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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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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수당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극으로 많이 등장했던 시기는 언제일까?
바로 고려말 조선초, 이른바 여말선초라 불리던 14세기 후반이다.


자연히 그 중심에 있던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은 다양한 매체에서 소비되어 왔다. 그래서인지 '용의 눈물'을 본 사람에게 유동근은 이방원이지만 '정도전'을 본 사람에게 유동근은 이성계로 느껴지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여하간 이 두 부자는 피만 섞였을 뿐이지, 정말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구국의 명장으로 전장을 누빈 아버지와 과거에 급제한 총명한 아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기 시작한다. 그 둘의 차이는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이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인재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만 간단히 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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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람


이성계는 주변인이었다. 고조부 이안사가 원에 투항한 이후 그의 집안은 원나라의 천호로서 봉직하였으나 공민왕 대에 이르러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에 투항한다. 여진족, 몽골족, 한족, 고려인 등 다양한 집단과 함께 자랐던 이성계는 이러한 중간인의 성격과 보스로서의 성격을 십분 활용한다. 그의 집안 사병이었던 가별초는 여진족과 고려인을 중심으로 한 혼성 기마군단 정도로 해석되는 것이 보통인데 그 수를 최소 2천~3천여 명 정도로 추측한다. 한반도 역사상 한 나라에 속하면서 자신만의 사병을 거느린, 사실상 유일한 군벌이 이성계였다. 당연히 고려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는데 그래서였을까. 그는 사람에 대한 욕심이 굉장히 강했다. 여진족 추장이었던 이지란을 받아들여 의형제를 맺은 걸 시작으로 요양을 지키던 장수 처명을 어떻게든 살려 부하로 만든 일도 있다. 황산대첩때 적장인 아지발도도 살려서 부하로 만들 생각을 하다가 관둔 이성계다. 심지어 고려를 넘어 저 흑룡강 일대의 추장들까지 29명의 여진 추장이 그를 자신들의 주인으로 생각했고 그 속에는 훗날,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조상인 먼터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사람 사랑은 이민족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고려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이인임, 지윤과 사돈을 맺는가 하면 훗날에는 왕이 되기 전의 공양왕과도 사돈을 맺어 고려 중앙에서 자신의 뒷배를 만들어두는 한편 군부의 수장인 최영에게는 아버지같이 대하였다. 그런가하면 사대부들과도 관계를 가져 이색과 서로 교류하였고 자연스레 그의 제자였던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 등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한다. 사대부들 뿐만이 아니라 배극렴, 정지, 박위, 심덕부 등 무장들이 전장에 한 번 같이 가기만 해도 모두 이성계와 관계가 깊어졌다. 그야말로 이성계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가 만들어둔 '인人의 장벽' 안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외부에서 그를 아무리 음해한들 그가 만들어놓은 人의 장벽은 그를 튼튼히 지켜주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사람을 쳐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조선 개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는 아버지처럼 여겼던 최영과 칼을 맞대고 싸워야했고 이색과 정지 등 자신이 믿었던 동지들도 조선 개국 과정에서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조차 비정하지 못했고 자신은 물론, 자신을 따르는 세력들까지 모두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 적도 있었다. 특히 정몽주는 이성계가 낙마한 틈을 타 이성계 일파를 모두 탄핵하였고 기회를 보아 모두 죽이려고 하였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정몽주를 회유하려고만 하였고 이를 보다 못한 아들 이방원에 의해 결국 정몽주는 제거되고 만다.


그래서였을까. 개국 이후 그는 정도전과 남은, 조준 등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사람들에 대해 더욱 비호하기만 한다. 비대한 권력을 손에 쥔 정도전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오면 화를 내었고 공신들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총애하던 신하인 남은이 같은 공신인 조준을 험담하자 남은에게 '개소리 하지말라'며 일갈해놓고도 남은에게 무고에 대한 처벌 등을 하지 않았을 정도다. 그런 그에게 가장 깊은 정치적 동지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그의 경처京妻이자 지금은 중전인 신덕왕후 강씨였다. 이제 조선의 왕이 된 그에게 신덕왕후는 정치적 안배로 자신의 소생을 왕위에 올릴 것을 주문했다.


조선 개국 이후, 벌써 환갑에 가까웠던 이성계는 중전인 신덕왕후 강씨의 주문에 세자 책봉을 논의한다. 원래 세자 책봉은 나라의 가장 큰 중대사 중 하나다. 특히 개국 이후 후계를 이을 첫 세자이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처음에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공신들은 '나라가 태평할 때에는 적장자를,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이방원)이 되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는데 신덕왕후가 옆에서 이를 엿듣고 다 들리게 통곡을 한다. 중전이 공신들에게 눈치를 준 셈이다. 결국 태조가 직접 조준에게 종이와 붓을 주며 신덕왕후의 첫째 아들인 이방번을 쓰라 하였으나 조준 등은 그가 방탕하고 능력이 없다고 거부하였다. 더군다나 방번은 고려 왕실과 혼인하였기에 정통성면에서도 왕이 되기 어려웠다. 그러자 이성계는 방번이 안된다면 방석을 세우라며 막내아들인 열살배기 이방석을 세자로 결정하고 이 결과는 모두가 아는 피맺힌 결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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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사람



이방원은 엘리트였다. 변방의 무인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7살에 과거에 급제한다. 고려, 아니 한국사 최연소 수준의 과거 급제다. 훗날 조선시대 율곡 이이가 13살 때 급제했지만 진사시였고 고종때 이건창이 15세에 합격하지만 이미 그당시 과거는 무의미했다. 이방원은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자 최연소로 급제한 사람이었고,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관료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려의 관료로서 아버지의 개국을 도왔다. 위화도 회군 때에는 개경에 인질로 잡혀있던 신덕왕후와 방번, 방석 등 동생들을 탈출시켜 가문을 무사히 구했다. 그 덕에 이성계는 인질 걱정없이 개경을 공략할 수 있었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뒤 사냥 중에 낙마한 이성계가 벽란도에서 위독해지자 이성계 일파는 정치적으로 정몽주 일파에게 공격당하게 된다. 정도전과 조준 등이 탄핵당하고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이성계는 꿈쩍하지 못했다. 이방원은 이때 친모인 한씨의 삼년상을 치르다 달려와 직접 이성계를 개경으로 데려와 정치적 수세를 한번에 역전시킨다.


그리고 그는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대업을 위해서라면 아버지의 정치적 동지였던, 그리고 자신이 숙부처럼 따르고 스승으로 모셨던 정몽주를 제거해야 함을 인식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하겠다고 하였으나 이성계는 크게 노하며 돌아가 3년상이나 마치라며 반대했다. 이방원으로서도, 이성계를 따르는 가신들로서도 미칠 지경이었다. 정몽주는 우릴 공격하는데 우린 정몽주를 공격할 수 없다니!


하지만 이방원은 형인 이방과(훗날의 정종), 숙부였던 이화, 매제 이제, 의숙부 이지란 등 친족들을 모아놓고 정몽주 제거를 획책한다. 이지란은 이성계가 반대하는 일에 나설 수 없다고 하였고 다른 친족들도 눈치를 보자 결국 이방원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이를 강행하게 된다. 그는 조영규, 조영무 등 아버지의 핵심 가신들을 사주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이니 그의 나이 불과 24살 때다.


이방원은 이때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잃고 역으로 가신들의 신망을 얻는다. 결단력있는 이방원에 대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주변인으로서 중간자적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던다. 그는 사실상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조건없이 사람을 모았다. 이민족, 권문세족, 신흥무장세력, 신진사대부 등 그의 인의 장벽에는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방원은 달랐다. 그는 확실한 자기 편이 될 사람만을 원했다. 아버지 이성계처럼 정치적 동지가 훗날의 적이 되는 상황을 만들기 싫었던 것인지, 그는 친족과 가신 중심으로 사람을 모은다.


세자 책봉에 반발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무렵, 이방원과 함께 하는 인물들은 숙부인 이화, 사촌인 이천우, 장인 민제와 민제의 친구인 하륜,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등 민씨형제, 아버지의 가신이었지만 아버지의 행보에 불만이 생긴 조영무, 조온. 그외 하륜과 민제 등이 포섭한 박포, 박은, 이숙번 등 자신의 가신들이었다.


아버지가 만든 인의 장벽과 달리 아들이 만든 인의 장벽은 철저한 자기 중심이었다.


그는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끈 후, 1400년 왕위에 오른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가 또 한번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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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아버지와 싸워 왕위에 오른 아들은 아버지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아버지는 자신의 사람들이라면 밀어주었다. 그들이 큰 권세를 지니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있는데 무슨 걱정일까. 설령 자신이 죽는다해도 의리를 지킬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의 사람들 중 가장 핵심이었던 삼봉 정도전은 나라의 재정, 군사, 교육, 외교 등 모든 분야를 한 손에 틀어쥐었다. 세자의 스승도, 세자빈도 물론 그 일파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견제하기는 커녕 자신의 사람들을 더욱 키워주었다. 반대파에게 힘을 실어주느니 자신의 아바타같은 측근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준다. 자신이 곧 그들이었고 그들이 곧 자신이었다. 이에 다른 대신들은 불만이 쌓여도 찍소리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정도전을 탄핵하는 건 곧 왕을 탄핵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렇게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과 정지화 등 이른 바 이성계의 측근 그룹은 사실상 조선의 가장 높은 하늘과 다름없게 되었다. 같은 재상이자 공신인 조준의 말에도 그들은 귀기울일 생각을 하지 않거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들은 달랐다.


사병 혁파에 반대하는 것이 1차 왕자의 난 중 큰 계기가 되는데,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이 올라갈 왕좌의 왕권을 위해 사병부터 혁파한다. 자신의 공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반대한 조영무, 이거이 등은 귀양까지 떠나는데 심지어 이거이는 이방원과 사돈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면 핵심 가신이라도 처벌했던 것이다.


이후 민무구, 민무질 등 자신의 처남들이 조금 교만해지자 핑계를 만들어 죽였고 몇년 뒤엔 민무회, 민무휼까지 죽게 한다. 매형이 왕인데 4형제가 모두 매형의 손에 죽은 꼴이다.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그럴 욕심도 없었지만 그저 권력을 누리는 것에 대해 조심하지 않았단 이유로 형제가 모두 사사되었다.


그의 핵심측근이었던 이숙번마저 그의 방자함을 이유로 들어 벼슬에서 내몰렸고 아들인 세종이 재위하는 동안에도 그는 귀양지에서 생을 보내야만 했다. 사돈이었던 심온과 오랜 심복이었던 강상인 또한 미래를 위해 제거되었다. 자신이 떠난 후, 왕좌에 앉을 세종을 위한 결단이었다.


물론 모두가 숙청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킬방원'이란 별명이 무색하게 많은 이가 여말선초 그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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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 개국 초기 아버지인 이성계가 살아있는 동안, 피가 피를 씻는 역사가 계속 된다. 아버지는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징벌하기 위해 조사의를 이용해 반란까지 일으킨다. 수십년 간 전투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던 아버지는 마지막 아들과의 전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를 겪고 말았다.


형제 간에 싸움이 두 번 있었고 그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달리했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을 살리고자 하였으나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꼴이 되었다.
그 속엔 자신의 정치적 동지였던 정도전, 남은을 비롯해 이방번, 이방석 같은 자신의 아들도 포함되었다.


아들인 이방원은 재위 기간 내내 제 아무리 공을 세운 공신이라 할 지라도 죄가 있다면 처벌했다. 물론 모든 공신을 처벌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위험을 가지고 있다면 피로서 답했다.


그 결과, 세종이 자신의 치세를 이어나갈때 아버지의 사람들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아버지를 왕위에 올린 이들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이방원은 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한반도 최고의 태평성대를 칼로 예비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었던 이성계와 이방원은 참 많은 것이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의 다른 인사 정책은 오늘 날에도 많은 것을 되돌아 보게 한다.


리더는 자신을 위한 사람에게 보상해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보상이 때로는 너무 과할 지도 모른다. 그럴 때 리더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


리더가 그저 자신의 편을 들어줄 측근만 모은다면 그것은 구성원 간의 불협화음이 되기 십상이다. 사람이 모인다는 건, 파벌이 만들어진다는 것이고 회사 안의 회사, 조직 안의 조직이 만들어진다는 의미니까. 그것이 창업주여도 마찬가지다. 회사가 발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한 세력이 있다면 회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특히 핵심그룹에 들지 못한 이들은 불만에 회사를 떠날 수 밖에 없고 남은 사람은 핵심그룹에 들기 위해 업무보다는 아첨과 사내정치에 몰두하게 될 수 밖에 없다.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목표에 벗어나있다면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올 수 있다. 당장은 모두가 함께 하는 그림이 아름답겠지만 문제되는 상황에 대한 결단은 오래도록 평온함을 남기는 것처럼.


아버지는 창업에 성공하였지만 수성에는 실패하였다.
반대로 아들은 창업에도, 수성에도 성공하였다.


그 차이를 만들어낸 건 바로 리더의 결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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