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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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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수당

쇼군을 만드는 건 무엇인가

역사를 보면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할 때마다 그들은 저마다 독특한 인재경영 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 이후 팔백년간 이어질 무사 정권으로의 전환을 이끌었던 두 인물, 헤이케 가문의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와 겐지 가문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요모리는 헤이케 가문의 몰락을 맞았고, 요리토모는 쇼군이 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습니다. 바로 향후 일본의 독특한 정치체제로 자리잡은 막부와 쇼군의 시작이었습니다. 과연 '쇼군'을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1. 권력 유지 전략: 가족 중심 vs. 무사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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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기요모리 – 가족과 측근 중심의 권력 구조


헤이안 시대, 일본은 철저한 귀족 중심의 정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지와라 씨로 대표되는 귀족이 태정대신을 독점하였고 이들은 천황과 공가 귀족들의 사이에서 정권을 쥐고 일본을 지배하였습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철저한 가족 중심의 인재경영을 펼쳤습니다. 그는 무사 출신으로 귀족정치의 정점이었던 태정대신(太政大臣)까지 오른 최초의 인물로, 무사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면서도 헤이케 가문 내부에서 권력을 집중시켰습니다.


가족을 주요 관직에 배치: 장남 다이라노 시게모리(平重盛)와 차남 다이라노 무네모리(平宗盛)를 핵심 요직에 앉히고, 친족들을 정치·군사적 요직에 배치하여 가문 중심의 권력 구조를 확립했습니다.


귀족 세력과의 연합: 그는 일족을 기존 귀족 세력에 편입시키는 가하면 귀족 세력의 핵심 씨족이었던 후지와라 셋칸케의 씨장자를 사위를 맞는등 혼인 정책을 활용해 정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공경으로의 편입시도는 다른 무사들로 하여금 '기요모리가 결국 귀족이 되기 위해 우리를 이용했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압적 통치: 반대 세력을 숙청하며 강력한 권력을 유지했으나, 내부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적을 늘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그는 카무로(禿)라고 불리는 어린 소년들을 비밀 정보조직으로 활용해 밀고를 장려하고 이를 기반으로 반대세력을 숙청하여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숙적인 요시토모의 아들인 요리토모와 요시츠네 등을 살려두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숙청방식을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헤이케 가문(다이라 가문)의 전성기를 가져왔지만, 장기적으로는 내부 반발과 미나모토 가문과의 갈등을 촉진하여 몰락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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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무사 연합과 실력 중심의 인재 활용

반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보다 무사 중심의 실리적 인재경영을 펼쳤습니다.

지역 무사와의 연합: 요리토모는 이즈 지방의 호족인 호조 도키마사의 사위가 되는 것을 시작으로 지방 세력을 규합하며 군사적 기반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헤이케의 강압적인 통치는 반 헤이케 연합을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다. 그의 전략은 능력 있는 무사를 발탁하고, 이들과 협력하여 전투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문 내에서도 실력 중심의 접근: 요리토모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동생인 요시츠네, 사촌인 요시나카를 비롯해 여러 친족들에게도 권력을 분산하려 했으며, 이는 후에 가마쿠라 막부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연한 세력 운영: 특정 가문이나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 있는 자들과 협력하려는 태도를 보였지만, 이로 인해 내부적 충성심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같은 미약한 충성심은 훗날 그가 죽은 후 겐지가 아닌 호조씨가 실질적인 실권을 잡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요리토모 또한 쇼군이 된 뒤 동생 요시츠네와 이복동생 노리요리를 필두로 잔인한 숙청을 이어나갔고 이는 훗날 겐지 정권을 지킬 대들보들을 스스로 뽑아버리는 결과를 맞이합니다.

2. 인재 운영의 성패: 정실 인사 vs. 능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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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기요모리 – 권력 독점과 정실 인사의 한계


기요모리는 가족과 측근을 요직에 배치하며 가문의 결속을 다졌으나, 이는 내부의 불만을 초래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장남 다이라노 시게모리는 비교적 유능했지만, 차남 다이라노 무네모리는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여 헤이케 가문의 몰락을 가속화했습니다. 신하들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반대 세력을 철저히 숙청했지만, 이는 오히려 내부 균열을 심화시켜 반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무사 중심의 인재 발탁


요리토모는 전투에서 능력을 입증한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습니다. 그는 친족과 처가를 중심으로 반 헤이케 연합의 세력을 균등히 쓰려는 노력을 보이며 각자에게 군사적·정치적 역할을 부여하여 장기적으로 무사 정권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다양한 세력을 한 번에 포용하려다보니 갈등이 많아 충성심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친족에 대한 잔혹한 숙청과 그의 죽음 이후 후손들이 다시 실권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3. 현대적 시사점: 조직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리더십


기요모리의 교훈: 내부 결속만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기요모리는 강력한 가문 중심의 정치를 펼쳤지만, 외부와의 협력과 견제 장치를 무시한 것이 몰락의 원인이었습니다.


현대 기업에서도 내부 인맥 중심의 승진 구조는 단기적으로는 안정성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쟁력을 저하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요리토모의 교훈: 다양한 인재를 활용하되, 내부 충성심도 관리해야 한다

요리토모는 다양한 무사 세력을 활용하며 장기적으로 무사 정권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내부 통합에 실패하며 단기적인 몰락을 경험했습니다. 결국 그가 세운가마쿠라 막부는 그의 사후 아내인 호조 마사코를 거쳐 호조 집안에서 실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는 현대 조직에서도 다양성과 실력 중심의 채용이 중요하지만, 내부의 조직 문화와 결속력을 관리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시사합니다.


쇼군을 만드는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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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강력한 군사력만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권력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인재경영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결속력을 갖춘 조직 운영이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다양한 인재를 활용하는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외부 세력과의 협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내부적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는 균형 잡힌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 운영을 했지만 내부 반발을 초래하며 몰락했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실력 중심의 인재 운영을 했으나 내부 단결 부족으로 결국 죽쒀서 개준꼴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멸족의 길을 걸은 기요모리에 비해 첫 쇼군으로서 역사에 남았으니 이또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리더가 어떤 인재를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단순한 승패를 넘어 역사적 변화의 핵심 요소가 됩니다. 쇼군이 되는 조건은 단순한 무력이 아니라, 장기적 안목을 가진 인재경영 전략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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