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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아민 Sep 07. 2022

우리의 노력이 필요한 일

임신 준비 3

본격적으로 2세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평소 신경도 쓰지 않던 생리주기를 확인하고 간간히 운동도 했다.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문득 슬픈 생각이 들면 바깥공기를 마셨다.

얼죽아였던 나는 레몬밤이나 얼그레이 같은 따뜻한 차를 즐겨 마셨고 아랫배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지 않았다. 처음엔 이해했다.

주야 근무가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뭔가를 위해 노력하기엔 생명을 향한 책임감이 강했다.

말은 안 했지만 아직 아빠로서의 책임감을 짊어지기엔 부담이었나 보다.


하루는 '금쪽같은 내 새끼'를 함께 시청하면서 물었다.


"오빠는 솔직하게 아기 갖는 거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남편은 TV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아직은 생각 없어. 결혼한 지 1년도 안됐는데 뭐."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럼 시부모님이 손주 얘기 처음 했을 때는 왜 가만히 있었어?"


궁금했다. 손주 얘기를 할 때마다 남편은 가만히 있었다. 마치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묵묵히 자리만 지켰다. 남편은 TV 채널을 돌리며 입을 달싹였다.


"부모님들이야 손주 보고 싶은 게 당연한 거고, 굳이 내 생각을 얘기해봤자 다툼만 생기잖아."


그랬다. 남편의 성격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남편은 분란이 생기는 걸 싫어했고 관계가 틀어지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참아내고 인내하다 잊어버리는 게 남편의 관계 유지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뭐든 명확해야 직성이 풀렸다. 임신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럼 부모님한테 말씀드려야지. 아직은 아기 생각이 없다고."

"말해봤자 내 말은 안 들어주시는데 뭘."

"그럼 나는?"


남편은 심각하게 물어오는 나를 쳐다봤다. '넌 뭐?'라는 얼굴이었다. 내가 시부모님에게 받는 압박은 남편의 관심 밖인 것 같았다. 속에서 울컥 분노가 치솟았다. 시어머니와 통화만 하면 아기 얘기를 하셨고 시험관 아기까지 생각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남편에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임신이 그저 나만의 일이라는 냥 구는 남편이 미워졌다.


"자기 엄마가 그러시더라. 점보고 왔는데 자연임신은 힘들 수 있으니 시험관 아기 생각하라고. 우리 피임해온 것도 모르시고 매번 통화할 때마다 손주, 손주 하시는데 오빠는 생각이 없다고? 내가 자웅동체야? 나만 쫀다고 아기가 생겨?"


남편은 그러데이션처럼 서서히 분노하는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저 표정은 연애 때부터 싫었다.

내 감정은 나만의 것이라는 듯 그 감정에 동요할 생각이 없다는 그런 표정.


"내가 아직 아빠 될 마음이 없는데 엄마가 쫀다고 억지로 가질 순 없잖아."


한숨이 나왔다. 전혀 내 걱정에 공감을 못하는 듯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다르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결국 남편은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오빠가 명확히 얘기해. 아직은 내가 아기를 가질 마음이 없으니 아민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 1년 지나면 알아서 가질 테니까 그동안은 기다려달라, 라고."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그리 심각하게 할 얘기냐는 듯 다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속이 답답해져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남편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아기 생각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간 폭풍 같은 잔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노력하는데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아기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 중 뭐가 더 나은 걸까.


안방에 들어온 지 10분이 됐을까 남편이 안방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에 나란히 누웠다.

내가 안방으로 들어와 눕는다는 건 속이 시끄럽거나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남편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문을 틔었다.


"엄마가 자기한테 손주 얘기하는 거 스트레스받아?"

"응. 오빠가 피곤해한다고 해도 나보고 옆구리라도 찌르라고, 내가 곰살맞게 굴면 다 넘어오게 되어있다고..."

"옆구리 찔러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데."

"오빠한테 손주 얘기하신 적 있어?"

"... 아니."

"나한테 다 하니까. 오빠한테 하면 스트레스받아할 거 아니까 나한테 하시는 거야. 난 본인 말에 말 한마디 못하고 네, 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까. 내가 스트레스받을 거란 걸 알아도 본인 할 말은 해야 하니까."

"...."

"며느리는 그런 거야.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옛 사고방식을 지니신 분들이야."


남편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사실 시어머니의 손주 얘기는 많이 들어 익숙했다.

'네, 노력해볼게요.'라며 넘기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그저 남편이 이 일에 관심 없다는 듯 구는 게 싫었다.




몇 주 뒤 시댁과 다 함께 타 지역으로 갈 일이 생겨 시부모님의 차를 타고 이동을 하게 됐다.

왕복 4시간 되는 거리인지라 간단히 여행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차를 타고 반쯤 갔을 때 조수석에 앉아계시던 시어머님이 살짝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셨다.


"아민아 병원 갔다 왔니?"

"네? 아, 네."

"처음부터 큰 병원 가서 진료받아. 몸도 따뜻하게 하고 신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엄마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하세요."


깜빡이 없이 남편이 치고 들어왔다. 작정하고 말을 했는지 날카롭게 내리꽂는 분위기에 차 안이 숙연해졌다. 뒷자리 오른쪽에 앉아있던 시누이가 중앙에 앉아있던 남편의 허벅지를 착, 하고 소리 나게 쳤다. 제 엄마와 동생 사이에서 눈치는 보는 듯했다.


"네는 말을 뭐 그렇게 하노."

"난 생각도 없는데 계속 얘기하니까."

"엄마는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나한테도 맨날 아기 얘기한다. 딩크족 할 거라고 말했어도."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바깥 풍경을 봤다. 명확하게 해 주기를 바랐긴 했지만 이렇게 저돌적으로 말하는 건 원치 않았다. 분명 '우리 아들이 저렇게 말할 리가 없는데? 며느리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을 거야.'라며 속으로 나를 탓하실게 분명했다.


어쨌든 차 안은 조용해졌다. 남편은 내 손을 꼭 잡아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공기는 불편했지만 마음은 시원했다.


문제는 이 이후였다.

시어머니는 아기 얘기를 나에게만 하셨다. 물론, 남편이 그 자리에 없을 때만.


한잔하신 시아버지 때문에 남편이 운전을 하게 되었다.

주차된 차를 빼러 간 사이에 시어머니는 내 옆으로 와 물었다.


"병원에서는 뭐라 하디?"

"면역력이 좀 떨어져 있는 거 말곤 크게 문제없대요."


자궁경부암에 걸릴 확률이 높은 인유두종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느니 난소에 작은 물혹이 있다느니, 세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어차피 말해봤자 좋은 소리 못 들을 거, 그저 걱정하시지 않게 간략히 설명했다. 면역력이 떨어져 있는 건 사실이니까.


"건강관리 좀 하고 그래라. 너 맨날 찬 거만 먹더라. 따뜻한 거 먹고 운동도 좀 하고. 자궁이 튼튼해야 아기도 빨리 생기지. 애는 가질 수 있다나?"

"네."

"그래 그거면 됐다. 왜, 부담스럽나?"

"그건 아닌데, 솔직히 오빠가 체력적으로 많이 힘든지 제가 옆구리 찔러도 반응이 없어요."

"아이고, 이제 신혼 1년 차 인주제에. 네가 좀 꾸미고 치대 봐봐."

"... 꾸미고 치대도 피곤해하는데 어떻게 그래요."

"별 핑계 다댄다. 네가 노력하면 안 되는 게 뭐 있겠니."


시어머님의 표정은 참 솔직하다. 입술을 삐죽 대면서 나를 흘겨보셨다. 아 스트레스야.

내가 사실을 말해도 결국 다 내가 못난 탓이 되어버린다.

남편이 차를 빼오자 언제 그러셨냐는 듯 옆에서 떨어져 차로 향했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엔 시아버님이 타시고 뒷좌석엔 나, 시누이, 시어머니가 탔다.

문에 바짝 붙어서 최대한 붙지 않으려 노력했다. 올 땐 남편이 옆에 앉아 심적으로는 편했는데 갈 땐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불편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갑갑했다.


별 탈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나와 남편은 소파에 퍼질러 앉아 잠시 멍 타임을 가졌다.


"차 안에서 그렇게 버럭 하면 엄마 상처받으셔."

"그렇게 안 하면 계속 얘기할 양반이야."

"... 어차피 계속 나한테 얘기하셔."


남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봤다.


"자기 차 빼러 간 사이에 옆에 와서 병원 다녀왔냐 애는 가질 수 있다냐 네가 좀 꾸미고 꼬셔봐라, 하셨어."

"아..."

"자기 앞에서만 안 할 뿐이지 나한테는 앞으로도 계속하신다는 이야기야."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 해. 오빠."

"... 알겠어."

"난 거짓말하기 싫어. 진짜 해볼만큼 해보고 싶어. 이왕 결혼한 거 부모도 되어보자."

"... 응."

"다음 달부터 가임기 체크해서 말해줄 테니까 힘들어도 피곤해도 오빠도 노력해야 해."

"으아, 알겠어. 해보자."


남편은 몸을 벌떡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누굴 위한 결혼인가'에서 이젠 '누굴 위한 임신인가'로 주제가 바뀌었다. 양가를 떼놓고 살 수는 없다지만 양가를 위해 살아가지는 말아야 할 텐데...그저 묵묵히 기다려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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