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고 슬퍼도 버티고 버텨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몇 주 전에 나는 죽음을 마주했다. 내가 죽을 뻔했다는 건 아니고, 내 주변의 한 분이 돌아가셨다. 요즘 굉장히 말이 많기는 하지만 나는 교회에 다닌다. 모태신앙이기도 하지만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나고 자라다시피 했을 정도로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그리고 얼마 전 돌아가신 그분은 그런 내가 어릴 때부터 보고 지내오던 집사님이셨다. 때로는 같이 교회 뒤편에서 공을 차며 놀아주시기도 하고, 수련회를 가서 물놀이를 하거나 게임 같은 걸 할 때에도 같이 참여하셨다. 그분의 아들과 딸이 커가면서 또다시 나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는데 항상 웃음이 가득한 분이셨다. 5년 전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광고를 하는데 그분께서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고 한다. 너무 많이 전이가 되어있어 수술이 힘든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약물로 치료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고통스러우리라. 항암치료를 받는 사람을 TV 속으로만 봤지 실제로 내 주변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 광고가 있은 후로 교회에서 그분을 몇 달간 못 봤다. 듣기로는 약이 잘 통하지 않아 여러 개의 약을 이용하는 중이라고. 마치 요즘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 약이 사용되듯 항암치료도 그러한 거겠지. 그렇게 몇 달이 또 지나고 다시금 그분을 봤다. 머리숱은 많이 빠지셨고 수척해졌으며 힘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잘 맞는 약이 있다고 하시며 언제나처럼 농담을 하니 괜찮은 건 줄 알았다. 말기 환자에게 5년이란 시간은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다. 치료가 되어 완치가 된다 하더라도 그 지나간 시간은 그의 가슴에 멍울을 남기고 그렇지 않는다면 그의 가족에게 크나큰 아픔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그 약도 시간이 지나면서 효과는 떨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 두 자녀와 부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셨다.
장례식장에 많이 가보지는 않았지만 집안 어른이나 아시는 분이 돌아가셨을 때 참석하고는 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 들었다. 처음 내가 장례식장을 접한 건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당시에 외삼촌이 연수 차 1년간 해외에 가족과 함께 나가게 되어 같이 살던 외할머니를 우리 가족이 모시게 됐다. 많이 연로하셨고 우리가 모실 때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으셔서 많이 아프셨다. 실제로 병원에서 사용하는 병상 침대를 집 안에 마련하고, 마찬가지로 할머니가 호흡이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매주 집으로 무거운 산소통도 들어왔다. 물론 1년 내내 누워계시는 건 아니고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가시기도 하고 어린 나와 동생과 함께 동네 산책을 다니시기도 했다. 휠체어를 타시긴 했지만.
어머니 말씀으로는 외할머니께서 내가 갓난아기 때 참 많이 챙겨주셨다고 한다. 기억은 당연히 나지 않지만 먹을 것도 많이 사다주시고 잘 놀아주셨단다. 그래서 지금껏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외할머니였지만 많이 놀아드리고 웃어드렸다. 내가 동생과 싸울 때면 아프실 텐데도 형제끼리 싸우지 말라며 우리를 가르치셨고 돌아가시기 전 날, 병원으로 가던 순간에는 공부 열심히 하라며 격려해주시기도 했다. 장례식장에 갔을 땐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너무 어려서 죽음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몰랐다. 검은색 옷을 위아래로 입고 마찬가지로 검은색 옷을 입은 어머니 곁에 앉아있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울기도 하고, 빈소 옆에 마련된 공간에서 동생과 함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잠도 잤었다. 그게 내가 겪은 첫 번째 장례식이었다.
시간이 흘렀고 키가 큼에 따라 정신적으로도 점점 성장했다. 주변에서 돌아가시는 어른들을 보며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지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친구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죽음에 대해 사뭇 크게 다가왔었다. 그러다가 나는 고3 수능을 마치고 드라마 <응답하라 1988>를 즐겨보던 중 한 에피소드를 마주하게 된다. 작 중 성동일 배우의 어머니(덕선의 할머니, 작 중 덕선은 혜리)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이었다. 자식 자랑을 하거나 반지 자랑을 하는 아빠와 고모들을 보며 혜리는 무척이나 한심하고 무심하게 여겼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슬퍼야만 할 것 같은 많은 장례식장에서 화투를 치거나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아니 왜 이렇게 시끄러워' 하며.
하지만 덕선의 큰 아버지인 성동일의 형이 집에 장례식이 마무리될 무렵 집에 돌아오자 성동일과 고모들은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우리 엄마 이제 못 보잖아"라고 말한다. "무엇이 급해서 이리 빨리 떠났느냐, 이제 엄마 없으면 어떻게 사느냐"라고 오열하면서 말이다.
'어른들은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나이의 무게감을 강한 척으로 버텨냈을 뿐이다. 어른들도 아프다.'
덕선은 나지막이 내레이션을 읊조린다. 죽음의 슬픔을 그저 버텨내는 것뿐이라고. 해당 에피소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어른스러운 아이는 그저 투정이 없을 뿐이다.
어른스레 보여야 할 환경에 적응했을 뿐이고, 착각 어린 시선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어른스러운 아이도 그저 아이일 뿐이다.
어른으로 성장해나가면서 나는 죽음을 하나 둘 접하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언젠가는 나랑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의 죽음을 마주할 것이다. 내가 며칠 전 참석한 장례식장에서 나보다도 어린 두 자녀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연 나라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척 슬프겠지. 성동일의 말마따나 이제 더 이상 엄마, 아빠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참아보려고 해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런 미래가 당연스럽게 있다는 것이 더욱 마음 한편을 울리고는 한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당연한 미래가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머무를 수는 없다. 흔히 죽음을 마주하여 삶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는 말 중에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이 있다. 무척이나 무책임하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괴롭고 슬프다. 죽음을 마주 한다는 건 정상적인 사고를 지니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부모든 자식이든 결코 반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슬픔을 딛고 우리는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펼쳐나갈 새로운 시간들을 그 사람이 진정으로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외할머니께서 나와 동생에게 말씀하신 마지막 유언을 둘 모두 잘 지켜내어 명문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론 다투기는 해도 언쟁을 높이는 일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도, 며칠 전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한 두 자녀들도 괴롭고 슬프지만 버티고 버텨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설령 그 걸음이 느리고 미약할 지라도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