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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Oct 03. 2018

<안동 1박2일> 고즈넉한 시간 여행

딸과 둘이 오붓여행을 약속한게 봄인데, 가을입니다. 서로 바빴다고 해야죠. 드디어 1박2일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침 진짜배기 지역 전문가 A님이 기획한 여행 기회가 있어, 휴일근무까지 바꿔가며 거사를 도모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고.. 간단히 사진 위주로 남겨봅니다. 제 메모리를 믿지 못하니, 기록이 필수.


29일 토요일, 전날 숙취는 무시하고 가족들 아침 차리고 세탁기 돌려 빨래 널고 출발. 휴게소에서 소떡소떡도 먹어보고, 단양휴게소 명물이라는 새뱅이(민물새우) 순두부도 미션 클리어. 맛보다 기분ㅎ 도로를 달리다보면, 어느 순간 산들이 참 잘생겼다 싶습니다.


1400 경북 안동 도착. A님 주도로 ‘스페이스 ‘마’라는 코워킹 공간이 지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일행과 조우. 안동에서 전국 마 생산량의 3분의 2가 난다고요. 안동의 매력이 제주나 강원보다 못할 것 없다는 자신감으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중입니다.


1500 병산서원.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던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이 옮긴 곳이라고요. 서애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곳. 누각 만대루에는 마침 선비 차림의 선생님이 특강 중.


이날 목적지인 하회마을은 병산서원과 멀지 않습니다. 고택에 숙소를 잡은 덕분에 마을 주민처럼 차량 진입이 가능했습니다. 왼쪽 사진이 제가 묵었던 양오당 주일재. 안채는 350년, 어떤 방은 150년 됐다고요. 오른쪽은 일행이 묵은 청운재. 250년 정도 됐다고 합니다. 주일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증손이 분가한 집입니다. 둘 다 충효당 옆입니다. 우리는 각자 작은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전국의 농산물과 음식 전문가인 A님이 어련히 준비하셨을까 기대했는데 역시나. 알뜰살뜰 일정에 시간을 줄이고자 도시락을 준비했답니다. 단정하게 싸놓은 보자기를 풀고 나니 ‘선유 도시락’이 나옵니다. 안동에서 즐겨 먹는 조밥. 콩가루로 무친 나물. 동태전, 마전, 호박전도 콩가루에 부쳤습니다. 콩가루 고등어 튀김도 고소합니다. 북어구이도 보드랍고 식감 좋습니다. ‘집장’이라 부르는 장에 풋고추를 씹어봅니다. 장이 이렇게 맘에 들다니. 맵고 달달한 쇠고기 고추장 볶이도 오랜만입니다. 구수한 된장국은 고택 주방에서 데워주셨습니다. 탄수화물 기피하던 주제에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습니다.  


저녁식사를 1730 도시락으로 해결한 것은 이날이 하회마을 줄불놀이 날이기 때문입니다. 1년에 두 차례 열린다는 줄불놀이가 바로 이 날 행사입니다. 어느새 하늘은 붉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날렵한 기와지붕 위로 펼쳐지는 하늘 풍경만으로 행복한 탄성이 터집니다. 좁지만 정겨운 한옥마을 골목을 구비구비 돌아 강변으로 나갔습니다. 하회마을은 낙동강 지류라는 화천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강변 너머 부용대라는 작은 절벽이 보입니다. 과하지 않은 조명에 어둠이 내려앉습니다. 강변은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1800부터 사전행사라는데 스피커를 통해 짜라짠짠 노랫소리가 좀 크네요. 좀 과했네요. 좀 아쉬운 대목.


천천히 간 덕분에 사전행사는 조금 겪고.. 행사 진행자의 설명에 따라 줄불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부용대 절벽과 이쪽 강변을 연결한 몇 가닥의 줄에 각각 수십 수백 줄이 아래로 타오릅니다. 불이 위로 치솟는게 아니라 비가 내리듯 아래로 떨어집니다. 활활 타는게 아니라, 적당히 차분하게 느리게 탑니다. 어둠 속에서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기분. 작은 불들이라 소박한 느낌도 나지만, 과거 안동의 양반들이 즐기던 호사. 다음날 아침 부용대에 가보니, 도르레 다섯 대를 쓰던데, 원래는 사람들이 줄을 당겼다고 합니다. 부용대에서는 ‘낙화’, 그야말로 불덩이가 떨어지는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강물로는 작은 촛불 모양의 불꽃들이 차례로 떠내려 옵니다. 마지막엔 현대식 불꽃놀이도 펼쳐집니다. 강변에 딸과 나란히 앉아 불놀이를 즐기는 호사라니. 전날까지 일하느라 정신 없었는데, 하루만에 이렇게 비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에 머물고 있다니.


일행들과 두런두런. 그리고 꿀잠을 잤습니다. 창틈으로 들어온 작은 거미 한 마리 덕분에 딸과 호들갑을 떨었지만, 소소한 추억. 장작으로 군불을 때어주신 덕분에 방바닥은 따뜻했고, 오래된 고택은 지친 몸을 넉넉하게 품어줬습니다.


평소 일어나던 대로.. 새벽에 눈을 뜨고, 담장의 코스모스를 만나고. 안채를 카메라 가득 담아봅니다. 아무도 없는 시간. 천지가 조용하고, 공기는 맑고, 하늘은 파랗습니다. 혼자 골목을 걸어보고. 슬슬 준비를 마친 딸과 다시 돌아다녔습니다. 간밤 줄불놀이가 펼쳐진 강벽엔 뚝방길이 있습니다. 어느 곳을 걸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동네입니다. 기분좋은 설레임과 경건함이 교차하는 마을입니다.


아래 사진은 청운재입니다. 한옥의 멋은 작은 문으로 보이는 세상. 풍경 아래 펼쳐지는 저 마룻바닥이 250년 된 거라니. 목재를 어찌 썼는지, 하나 하나 눈길이 갑니다. 청운재 주인장께서 커피를 내려주셨습니다. 직접 손으로 원두를 갈아주십니다. 시간이 넉넉한 삶이 펼쳐지는 고택에서 기계로 급하게 커피를 준비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뒷마당 텃밭에 배추가 탐스럽습니다. 원하는 만큼 뽑아 가져가라 하셨는데, 깜빡했네요. 뒷벽에 쌓인 목재가, 수 백 년 된 자재입니다. 소금물에 적셔 말리고 다시 적셔 말리고. 수 년 씩 단단해진 목재라, 뒤틀리거나 부서지지 않는다고요..


동네 산책 후 일찌감치 짐을 싸서  L님 모자와 함께 부용대로 갔습니다. 하회마을에 와봤던 L님이 부용대와 겸암정사 얘기를 해주셨어요. 겸암정사에 주차한 뒤 5분 만 올라가면 됩니다. 간밤에 묵었던 하회마을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하’강물이 ‘회’ 돌아감는 마을. 굴뚝 연기가 나지 않는 집부터 식량을 나눠줬다는 당대의 사연들. 류성룡 선생의 형제가 자주 올랐던 곳입니다. 굽이 살펴보고 민생을 논했겠죠. 한 마을을 저렇게 바라보는 동네 어르신의 어깨도 무겁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겸암정사는 류성룡의 형님이 살았다는데요.. 하회마을에 류씨 후손 분이 8년 전에 구입했다고 합니다. 5000원 대추차 맛이 깊어요. 뜨거워서 입천장을 데긴 했지만. 너무 훌륭한 맛이라 뭐라 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저런 전경을 놓고, 무슨 말이 필요한가요. 작은 방도 있습니다. 8만원, 16만원 방값을 확인했습니다. 언젠가 설설 끓는 저 방 구들에 몸을 녹이면서. 뒹굴뒹굴 무위를 누리고 싶습니다.


하회마을 우리가 묵은 댁에서는 아침이 제공되지 않았기에, 결국 늦은 아침을 위해 안동 시내로 나옵니다. 하회마을에서 40분 거리. 전날 미리 추천받은 곳 중 신라국밥의 맑은 내장탕이 더 궁금했지만 일요일 휴무.  A님은 옥야식당의 선지국을 더 먼저 꼽기는 했습니다. 저 커다란 솥에서 먹음직하게 끓는데 후딱 떠주십니다. 8000원. 푹 무른 대파, 넉넉히 담아준 고기와 선지. 고단함을 풀어주는 맛입니다. 딸은 시장 통에서 파는 문어 타령. 결국 다리 한 짝 사서 얼음 넣고 스티로폼 박스에 득템. 1kg 4만원인데 다리 하나가 3만원. 엄청 커요.. 모녀가 서울 돌아와서 늦은 저녁으로 잘 먹었어요.


여기서부터는 L님 모자와도 헤어져 다시 딸과 둘이 다녔습니다. 지역 혁신에 관심 많은 A님이 추천한 도심 아이스크림집 ‘아차가’. 젊은 청년 사장님이 이탈리아까지 가서 젤라또 아이스크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아이스크림집에서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차렸답니다. 양반쌀 젤라또 강추. 살짝 쌀알이 씹히는데 믿기지 않게 고소하고 맛있습니다. 막걸리 젤라또는 다음 기회에.


유명한 집은 다 모여있군요. 맘모스 빵집에서 크림치즈 빵을 줄 서서 샀고요. 빵집 지하의 초콜렛 가게도 갔습니다. 멋진 유럽 거리 느낌으로 지하에 내려가면 고상하고 우아한 초콜렛 가게가 나와요. 비현실적인데, 1500원짜리 한 알씩 입에 넣고 나오니, 행복지수가 높아집니다.


아차가에서 카톡으로 인사했더니 A님이 바로 맞춤형 제안을 주십니다.


“차로 오분거리에 있는 월령교에 도착해서 산책 후 구름에 리조트에 있는 북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목선을 타고 안동호의 가을바람을 느끼는 것도 좋습니다.”


오호. 미스터션샤인에서 러브 얘기 나오던 만휴정도, 도산서원도 모두 40분 거리인데, 서울에서 더 멀어지는지라 망설였는데. 5분 거리! 바로 달려갔습니다. 중간에 정자가 있는 월령교에서는 분수쇼로 무지개도 볼 수 있었네요. 다리 건너 산책로도 근사합니다. 북카페 쪽으로 가다가 고택이 나와서, 들어가보니 국화차를 무료로 주십니다. 사진도 찍어주시고, 이런저런 설명해주시는 자원봉사자님 친절함에 덩달아 유쾌합니다.


당초 월령교 주차장에서 북카페까지는 걸어서 18분이라고 지도에 나왔는데.. 저 고택 즈음에서 우리는 결정해야 했습니다. 꽤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거든요. 시간도 많지 않은데? 굳이 지칠 필요가? 다시 월령교를 건넜습니다. 차로 4분 만에 이동했습니다. 저질 체력에 오르막 올랐으면 18분엔 안 될 거리였더군요. 구름에 리조트는 현대적 한옥입니다. 북카페는 꽤 근사합니다. 딸과 각각 책 보는 카페놀이도 우리 모녀가 운 좋은 주말에나 누리는 호사. 아참. 이 카페의 화장실은 이번 여행에서 최고로 좋은 시설이었어요ㅎ


조금 노닥거리다.. 늦은 점심을 위해 안동시내 문화갈비로 이동. 1인당 2.5만원이라는데 한우 잖아요. 이 정도는 쓰지 뭐.. 했는데 3인분 이상만 판매한다고요. 7.5만원. 그러나 적당히 달달하고 부드러운 한우. 고소하게 무쳐낸 파채. 안 먹었으면 아쉬웠을 겁니다. 공기밥 1000원인데 비빔밥 재료에 구수한 된장찌개가 나옵니다. 이 정도는 써줘야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는 둥, 엄마의 씀씀이를 미심쩍게 보는 딸에게 호기를 부렸습니다. 돈은 이럴 때 쓰려고 버는 거라 생각합니다. 한우 먹으면서 별 생각을 다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3시간 정도 걸렸어요. 딸이 선곡해준 음악을 들으며 수다. 안예원이라는 가수의 노래들이 특히 좋았어요. 전 처음 들었거든요. 1박2일 온전히 딸과 보낸 시간이 고마운 선물이란 거, 압니다. 일상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주는 보약 같은 시간. 이런 1박2일 정도는 좀 더 자주 가도 좋을텐데, 둘이 나서는데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니. 한 번 또 맛을 들였으니 또 기회가 오겠죠.


대통령님이 지난해 10월 찾았던 곳이 바로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입니다. '재조산하(再造山河), 나라를 다시 만들고, 위기와 국난에 대비하는 징비 정신을 돌아보는 바로 그 곳. 안동에 꼭 와보고 싶었는데, 1년 여 만에 이뤘네요. 당시 류선생에 대해 “국난에 미리 대비하고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재조산하,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전 과정에 탁월한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죠. 요 말씀 나오는 이 영상 좋습니다ㅎㅎ


 A님이 하는 ‘더 라이프스쿨’ 안동캠퍼스도 10월 중순에 진행된다는데요. 응원합니다. 하회마을 고택은 다시 와서 그 고즈넉한 시간을 경험하고 싶어지는 곳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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