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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Feb 17. 2019

<인간 불평등 기원론>답(solution) 없는 불평등

답(solution) 없는 불평등이라면 불공평한데...


평등이 모든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든다는 확신. 평등이 많은 분야에서 ‘답’(solution)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여 이 불평등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질문은 매우 솔깃한 질문입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니. ‘18세기의 철학자‘로 묶어두기에는 아까운,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가 루소는 뭐라고 했을까요.

회사 도서실에서 빌렸습니다. 루소 할배도 잘 생겼네요. 18세기 스케치가 남은건지 궁금.. 


작은 기대와 설레임이 없었다면 거짓말. 그런데, 읽을수록 당혹스럽습니다.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신도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 노래를 가장 잘 부르고 춤을 가장 잘 추는 사람, 얼굴이 잘생기거나 힘이 센 사람, 재주가 가장 뛰어나거나 언변이 가장 좋은 사람은 존경을 받았다.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최초의 선호에서 한편으로는 허영심과 경멸이 태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심과 부러움이 생겼다. (103쪽)


남들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인정 욕구,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거나, 얼굴이 잘 생기거나 힘이 센 사람, 재주나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 존경을 받고, 이것이 불평등, 혹은 악덕을 위한 첫걸음이었다니. 소유에서 비롯되는 도덕적 정치적 불평등은 논외로 하더라도,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부터 따지고 들어가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평등을 탐구한다는 발상 자체가 흔들립니다. 근원적이고 본능적이잖아요. 더구나 타고 나는 자질, 기질, ‘매력자본’의 불평등은 어찌 해볼 수도 없는 거잖아요. 불평등을 ‘고쳐야 할 상태’로 인식하는 것조차 버릇과 습관일 뿐, 이걸 어쩌나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 순감부터, 그리고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106쪽)는 건 또 어찌하나요. 인류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인도한 협업을 통한 생산성 증대, 결과적 잉여와 풍요로움의 존재 자체가 불평등의 근원이라면. 자연 상태의 원시로 돌아가는게 ‘답’일 수는 없잖아요.

     
모든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저 평판과 명예와 특권에 대한 보편적 욕구가 얼마나 자주 재능이나 힘을 훈련시키고 비교하는지, 그리고 그 욕구가 얼마나 정념을 자극하고 증대시키는지 주목하고 싶다. 그 욕구가 얼마나 사람들을 서로 경쟁하거나 경합하게, 더 정확히 말해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지를 지적하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열망, 남보다 돋보이려는 열광 덕분에 인간 속에는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 미덕과 악덕, 학문과 오류, 정복자와 철학자가 동시에 있다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암담하과 비참함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몇 몇 세력과와 부자가 권세와 부의 절정을 누린다는 것을. (133쪽)

‘평판과 명예와 특권에 대한 보편적 욕구’는 인간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특권을 제외하더라도 ‘평판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덜 이기적이도록, 선량하도록 해주는게 아닌지. 그런 욕구가 ‘서로 경쟁하거나 경합하게, 더 정확히 말해 서로 적대하게‘ 만든다는 전제도 난감합니다. ’선의의 경쟁‘처럼 적대 대신 동반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욕구는 부정해야 할까요.

     

불평등은 인류 역사의 발전에서, 문명화, 근대화, 산업화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해버리는 것과,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그래도 필요하다는 당위가 꼭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도의 문제라 생각하고, 제도를 바꾸면 될 거라 믿는데, 법과 제도 자체가 기득권자들의 악랄하고 교묘한 술수라고 하면 이게 또 어떻게 해야하는지 방향에서 헤매게 됩니다. 행정관이라는 지배체제의 근원적 문제까지 지적당하면, 방법론에서도 길을 잃어버리는 기분이 듭니다.

     

공부가 부족한 이가 어설프게 루소를 접하니, 이렇듯 혼란만 더합니다. 일단 So what? 불평등 기원을 탐색했는데, 어쩌라는 거냐의 한 축이 있었고요. 불평등을 해소할 법 제도에 대한 루소의 불신도 인상적입니다. 


"국가 기관의 모든 활동이 궁극적으로 공동의
 행복을 지향하도록 하기 위해, 주권자(souverain)와 국민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는 나라에 태어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국민과 주권자가 동일한 인간이 아닌 이상 있을 수 없으므로.."(16쪽) 

일단 지배받는데 익숙해진 국민은 이미 지배자 없이 지낼 수 없게 되지요.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들은 자유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는 참된 자유와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므로,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의 족쇄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지요. (17쪽)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에서는 루소의 말대로 국민과 주권자가 일치되는데, 이 체제가 그러면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해답일까요? 왕정 시대의 루소는 그런 제도가 불가능하다는 냉소를 털어놓을 만 하지만,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게 그게 전부가 아니란걸 압니다. 마침 아마티아 센의 '발전으로서의 자유'를 함께 읽은 우리는, 루소의 평등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서의 개념과 연결되는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눴습니다만. 루소 당대의 고민이 지금도 유효하려면, 어느 지점에서 봐야 할까요. 법은 약자들의 마지막 보루가 아니라, 불평등을 지키고자 하는 권력자들의 교활한 책동이라는 주장이 당대에 충격적이긴 했을 것 같습니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버리는가 하면,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 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킨 것 (116쪽)


루소는 디종 아카데미 논문 공모전에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냈다가 떨어졌고, 1755년에 이를 책으로 출간합니다. 1762년에는 '사회계약론'을 내죠. 홉스와 달리, 국가가 없어도 사회가 만들어지긴 하는데.. 대체 좋은 국가로 가려면 뭐가 필요하지? 라는 것이 사회계약론의 논점이라고.. 저는 읽지 않았으나, 함께 읽은 분들의 설명입니다. 좋은 사회는 좋은 시민이 있느냐 없느냐, 건강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가 있을테고, 그에 앞서서, 인간 사회의 본질을 탐구한게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란 거죠. (디종 아카데미는 대체 뭐하는 곳이냐, 부유한 정치인의 사적 기관? 혹은 공적 역할? 이것도 재미난 주제인데.. 잘 모르니 패쓰..) 

18세기 루소의 주장이 당대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볼테르는 매우 싫어했다면서요..) 정식 교육 없이, 정처 없이 떠난 방랑의 길에서 '삶의 구원' 같은 바랑 부인을 만나 철학과 문학에 소양을 갖추게 됐다는데, 그 바랑 부인이라는 분이 더 궁금하기도 합니다. 불평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진 것은 감사. 다만 태생적 불평등과 제도가 만들어낸 불평등이 있다면, 후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할테고, 굳이 불평등을 넓게 볼게 아니라, 좁게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것도 다 심오한 뜻이 있을텐데, 철학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제가, 달랑 이 책 한 권 읽고 뭘 알겠습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궁시렁대는 리뷰나 쓰고 있고.. 그나마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으니, 전문가의 정리까지 귀동냥할 수 있었으니, 일단 기록으로는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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