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흥미진진할 수 없는 논픽션 역사드라마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던 1945년 8월15일 경성에서는 조선변호사시험의 필기시험이 진행 중이었다. 14일 민법, 형법시험을 마치고 15일 오전 상법시험까지 마친 수험생들은 오후로 예정된 경제학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시험지를 나눠주고 시험을 감독해야 할 일본인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6일 형사소송법과 국제사법, 17일 민사소송법과 헌법시험도 자동으로 중단되었다.” (556~557쪽)
해방의 기쁨이고 뭐고, 누군가에게는 날벼락. 변호사시험을 주관할 국가는 사라지고, 새 국가는 기약 없고. 해방보다 합격에 난리친 끝에 결국 합격증을 받아낸 이가 106명.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판검사가 된 사람들?. 법원검찰 통역, 서기들이 판검사가 되기도 했다고요? 40년 8월 기준 창씨개명 비율이 80%에 달하던 일제 말기와 해방 전후 이 땅의 속사정은 상당히 미묘합니다. 일제 시대 판검사에겐 충성심도 필수. 과연 그 시대에 훌륭한 판검사란? 당시의 사건들은 한국사회의 현재를 구성하는 기반입니다. 이 역사는 현재 우리가 마주한 문제의 깊은 뿌리를 드러냅니다.
"거칠게 평가하자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킨 사람들은 예상한 것 이상의 불행을 맛보았고, 끝까지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한 사람들은 기대한 것 이상의 영광을 누렸다." (38쪽)
대중에게 가장 친절한 법학자로서, #헌법의 풍경 #불멸의신성가족 #불편해도괜찮아 등 명저 여럿 내신 경북대 로스쿨 김두식 교수가 작심하고 3년간 정리한 ‘법률가들’. 해방전후 법률가들의 삶을 통해 시대를 탐구했습니다. 623쪽 두껍고 어려운 책? 2019년 1월 책을 펼쳤다가 솔직히 넘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3분의 1쯤 보다가 바빠서 덮었더니 다시 펼치기 만만찮은 책. 이번에 #트레바리 #기막힌논픽션 클럽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현대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저를 발견했고, 현재진행형 문제들의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근본적으로 재력이 없으면 학력도 얻을 수 없던 시대.. 독립운동가, 친일파, 민주, 반민주 가문이 따로 존재하는게 아니다. 공부를 시킬 수 잇는 가문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력이 있는 집안이면 이 다양한 세력들이 공존.. 학문을 최고로 여긴 전통 때문이었을까. 유서 깊은 독립운동가 가문이 일제 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자손에게 의외로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도 흥미롭다.”(62쪽)
일제시대 고등시험 사법과를 통과했든, 조선변호사시험을 보든, 잘 풀리는 이들은 대체로 일본 유학파. 생활비와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부호의 자제들. 폭탄테러 등 항일운동은 의열단이 활동했던 1920년대 얘기일뿐, 1930년대 경성은 비교적 평온했다고, 이날 클럽 스페셜게스트로 모신 김두식쌤이 말했습니다. 먹고사는 방편이기도 했겠지만, 과거급제 마냥 출세를 택하는 이들이 꽤 됐습니다. 책 쓰면서, 창씨개명한 이들이 해방후 한글 이름으로 재임용되어 같은 인물인지 확인하는데 애먹었다고요. 자료마다 틀린 이름을 모두 대조하고, 본적지를 추적해 일치하는지, 크로스체크를 통해 사람을 찾을 때 마다 기뻤다고요. 1000명을 엑셀로 정리했다는데, 책에 사람 이름이 너무 많이 나오는게 비전공자에게 장애가 되지만, 이름 휙휙 넘기고 주요 인물 몇 명만 챙기면서 읽어나가면 '빅 픽쳐'를 보는 느낌. 그리고 이런 재미가 있어요. 다 누구의 아버지이고, 친지입니다. 바닥이 좁아요. 그 시절 잘난 금수저들의 자식이 대를 이어 잘나갔어요.
“..조평재가 평양에서 판사로 일하면서 챙긴 조카가 조순 전 경제부총리. 니혼여대를 나온 신여성이자 울산 갑부집 딸 강금복이 남편 이충영 판사의 납북 뒤 어렵게 키운 자녀가 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수인 전 의원. 이충영과 평양에서 함께 근무했고 평양의 허브였던 김갑수는 훗날 진보당 사건 주심 대법관으로 조봉암에게 사형선고.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부친) 홍진기는 법무부장관으로 조봉암 사형 집행. 경제연구회에서 언급된 고형곤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고건 전 총리 아버지. 인연은 좁은 바닥에서 이렇게 돌고 돈다.” (85쪽)
뒤에 다시 설명할, ’법조프락치’ 사건은 법학자동맹을 기점으로 법조계에 침투한 남로당의 공작을 파헤치는데, 법학자동맹 위원장이 원래 조순의 작은아버지인 조평재. 1차 법조프락치 사건 검사이던 선우종원은 선우중호 전 서울대 총장의 부친. 전임 서울대 총장이던 이수성의 부친 이충영에 대해 선우종원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옹호하기도 했죠. 해방직후 일본인 판검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미군정은 영어를 잘하거나, 서기 출신을 임용했는데 대표적 서기 출신 판사가 이홍규. 이회창 전 총리의 아버지입니다. 1950년 법조프락치로 몰려 구속됐으나, 최종 기소된 죄목은 독직상해와 범인은닉에 머물렀네요. 정말 가계도를 그려도 대단할듯요. 독학으로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평양고보 출신 최태원이 소설가 최인호의 아버지라든지, 당대의 금광왕으로 현재 시세 수백억대 농지를 매입해 자작농을 보호하고 대동공전(현 김책공대)을 설립한, 끝내 망하긴 했지만 ‘대동콘체른’의 이상주의자 이종만의 외증손자가 영화배우 강동원. 검사들의 기밀비 사건을 수사한 미군정청 경무부 최능진 수사국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으로 정수장학회 관리했던 최필립의 부친. 개정판엔 인물 소개와 연결망 그림이 나온다면 좋겠어요.
아, 서기 출신? 놀랄 일도 아닙니다. 1945~58년 임용된 판사 517명, 검사 420명 중 서기 출신은 판사 178명, 검사 145명으로 34.5%. 검찰은 46년 12월 기준 49%에 달했다고 합니다.
“1946년의 봄은 백가쟁명의 시대. 좌우익 대립에 따른 막연한 불안감이 없지 않았지만 새로운 국가를 향한 희망에 들떠있었다. 그러나 1960년에 그랬고, 1980년에 그랬듯이, 1946년의 봄은 길지 않았다.” (299쪽)
진정 대단한 시대. 비리 의혹에 연루된 김용무 대법원장이 자신을 증인으로 소환하려는 판사에 대해 1946년 2월 인사조치를 시도했답니다. 법관 80%의 불신임에 부딪쳐 대법원장도 물러났지만, 용감했던 판사들도 좌천되고 해임됐습니다.
1946년 5월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좌우익 사이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1948년까지 합법이던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 얽혀 많은 희생자가 나오죠. 저는 처음 듣는 사건인데, 이건 영화네요. 돈을 워낙 많이 찍어내던 시기라 민간 인쇄소를 사용했고, 거기서 ‘징크판’이라는 돈찍는 판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1층에 인쇄소가 있던 그 건물 2층에 조선공산당본부, 3층에는 좌익언론 해방일보사가 있었다는게 문제. 싹 다 잡혀갔습니다. 재판 당일 법원 앞에는 수천 명이 몰려들어 반발한 가운데, 중학생이 총에 맞아 숨지기도 했고요. 변호인들은 피고인들이 60일간 집단구타, 물고문 등으로 자백을 강요당했다고, ‘조작된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 재판을 꼼꼼하게 복원한 저자는 오히려 매우 신중하지만, 독자의 눈에도 요상한 지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 사건 김홍섭 검사는 “어느 한사람의 죄가 아니라 운영의 소치요 공산당 자체가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 장난을 잘못 감독한 것이라고 본다"며 논고를 남겼네요. (324쪽) 이 사건에 당대의 법률가들이 검사와 변호사로 맞붙었고, 재판장인 양원일 판사는 변론을 거의 무시한 것 같습니다.
와중에 저자는 "양원일 판사의 삶은 길지 않았다”고 정리합니다. 그는 49년 대법관 집에 초대받아 만취상태로 나오다가 초병 불심검문에 “이 자식, 사람을 몰라보나”하다가, “공산당을 잡던 판사가 신변 보호를 위해 권총을 가지고 다니다가 공산당을 잡겠다는 초병과 시비가 붙어 초병의 총에 쓰러진 허무한 죽음"을 맞습니다. 그 시절은 대체.
이 무렵, 국회에서는 좌우가 각각 반민족행위처벌법, 국가보안법(내란행위특별처벌법) 제정을 추진하며 맞붙었고, “포악무도한 일제 침략주의의 흉검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과 똑같은 비민주적 제국주의의 잔재의 하나. 헌법정신을 몰각하고 인민을 극도로 속박하는 법률”이라는 국보법이 1948년 12월 통과됩니다. 우익은 ‘국회 프락치’ 사건, '법조 프락치’ 사건도 밀어붙여 의원과 법률가들을 줄줄이 구속했습니다. 미군 철수가 아니라 소련군 포함 외군 철수를 주장한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국회 프락치' 사건에 휘말리고, 1949년 서울지검 김영재 차장검사, 즉 넘버2가 체포되는 등 이 사건들도 장난 아닙니다. “1차와 2차로 확대된 일련의 법조프락치 사건들은 검찰의 떠들썩한 발표와 달리 1심 법원에 의해 대부분 집행유예 또는 무죄판결로 일단락되었다”지만, 양측 모두 불복하여 상소한 상태에서 한국전쟁이 시작됩니다. ‘격동의 세월’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네요. “‘관제 빨갱이’로 몰린 사람과 ‘관제 빨갱이’를 만든 사람이 같은 처지로 전락해 함께 목숨을 잃었다”는 시절. 정권 실세들만 미리 피난하고, 나머지들은 남아있다가 부역자가 되거나, 납북되거나. 전향했다가 총살되거나, 이후 숙청되거나.
‘장군의 아들’ 김두한을 미화한 영화와 드라마에 분노합니다. 정부가 제공한 총과 수류탄으로 노조원 2000명을 붙잡고, 간부 8명 생매장을 지시하는 장면들. “나는 깡패두목이 아니다. 파업과 폭동을 일삼고 미군정에 반대하는 공산 파괴분자들을 쳐부쉈을뿐”이라고 오히려 큰소리치고, 무소불위 권력을 누리고 국회의원이 된 인간. 하기야 그 조직의 수장인 유진산은 결국 7선 의원. 영화에도 나오는 친일검찰 노덕술이 고문하다 사람 죽으면 시체를 빼돌려 한강에 버리던, 이해불가한 시대입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4.3 진압을 위해 출동을 준비중이던 국군 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나, 여수와 순천을 장악하고 경찰 등 우익인사 수백 명을 살해..이 반란이 10월27일 진압되면서 군경의 학살로 수천명이 목숨을 잃고.. 공식 재판을 통해 민간인 662명, 군인 313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해 이중 최소 134명, 78명에게 실제 사형을 집행했답니다. 좌익을 석방시킨 판사는 그냥 죽여도 그만이라는 시대. 박찬길이라는 검사를 즉결처분한 최천은 처벌 받지 않고 3, 4, 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고 합니다. 여순반란사건 이후 숙군(?) 과정에서 최소 장교 326명, 사병 1170명 등 1496명이 숙청됐고요.
한국전쟁이 터지자, 좌익수와 강력범으로 분류된 이들은 헌병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대전형무소에서만 최소한 1800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다고요. 1951년 2월 산청,함양,거창에서 국군 11사단의 대규모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해 파문이 일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기화로 조병옥 내무부장관, 김준연 법무부장관 해임하고 민국당 계열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축출했다고 합니다.
옳고 그른 문제도 아니고, 좌익과 우익의 문제만도 아니고, 세력과 세력이 붙어서 온갖 일을 엮어 반대파를 쳐냅니다.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안녕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를 잡는게 최우선 목표가 되면서 고문과 조작이 비일비재하고, 근거없는 의혹으로 사람 목숨을 날리고. 사실 1987년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최소한 물고문, 전기고문이 사라진 계기가 됐을 뿐, 사람 패는 고문은 그 이후도 오랫동안 이어진듯요. 판검사에 상납한 떡값도 일상, 유착이 기본이던 시절에서, 일부 (극)소수의 행위로 여겨지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1982년 유태흥 대법원장은 지체장애 지원자 4명을 법관 임용에서 탈락시키면서 “신체가 비정상인 사람보다는 정상인 사람을 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발언해 거센 사회적 반발에 부딪쳤다죠. 이듬해 이들을 판사로 임명했다는데, '상식'을 바꿔온 세월이네요.
유태흥 대법원장의 이런 발언도 박제되어 오늘날 전해집니다. “분단국의 현실에 비추어 사법부의 수장은 정치적, 공안적 사건에서는 정부에 협력해야 하고, 일반 사건에서는 양심적으로 소신껏 독립해 심판해야 한다.” (553쪽)
'선출되지 않은 권력' 사법부, 그리고 행정부 내 외청인 검찰의 힘은 2020년대를 앞둔 시점에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들을 보면, 우리가 많이 진보한 것은 팩트. 그러나, 정부와 결탁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수장은 정치적, 공안적 사건에 정부에 협력해야 한다'는 5공화국의 전임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경찰청장' 마냥, '검찰총장'이 아니라 '검찰청장'이 되어야 할 이는 입법부와 사법부까지 압도하려 듭니다. 사실 모든 일을 검찰 고발로 해결하려던 우리 사회 수준 덕분이죠. 정치는 정치적 행위 대신 고발을, 지식사회는 공론 대신 고발을 택해 검찰을 키웠죠.
강중인의 지적대로 “일단 사건에 착수한 이상 어떤 무리를 하여서라도 사건을 성립시켜야만 경찰 또는 검찰의 체면이 선다는 일제시대 관료근성을 버리지 못했다"(61쪽)는 검찰. '경찰의 고문과 조작, 검찰의 동조, 법원의 묵인'을 거쳐 사건은 늘 커졌고, 누군가를 처단함으로써, 혹은 그 사이에 누군가는 실리를 챙겼죠.
"과연 그 시대에 훌륭한 판검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눈앞의 고문과 학살을 몰랐을까? 피고인들은 목숨을 걸고 고문당한 사실을 알렸다. 판검사가 눈만 크게 뜨면 어디에나 진실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공소제기와 유죄판결이 이어졌다." (606쪽)
저 질문은 과거의 유물인가요? '안녕질서'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개인의 기본권은 안중에도 없던 과거? 약자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라 믿는 법을 갖고 법률가들은 무엇을 해왔는지 생각합니다.
혼란기, 법조인 수요는 많고 공급은 부족한 상태. 마지막까지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에게 주도권을 넘기고, 단기간에 젊은 법률가들을 교육시킨 북한 방식과 달리 미군정은 친일 법조인을 수용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이념을 무기로 썼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 있던 법률가들은 월남 후에도 불이익을 감수했습니다.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사다리를 걷어찼기 때문이죠. 비교적 최근 사법고시 대신 로스쿨 제도를 도입할 때도 난리였지만, 법률가들은 시험 제도를 바꿀 때 마다 반발했군요. 사실 문을 넓히지 않고 카르텔을 유지하는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때 ‘정통 고시’ 출신들은 ‘서울변호사회가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들에게 좌우되면서 변호사들의 질적 저하가 초래되고 있다”며 서울제일변호사회를 창립하기도 합니다. '잘난 법률가들'은 자기 밥그릇 챙기고, 업을 대물림하고, 혼맥을 다지고, 세상을 주무르는 힘에 취했습니다.
1961년 7월 법무부 검찰국장에 임명된 위청룡. 1962년 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이후락 공보실장은 위청룡이 북한괴뢰의 간첩으로 암약타가 검거되자 자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61년 12월24일 사망한뒤 보름 지나 알려진거죠. 사망후 44년이 지난 2005년. 박이건이라는 83세 노신사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밝힙니다. 위청룡이 당시 창설된 중앙정보부의 수사권 지휘에 승복하지 않다가 남파간첩으로 몰려 심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고요. 진실이 왜곡되지 않으려면, 수사권 기소권 분리해서 견제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검경 수사권 조정만큼은 2020년을 앞두고 반드시 이뤄내야 합니다.
위청룡 전 검찰국장이 44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듯, 이 책이 출간된뒤, 등장인물 가족들 몇 분이 김두식쌤에게 연결됐던 모양입니다. 묻혀지거나, 묻어버린 진실의 조각들이 다시 이어질까요. 김두식쌤 어릴 적 반공영웅으로 '사상검사의 수기', '추격자의 증언'을 썼던 오제도 검사 역시 '법률가들'을 통해 또다른 진실을 드러냅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공소장과 판결문 외에 한국전쟁 중 기록이 모두 사라진 가운데 주미대사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본국에 보고한 기록이 단서로 남았습니다.
21세기의 판검사들 역시, 언젠가 김두식쌤 같은 분이 이렇게 다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로 경계심을 갖게 된다면 조금 다를까요. 저 엘리트들에게 부귀영화보다 명예가 중요하다면, 이런 기록을 두려워했으면 합니다.
우리 클럽의 93년생 L님은 그 많은 후손들 중 이회창 이름만 얼핏 들어봤을 뿐, 조순, 이수성, 누구도 모른다고요. 지나간 역사는 잊혀지기 쉬워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시대가 바뀌어도 당대의 질문들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면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발전'을 모색해야 합니다. 당대의 풍경들을 해석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법률가들은 판결문과 공소장, 합격자 명부가 비교적 잘 남아 있어서, 오랜 세월에도 공적 삶이 복원됩니다. 다른 영역은 어떠할지, 싸이월드도 날라가는 마당에 이런 브런치 글은 언제까지 남을지. 3년을 쏟아부어 '법률가들'을 정리해준 김두식쌤에게 존경과 감사를 최소한 이렇게 기록합니다.
몇 년 전 사진이지만!
<정리를 위한 날 것의 메모들>
54년 정비석의 ‘자유부인’.. “귀하는 지금 도하 일류신문의 연재소설에서 갖은 재롱을 다 부려가면서 대학교수를 양공주 앞에 굴복시키고 대학교수 부인을 대학생의 희생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 기고문. (151). 양공주 앞에 굴복? 철없는 청소년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더구나 근거 없이 대학의 위신과 그 대학에 의하여 건설될 민족문화의 위신을 모욕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용서할 수 없는 죄악. (이런 엘리트의식이라니) 박정희 정권하 법무부장관, 문교부장관. “작품에도 모럴이 있듯 평론에도 모럴이 있어야”
개천용 이덕우 변호사. 미군정이 전남 경찰부장으로 임녕한 친일경찰 노주봉이 암살되는 사건. 도인민위원회와 청년단체 무력화 위해 이덕우 구속. 광주학생사건으로 5년 만에 자유의 몸. 조선이 해방된 오늘 다시 유치장… (159)
“이걱우 변호사는 좌익도 공산주의자도 빨갱이도 아니었다.. 4.3사건 관련자 변호를 도맡다시피..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좌익용공 혐의. 보도연맹에 강제로 밀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고.. (161)
기록의 힘 ‘법관 김홍섭 자료집 : 사법의 혼, 진리의 구도자ㅆ던 ’ 오제도 검사의 ‘사상검사의 수기’, ‘추격자의 증언’. 1970년대 어벤저스 수준의 히어로. 반공영웅 오제도…
이화여전 김영희 교수. 예일대 철학박사. 법무국장 우돌 소령도 예일대 출신. 법무국장 보좌관에 임명. 조선인으로서 사법분야 최고위직. 법학 전공보다 말이 통하는지가 훨씬 중요했다. (182)
일본인 판검사를 잘라내고 조선인 임용하는 작업. 일본인명으로는 면직사령, 조선인명으로 다시 임명사령. 나가야마는 퇴임하고 장경근. 이와모트는 퇴임하고 민씨로 신임판사.. 10월11일자 조선인 판사 38명, 검사 25명. 한국법조계 전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치… 수많은 난관. 친일판검사 처리, 법률가의 절대적 부족, 틀정정파의 주도권 장악, 통역권력의 등장, 북한에서 내려오는 법률가들의 처리..
때묻지 않은 사람들 기용하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에게주도권을 넘기고, 단기간에 젊은 법률가들을 교육시키도록 하면 된다. 실제로 북한이 이런 방법을 취했다.
미군정은 11.14 두번째 판검사 임명때 김영희 전규홍, 박영균에게 변호사 자격 부여. 사법분야 통역관의 권력을 사후 정당화. 기존 법조인들은 반발..북한지역에 있던 법률가들은 월남 후에도 불이익.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사다리를 걷어찼기 때문.
지식인이란.
9.16 출범한 한민당은 대체로 다섯분파 민족주의 세력의 결합.. 실질적 주도한 건 송진우. (193)
해외유학 경험,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보수주의적 성향은 미군정 당국이 찾고 있던 기본조건. 친일파 청산은 중요한 쟁점이 아니었다. 미군에 협력하면서 초창기 주도권을 장악한 한민당 세력은 적지 않은 구성원이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통 고시’ 출신들은 ‘서울변호사회가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들에게 좌우되면서 변호사들의 질적 저하가 초래되고 있다”며 서울제일변호사회 창립. ‘해방공간에서 좌우로 나누어 다투던 사람들이 ‘정통 고시’ 출신의 자부심을 지키겠다고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 흥미롭다. 257
김병로 김용무 이인 해방직후 법조계 지도자들은 우파 성향이 강한 민족주의자. 일제시대에 지속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변론한 경력 덕분에 도덕적으로도 거리낌이 없었다.. 다만 이들 아래에서 공산당과 싸운 실무자들 중에서는 압도적으로 친일경력자가 많았다.. 거기에서 적지 않은 무리수가 나왔다..(287)
허헌은 45년 9월14일 조선인민공화국의 국무총리를 맡아.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무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사법부장 김병로.. 당사자 허락 받지 못한 급조내각. 인공을 주도한것은 건준의 여운형, 공산당의 박헌영, 그리고 허헌이었다. (288)
쟁쟁한 공산주의자, 정백은 49년 서울로 잠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전향했고,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을 지내다가 한국전쟁 중 북한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허성택은 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다음 49년 북한 노동상에 임명되었고, 59년 종파주의자로 숙청되었다. (293)
검사국 기밀비 사건. 플리바게닝? 이종민은 58만원을 기부. 검사국은 그중 20만원으로 수사용 차량 한대 구입. 남은돈 38만원을 이른바 ‘기밀비’로 쓰기로. 미군정청 경무부 최능진 수사국장. 나중에 이승만에 맞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최능진.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으로 정수장학회 관리했던 최필리브이 아버지 (330)
48년 10월19일 제주4.3 진압 위해 추동 준비중이던 여수 국군 14연대에서 반란. 여수 순천에서 경찰 등 우익인사 수백명 살해. 10월27일 진압됐고, 군경의 학살로 민간인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공식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만 민간인 662명, 군인 314명. 이중 최소한 민간인 134명, 군인 78명에 대해 실제 사형 집행. (373) 박찬길 검사 즉결처분으로 처형한 최천은 처벌 받지 않고 3, 4, 5대 국회의원. 좌익을 석방시키는 판검사는 그냥 죽여도 그만이라는 식의 논리. 여순반란사건 이후 숙군 과정에서 최소 장교 326명, 사병 1170명 등 1496명이 숙청되었다.
“포악무도한 일제 침략주의의 흉검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과 똑같은 비민주적 제국주의의 잔재의 하나. 헌법정신을 몰각하고 인민을 극도로 속박하는 법률” .. 국보법은 48년 12월1일 통과됐고, 당장 그날부터 대규모 구속이 시작되었다. (380)
미군 철수가 아니라 소련군 포함 외군 철수를 주장한 소장파 국회의원들… ‘국회 프락치’ 사건. 남로당의 지령 여부가 핵심쟁점인데 재판장은 외군철수 주장 자체만 문제 삼았다. 지령은 정재한 여인의 국부에서 발견됐다는 암호문서와 고문에 의한 상호자백 빼고는 분명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 (한국전쟁 중 기록이 모두 사라져 공소장과 판결문 정도. 주미대사관 그레고리 헨더슨의 기록.. (390)
대표적 전향자였던 김약수와 조봉암이 대한민국에서 맛본 참담한 몰락은 우리 사회 전체로 보아서도 안타까다. (393)
전쟁 발발 당시 .. 좌익수와 강력범으로 분류된 이들은 헌병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 대전형무소에서만 최소한 1800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다.
월남한 위청룡. 61년 7월 법무부 검찰국장에 임명. 62년 1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이후락 공보실장은 전 법무부 검찰국장이 위청룡이 북한괴뢰의 간첩으로 암약타가 검거되자 자살했다고 발표. 사망날짜는 61년 12.24. 사망후 44년이 지난 2005년. 박이건이라는 83세 노신사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위청룡이 당시 창설된 중앙정보부의 수사권 지휘에 승복하지 않다가 남파간첩으로 몰려 심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고.. 명예회복
“분단국의 현실에 비추어 사법부의 수장은 정치적, 공안적 사건에서는 정부에 협력해야 하고, 일반 사건에서는 양심적으로 소신껏 독립해 심판해야 한다.” 553- 5공화국 대법원장 유태흥.
82년 지체장애 지원자 4명을 법관 임용에서 탈락시킨.. 유태흥 “신체가 비정상인 사람보다는 정상인 사람을 택하는 것이 합당” 결국 입장 선회. 이듬해 판사로 임명.
‘법에 사는 사람들’은 거대한 폭력의 물결 속에서 주인공이 한두번이라도 용기를 보여준 빛나는 순간에 렌즈를 들이댔다. 덕분에 빛만 있고 그림자는 없는 법률가상이 만들어졌다. 605 과연 그 시대에 훌륭한 판검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가? 눈앞의 고문과 학살을 몰랏을까? 피고인들은 목숨을 걸고 고문당한 사실을 알렸다. 판검사가 눈만 크게 뜨면 어디에나 진실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공소제기와 유죄판결이 이어졌다. (606).
강중인의 지적대로 “일단 사건에 착수한 이상 어떤 무리를 하여서라도 사건을 성립시켜야만 경찰 또는 검찰의 체면이 선다는 일제시대 관료근성을 버리지 못했다.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