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는 소소한 일탈
장마가 시작되었다.
뜨겁게 내리쬐던 햇볕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주룩주룩 내리는 비는 그동안의 더위를 잊게 할 만큼 시원하게 내렸다. 더워서 잠 못 이루던 며칠간의 고통은 시원한 밤공기로 치유되었는데 그 때문인지 습하고 답답할 것만 같은 장마가 이렇게 반가운 건 오랜만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실내에만 있는 건 조금 아깝지 않냐고. 괜히 돌아다니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뒤로하고 밖에 나가기로 했다. 나가자마자 발은 흠뻑 젖어버렸다. 참방참방 물이 고여있는 곳을 일부러 뛰어보니, 발은 차갑게 젖어도 어릴 때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았다. 자 그러면 이제 뭐할까. 혼자서 거리를 걸으면서 고민을 했다. 가보고 싶었던 서점이나 가볼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기껏 집에서 나왔는데 가는 곳이 다시 실내라니. 그건 좀 아니지.'
'한강.. 한번 가볼까?'
집에서 뚝섬 한강공원까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사실 뚝섬 한강공원 말고는 가본 곳이 없다. 그래서 한강을 가보자고 생각했을 때 어김없이 나의 손가락은 뚝섬을 검색하는 중이다.
'조금 귀찮을 것 같기는 한데'
지하철 노선도를 확인하니 벌써부터 귀찮은 게 이만저만 아니다. 환승도 해야 하고 지금 나가서 돌아올 때쯤엔 퇴근시간대라 사람이 엄청 많을게 분명하다. 또한 물기가 가득한 채로 지하철에 타면 이래저래 민폐이기도 하고. 그래도 재미는 있어 보이지 않아? 비 오는 날에 한강이라니, 생각도 못할 조합이잖아?
전역 이후에 무료한 삶을 지내는 나였다. 말로는 책도 보고 운동도 하면서 휴식을 취한다고 하지만, 막상 만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지원한 인턴은 우후죽순 떨어지는 걸 보며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나마 운동이라도 하니 뭐라도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인생에서 이토록 재미없는 시간은 다시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재미있는 일을 억지로라도 찾는 중이었다. 처음으로 전시회 같은 것도 찾아다니고 마라톤 같은 것도 신청해버렸다. 그래서 한강을 가자고 다짐한 엉뚱하면서도 나름 재치 있는 생각은 그대로 몸을 이끌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읽고 있던 책을 폈다. 모두가 마스크를 낀 채 핸드폰만 바라보는 풍경. 세상도 많이 변했다. 마치 어릴 적 내가 오늘의 나를 상상하지 못할 만큼 요즘의 거리가 아주 많이 변했다.
이번 역은 뚝섬유원지, 뚝섬유원지역입니다.
도착해서 출구로 나가니 오랜만에 만나는 자벌레는 문이 닫혀있었다. 이럴 수가...
처음 봤을 때는 징그럽기도 하고 신기했는데 바뀌어버린 오늘날의 모습은 이 공간마저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는 수 없지.
익숙한 풍경,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 비가 내리는 오늘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라면을 끓여먹던 편의점을 지나치고 강가로 갔다. 비는 굉장히 많이 내렸다. 분명히 우산을 썼는데도 바지와 옷에 물기가 가득하다. 발은 이미 젖은 지 한참이고. 슬리퍼 신고 나오길 잘했다.
강가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몇몇 나 같이 이상한 생각으로 나온 분들이 계시긴 했다.
일종의 동질감이랄까, 이런 날에 한강에 오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구나 하는.
우산 위로 비는 계속 쏟아졌다. 정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비바람이 나를 적셔갔다.
오리배들은 한 군데 묶여서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흔들었다. 너희도 오늘 같은 날 나를 보게 될 줄은 알았을까.
어릴 때, 나는 배를 타는 게 무서웠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한 4살 때쯤인가? 가족끼리 바다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큰 고무보트를 타고 탐험 비슷하게 했었는데 나는 무서워서 혼자 튜브를 타고 해안가까지 떠밀려왔던 적이 있다. 신발은 벗겨져서 어딘가로 사라졌고 어린 발에 조개껍질은 상처를 내기에 쉬웠다. 상처 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온 나는 그때 이후로 물을 싫어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강경하셨다. 연약했던 탓에 강하게 키우고자 이것저것 운동을 시키셨고 수영도 그중 하나였다. 대회도 나가보고 친구들과 바다에 놀러 가서 빠뜨린 안경을 찾아주기도 했다. 머리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가 확 재치며 손에 든 안경을 보았을 때 친구들은 마치 물개 같다고 했었다.
'이제 돌아갈까'
조금 배가 고프긴 한데 그렇다고 비 맞으며 라면을 먹는 건 조금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기만 달래자고 들어간 편의점에서 반짝이는 라면을 보니 기왕 비 오는 날에 온 거 할 거 다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봉지라면 하나를 손에 들고 소시지와 삼각김밥. 자주 보는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화사가 한강에 가서 먹은 것처럼 나도 준비를 해봤다. 물론 쏟아지는 빗방울과 함께 말이지. 막상 사서 들고 나오니 조금 답이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우산도 들어야 하지, 먹을 거도 들어야 하지. 조리하는 곳에 작은 파라솔이 있긴 해도 굉장히 힘들었다. 다들 이런 적 있을 것 같다. 목으로 우산을 누르고 양손 가득 짐을 들던 경험이. 조리 후엔 심지어 그릇이 뜨거워서 앉을자리를 찾다가 바닥에 엎지를 뻔도 했다. 결국은 라면에 빗물 조금 들어가도 괜찮겠지 하며 물기 가득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으로 비 오는 날에 한강에 가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비 오는 날에 한강에서 라면을 먹어봤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라면을 먹으며 잠깐 생각해봤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인지.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 나뿐만 아니라 요즘 청년층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을 한다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마가 시작하는 오늘, 아무도 하지 않을 법한 이야기 한 가지를 만든 나는 최소한 한 가지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론 무모해 보이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걸 실천하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든다는 것. 남들처럼 거창하게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닐지라도, 하나하나 소소한 일상 속 작은 일탈을 만드는 내가 재미있다는 것.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예상한 대로 찝찝함 가득한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엉덩이 부분이 다 젖어서 의자에 앉기도 아닌 듯하고 그렇다고 서있자니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 그래도 처음 떠날 때의 차갑고 답답한 마음은 조금은 빗방울과 라면 국물에 따뜻하게 자리 잡은 듯하다.
나를 찾는 소소한 일탈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