기억도 세월이라는 체에 거르고 나면 보랏빛 추억만이 덩그러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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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과거를 미화하거나 왜곡하는 경향은 개인의 기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최근 십여 년간 잠잠했던 소위 환빠(극단적 민족주의 사관 신봉자)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AI를 통한 손쉬운 콘텐츠 생산과 유튜브 같은 자극적 매체의 힘을 빌려, 그들은 점점 다시 세력을 뻗쳐가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역사관이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대륙에 있었다든지. 고려의 천리장성이 사실 중국의 만리장성이라느니. 오죽하면 이집트는 '이집의 터' 에서 나온 말로 근동까지 우리 민족의 무대였다느 이야기도 나온다. 이처럼 사실에 근거하기보다 환상과 음모론에 기댄 그들의 주장 속에서는 세계와의 교류 대신 폐쇄적 국수주의가 강화된다. 결국 이는 특정 국가와 민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질 수 있고, 더 나아가 제도권의 정제된 교육에 대한 불신을 키우며 사회 전반의 합리적 사고를 갉아먹는다.

이는 기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흔히 '라떼'로 이야기하는 과거의 영웅담들은 대부분 현재에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다. 문제는 '라떼'에 빠져있는 리더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 조직은 혁신보다 과거의 회귀 속에서 챗바퀴처럼 돌 수 밖에 없다.

역사든 개인의 기억이든, 왜곡은 진실을 잃게 하고 잘못된 판단을 부추긴다. 나라는 과거의 허상을 좇아 무모한 전쟁을 시작할 수 있고, 개인은 현실을 외면한 채 부질없는 향수에 빠질 수 있다. 오늘날 혹세무민한 자들이 던지는 자극적 말들과 과거에 빠져 허우적대는 리더가 위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언어는 역사만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이성적 토대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화된 과거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직시하고 오늘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고구려의 강역을 지켜낸 의지, 회색 하늘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낸 일상의 삶. 진정한 의미는 거기에 있다.

과거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은 오늘을 건강하게 지키는 방패이며,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오늘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며 냉정하게 기억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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