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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Sep 13. 2016

<숨결이 바람 될 때> 내 삶이 가치 있는 순간은

이렇게 겸허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사라지고. 익숙했던 죽음이 내게 구체적 현실로 다가왔다..내가 치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의 발자국을 따라갈수 있어야 할텐데.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했다. 케임브리지에서 과학과 의학의 역사와 철학 과정을 거쳐 예일대 의과대학원에서 의술을 배웠다. 특히 인간의 생각과 가치 판단, 몸을 지휘하는 뇌를 탐구했다.  스탠퍼드대에서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 빛나는 미래가 열린 상태.

PAUL KALANITHI (1977~2015)


AS soon as the CT scan was done, I began reviewing the images. The diagnosis was immediate: Masses matting the lungs and deforming the spine. Cancer. In my neurosurgical training, I had reviewed hundreds of scans for fellow doctors to see if surgery offered any hope. I’d scribble in the chart “Widely metastatic disease — no role for surgery,” and move on. But this scan was different: It was my own.


2014년 1월 NYT에 실려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글, How Long Have I Got Left? 의 첫 대목이다. 책은 그가 2년 여 투병하면서 남긴 기록. 마지막은 아내 루시가 마무리했다.

문장이 정말 좋았다고들 하는데, 번역본으로는 폭풍 감동 수준은 아니다. 워낙 극찬 받고 유명했던 책이었던 덕분에 오히려 조금 담담하게 읽었다. 그런데 일요일 밤에 펼쳐든 채로 다 읽고 월요일, 화요일.. 자꾸 생각난다. 그의 생각이, 그의 마음이.

그리고, 이 영상을 보니 더 절절하다. 수백 명의 환자 옆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켜봤던 의사. 정작 저 영상의 주인공도 결국 떠났다. 다른 환자와 다를 바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는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기록했고, 딸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글로 남겼다.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몇 달 더 연명하는 대가로 말을 못한다면? 아이가 얼마만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말하게 될까?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있게 만드는건 무엇인가?


그는 뇌 수술을 전문으로 했다. 수술용 칼을 든 채로 1mm의 오차가 죽음을 부르기도 하고, 죽음보다 가혹한 댓가를 가져오기도 한다. 8살 아이의 뇌종양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냈다. 식욕과 수면욕 등 기초욕구를 조절하는 뇌 부위에 생긴 종양. 그 아이가 12살 때는 140kg의 폭력적 괴물이 될 지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생명을 구하는 일에 주저할 수는 없는 일. 그런데 살만한 가치라는 건 어디에 있는가. 감당 가능한 선이란게 모두 다를텐데, 인생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환자의 뇌를 수술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성, 가치관, 무엇이 그의 삶을 가치있게 하는지. 또 얼마나 망가져야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그는 난데 없는 뇌종양이나 암 등 진단을 받고 어제의 삶과 다른 삶을 맞이할 환자들을 수도 없이 지켜봤다. 의사로서 수련하는 과정에서도, 아프기 전에도 그는 자성하는 인간이었다.


순간 환자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던 예전 기억들이 몰려왔다. 걱정하는 환자에게 퇴원을 밀어붙였던 일, 진찰하고 기록하고 몇 가지 진단으로 깔끔하게 분류해버린 환자들의 고통. 내가 보지 못한 고통의 의미들이 전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수술의 불가피한 실패는 참기 힘든 죄책감을 가져오고, 다른 사람의 죽음이 멍에가 되는 직업. 의사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것일까. 날마다 죽음을 본다면, 죽음에 무뎌지는게 의사 본인을 위해서 나은 것일까. 친구를 떠나보낸 어떤 이가 몇 달 간 치료를 맡았던 의사가 같은 건물 장례식장에 한 번 들려주지 않는데 속상했던 일을 얘기한 적 있다. 하지만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수많은 환자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자신이 구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 이들에 대해 의사의 멘탈은 어디까지 버텨내야하나.


"이렇게 가나봐" "내가 당신 곁에 있어".."이번에 어떻게 잘 버틴다 해도, 앞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어".."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난 준비됐어".. 


그는 호흡유지장치를 떼고 모르핀으로 통증을 견디면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대사들이 애달프다.

나는 과연 떠나는 날을 차분하게 맞을 기회가 있을까. 돌연한 사고가 아니라면, 존엄성을 지킬 시간이 있을까.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되는 날, 내 삶에서 지키고 싶은건 뭘까. 아이들은 얼마나 자라야 마음이 놓일까. 살아계신 부모님에겐 어떤 일이 될까.. 마음 속 질문이 몇 가지 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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