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2025.10.

by 유영준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명절 안부겠거니 하고 받자마자 장난스럽게 선수쳤다. "그래~ 너도 잘 보내고 처가에 인사 잘하고~ 아버지 어머니 안부 전해드리고~" 그런데 영 딴소리를 한다.

십여 년 전, 대학 새내기로 입학한 이 후배는 장난꾸러기였다. 키도 큰 놈이심심한 농담만 하고, 술담배는 또 어찌나 좋아하는 지. 공부는 지지리 못하고 고민만 많았다. 별 생각 없이 학점맞춰 우리 과에 들어왔다가, 또 별 생각 없이 제복이 멋있다며 경찰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노량진도 가고 시험도 여러 번 봤다.

시험 전날이나 끝나고 난 뒤 전화가 오면, 나는 항상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학교 다닐 때 데리고 다니며 술 사준 선배가 나인데 정신 못 차리냐고, 수백 수천 번을 했다.

다행히 그렇게 잔소리를 퍼부었는데도 가끔씩 전화해서는 "그래도 저는 형밖에 연락하는 선배 없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인간관계 좁게 만들지 말라고 또 잔소리하면서도, 기분은 또 좋았다.

고작 세 살 위인 내가 해줬던,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말들을 주워 담아 다시 들려주며 고맙다고 할 때면 창피하기도, 기분 좋기도, 머쓱하기도, 무안하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여러 감정처럼 이 동생도 여러 길을 걷고 걸어 오늘에 닿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자주 연락하고 자주 보지는 못해도,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먼저 전화로 알려준다. 사람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면 "십 년도 전에 형이 사람이 할 도리라며 가르쳐준 건데 왜 뭐라고 하냐"며 나를 나무란다.

오늘도 추석 안부인 줄 알고 내가 선수 친 줄 알았는데, 추석 안부가 아니었다. 둘째를 낳아서 알려주려고 전화한 거였다. 둘째를 낳은 것도 기특한데, 뭐 잘난 선배라고 먼저 이야기해주니 기분 좋게 민망했다.

경찰을 포기한 이후 심하게 야단맞은 후, 동생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평생 함께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고, 결혼 전 임신을 하게 되어 급하게 두 달 후 결혼했고, 결혼식에 와줘서 감사하다고 했고, 첫째를 낳았고, 둘째를 임신했고... 이제 둘째까지 낳았다.

"둘째까지 낳아 기특하다. 네가 나보다 낫다." 그러자 배시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애 낳았는데 말씀드려야죠. 아버지 같은 사람이잖아요, 형." 괜히 민망해서 쏘아붙였다. "왜 멀쩡히 살아계시는 너희 아버지 건너뛰고 나한테 와? 징그러우니까 꺼져." "저희 둘째 이름 OO에요. 넉넉할 O에 아름다울 O!" 그러고서 1시간을 웃고 떠들었다.

예전에 대학 때 후배들 술 사준다고 4년간 돈을 무지하게 썼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그거 다 헛돈이다. 나중에 다 까먹는다"고 선배들이 말해도 무시했다. 그때 그만큼 썼으니 지금 당장 내가 죽어도 내 영정과 관 들 사람은 후배들만으로 채울 수 있을 테니까.

얼마전 전유성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개그맨들의 낭만과 의리를 보며 참 많이 울었다. 뭐 내가 전유성 선생님의 그림자나 밟을 수 있겠냐만 그래도 몇몇 후배들에게는 나쁘지만은 않은 선배로 살아온 것 같다.

대학 다닐 땐 하도 남자 후배만 챙겨서 "저 오빠 게이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지만. 뭐 이리 행복 줄 수 있는 후배들이 버티고 있는데 한 세상 그래도 잘지내는 것 같아 기분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