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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an 01. 2017

<온 더 무브> 지적 열망을 다시 지펴보는 마법같은 책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틀 휴가 내고 '쉼표'로 택한 책이다. 480쪽 나름 두꺼운 자서전. 올리버 색스라는 인물에 대해 들어는 봤으나, 그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못했거늘 과연? 그러나 평소 흠모 혹은 존경하는 트친들이 너도 나도 말을 보태 찬양했으니,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대체 어떻길래. 원래 호기심이 모든 장애를 이겨내는 법이다. 


2015년 82세로 세상을 떠난 올리버 색스 박사. 인간의 뇌와 정신에 대해 탐구한 의사다. 그리고 그는 스토리텔러였다. 환자들의 사연을 글로 썼다. 인간애를 바탕으로 관찰하고 공감하며 '이상한 사람들'을 그냥 '우리와 조금 다른 사람들'로 살려냈다고 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대표작은 은유가 아니라 그냥 진짜 그런 환자 얘기. 그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자서전에서 언급한 책들은 거의 번역된 모양. 그런 저자다. (저서 리스트) 몸이나 정신이 병든 이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보내놓고 없는 척하며 살려는 우리 '문명' 세계의 의학, 우리 사회의 관습이 야만적이라고 성찰하는 그런 의사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2015년에 낸게 바로 이 책이다. 암과 싸우는 의사가 마지막에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숨결이 바람 될 때>와 닮은 구석도 있지만 거기까지. 세상을 탐한 물리적 시간이, 관록과 경륜이 다르다. 


이 자서전은 이런 그를 몰라도, 과거 그의 역작들을 몰라도 상관 없다. 한 인간에게 반하는데 부연 설명은 필요 없다. 열정으로 가득한 삶, 지적인 열락을 나누는 인생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아주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솔직담백한 고백은 한 인간이 만들어간 여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의사 집안에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청년 색스는 동성애 성향을 고민하던 시절 "가증스럽구나.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라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다. 아마 평생 상처로 남았겠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더 강하다. 그는 때로 좌절하고 절망해도 끝내 버텨냈다. 평생 사랑했고, 탐구했고, 삶을 즐겼다. 모터사이클의 속도와 아찔한 위험을, 그 시절 스킨스쿠버에 빠져들어 바다와 수영을, 데스밸리와 사막의 바람을, 역도 스쿼트 같은 근육운동을, 온갖 종류의 술을 탐닉했다. 심지어 뇌를 탐구하며 마약에도 빠져들어 4년은 약쟁이로 바닥까지 가는 이중생활을 버텨냈다. 죽을 고비를 맞아도 그 모든 걸 기록했고 지치지 않고 연구했다. 때로는 속도가, 약기운이, 사랑과 쾌락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자기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학문을 탐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열정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그 모든걸 기록하는 습성, 언어로 구현하면서 자존감을 고양시켰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그는 온갖 일에 설레는 인간이었나 보다. 거꾸로 뒤집힌 세계를 보여주는 특수안경으로 착시를 경험하자 "매력적 현상"이라고 회고한다. 지적인 이해, 통찰, 심지어 상식조차 지각 작용의 왜곡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을 그는 즐겼다. 주의 깊게 관찰하며 직관을 신뢰하는 방법과 동시에 반대로 어떤 현상에도 그 기반이 되는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느긋하고 사려 깊은 이와 열정적이고 전투적인 이들 사이에서 그런 동료 관계를 동경했다. 그에게는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선생이 아니었을까. 심지어 도무지 알 수 없는 행태를 보이는 환자들조차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를 꼼꼼한 관찰자로 만들었겠지. 결국 그가 자세하게 풀어낸 이야기 덕에 그 환자들, 혹은 신경의학 자체를 세상은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처음부터 아주 멋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랜 벗 톰 건이 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색스에게는 인간애나 연민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는 고백이 나온다. 그런 자질은 가르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닌데.. 이제는 인간애가 넘치고 감수성 풍부하고 다양성이 살아있는 글을 쓰고 있다는 감탄. 그는 전한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온건지 너 자신은 알려나 모르겠다. 그저 환자들과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일어난 일일까, 아니면 LSD의 도움으로 사람이 열린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와 진짜로 사랑에 빠진 것일까(반하는 것하고는 반대되는 의미에서 말이야), 아니면 그 셋 다일까.." 


저 편지를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다는 색스. 나도 읽는데 가슴이 뛰었다. 비록 LSD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사회인으로서 밥벌이하면서 겪은 일들, 혹은 사랑과 우정 속에서 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무엇을 배웠을까. 내가 얻은 자질과 경험은 얼마나 크고 근사한 것일까. 미처 생각하지 못한 틈에 이 나이의 현재 나는 어떤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과일까. 지난 시절 내가 주변 많은 선배와 후배, 동료, 친구와 가족들에게서 얻은 힘들이 어떻게 나를 성장시켰을까. 이에 더해 앞으로 내가 만나고 겪을 사람들과 그 시간들은 또 어떤 고마움으로 남게 될까. 사람 일은 모른다지만, 나는 아직 색스의 절반 밖에 살지 않았는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책은 2016년을 마감하면서 읽은 덕에 느낌이 또 달라졌을 수 있다. 한 해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됐고, 지친 내게 위안이 되는 쉼표 같은 독서였다. 평생 뜨겁게 삶을 즐겼고, 사랑으로 넘쳤던 탐구적 인간을 만나는 건, 책을 통해서라도 고마운 경험이다. 끊임없이 글을 쓰는 색스의 열정도 전염성이 있다. Create.. 뭔가 만들어내고 창조하는 것보다 의미 있는게 있을까? 직접 남길 수 있는 건 역시 글이 아닐까? 막상 이 독후감을 정리하는 동안, 내 글 재주는 알량한 수준 밖에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풀이 죽었다만.. 그래도, 그럼에도. 아아.. 


어쨌거나 고마운 색스 박사님. 당신의 삶을 조금 엿본 덕분에 지적 열망을 다시 충전했다.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 그 자체에서 순수한 기쁨을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을 놓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떠들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즐거움을 상상한다. 신뢰하는 사람들과 일하면서 얻을 만족과 보람, 한 단계 서로 성장하는 그 과정들을 기대한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도전을 그려본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인생에 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마침 C님이 새해 인사를 보내주셨다. 저 문장들이 가슴에 더 깊이 다가온 것은 아무래도 색스 박사님에 취한 영향이 있을 터.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갈 책무가 누구에게나 있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세상을 향해 열어놓고서.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다. 


저 이미지로 새해 트윗은 이렇게 올렸다. 어찌나 감상적인지ㅎㅎ 그럴 때가 있는 법이다. 


더 웃고, 더 도전하고. 더 사랑하렵니다. 사랑하고 살면 좋겠어요. 결국 꿈꾸는 사람들이 다르게 진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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