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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May 05. 2020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피해자 두 번 죽이지마


믿을 수 없는 화제작

"
넷플릭스 신작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보는 중인데, 1화부터 명작의 느낌이.. 강간 피해자가 초동 수사시부터, 피해로 혼란한 가운데 피해진술을 세 번이나 했다(경찰 2회/병원 1회). 아직 본격수사 들어가기도 전인데. 그 후 병원으로 옮겨져 각종 검사를 받는데, 피해자로서 보호받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 2019. 9.14. 류영재님 페북글 
"Unbelievable이라는 제목처럼 정말 믿기지 않는 스토리다. 지난 몇년간 본 넷플릭스 작품중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19. 10. 5. 임정욱님 페북글 

"올해의 미드: 믿을 수 없는 이야기 (넷플릭스) - 넷플릭스가 올해 만든 오리지널 시리즈 중에서 더 크라운 3을 아슬아슬하게 제치고 최고작으로 꼽았다."2019.12.22 박소령님 페북글 


2019년 가을 페친들이 넷플릭스 드라마에 대한 코멘트를 차례로 올리기 시작했어요. 강간당한 소녀가 경찰에 신고했으나 오히려 거짓 신고로 의심받고 고통받는 이야기. 반전은 유사한 사건을 추적하던 형사들이 만들어냅니다. 각자 다른 지역 경찰서에서 근부했지만 마침 둘 다 여성.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피해자를 우선하며 수사합니다. 강간이란게 영화나 드라마의 드문 소재가 아닌데 대체 이 작품은 왜 다를까요? 대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한 상황에 마침 원작 책을 알게됐습니다. 신뢰하는 편집자 반비의 김희진님으로부터 선물받았습니다. 
저부터 몹시 궁금했습니다. 조금 들춰본 뒤, 곧바로 #트레바리 #기막힌논픽션 클럽 2020년 1월 책으로 골랐습니다.

살인보다 위험한 범죄

"강간범 중 4분의 1에서 3분의 2는 여러 건의 성폭행을 저지른다. 살인자는 단 1%만이 연쇄살인범으로 추정된다." (148쪽)


2019년 12월 메디치포럼을 위해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경기대 교수님을 만났을 때, 가장 위험한 범죄는 살인이 아니라 성폭력일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살인은 재범 가능성이 낮은 반면 성폭력은, 특히 아동 대상 성폭력은 재범 우려가 높다는 겁니다. (우리가 범인검거율 1위에, CCTV 덕에 이제 연쇄살인은 어려운 나라인걸 이때 들었습니다. 반면 전자발찌를 차고도 한해 100건 이상 성폭행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성폭력은 수사 잘한다고 인정받는 범죄가 아닙니다. 검찰도 특수부가 형사부보다 잘나가고, 형사부 중에서도 여성 청소년이 피해자인 경우는 뒷전입니다. 오히려 가장 보호해야 할 대상인데 말이죠. 미국에서도 그랬나봐요. 

"많은 형사들이 성범죄 사건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 한다. 강간 사건은 살인 사건처럼 세간의 이목을 끄는 강력범죄가 아니다..살인 사건이 흑과 백이라면 강간 사건은 온통 회색지대일 뿐이다. 또한 강간 피해자는 살아남아 계속 상처받고 있다. 그들의 고통은 바로 눈앞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그들의 고통에서 절대, 절대로 눈을 돌릴 수 없다." (38쪽)


오래된 편견은 지독했다
 
여성이 지조 없는 연인에 대한 복수의 수단으로 혹은 경쟁자에게 실망을 안기기 위한 수단으로 강간을 이용하려는 유혹이 있기 때문”에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지나친 처벌에 반대한다는 이 문장은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자였던 토마스 제퍼슨이 이후 권리장전을 작성하게 될 제임스 매디슨에게 1786년에 쓴 편지랍니다. (316쪽)

여성들에게는 다양한 정신적 콤플렉스가 있는데 일부는 유전적인 결함에 의해, 일부는 정신 착란과 비정상적인 본능에, 일부는 안 좋은 사회적 환경에 일부는 일시적인 심리적 혹은 감정적 조건에 기인한다. 이 콤플렉스가 발현된 형태 중에 하나가 남성에게 성적인 폭력을 당했다는 거짓 주장이다. 음란한 정신은 서술자가 여주인공이거나 피해자가 되는 상상의 성적 사건 이야기 속에서 우연적이지만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319쪽)

정말 믿기지 않는 얘기가 곳곳에서 등장하는군요. 증거법 분야의 20세기 대표적 전문가라는 존 헨리 위그모어. 하버드로 리뷰 창간을 도왔고 28년간 노스웨스턴대 로스쿨 학장을 지냈다는데 1940년에 냈다는 주장이 끝내줍니다. 전부 여자의 상상이란 겁니다. 


1999년 국제경찰서장연합 문건 내용까지도 끔찍한 수준입니다. 대체로 부상, 베인 상처, 멍, 찰과상 등이 남아 있다. 의복은 강제로 벗겨졌다는 증거로서 보통 뜯어지거나 찢어져 있다.. 이런 징후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거나 거의 없다면 강간 기소의 타당성과 관련하여 합리적 의심을 제기할 수 있다. 엄청 다치고, 옷이 찟기지 않는한 강간범을 기소할 수 없다는 얘기죠. 세상 참 더디게 바뀐다 싶습니다. 그러나 바뀌긴 바뀝니다. 2005년 문건에는 "성폭력이라는 트라우마에 대한 피해자의 반응이 신뢰도를 판단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대목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뒤에 나오지만 중요한 지점입니다. (118쪽)


그렇다고, 일선의 경찰들이 바로 바뀌는 건 아닙니다. 이 책의 주인공 마리의 사건은 2010년에 벌어진 일입니다. 

너 강간당한게 맞니? 

주인공 마리는 강간당했습니다. 그런데 신고 후 진술 때 마다 말이 조금씩 바뀌었어요. 그러자 관심받고자 지어낸 이야기라고 의심하는 주변인들이 등장합니다. 마리는 위탁가정을 전전하고 일곱 살 때 강간당했던 '불우 청소년'이었죠. 뉴스는 '양치기 소년'으로 그를 몰아갔습니다. 온라인에서 난도질당했고, 심지어 허위신고를 이유로 기소되어 벌금형을 받습니다. 강간당하고 경찰에 도움을 청했을 뿐인데, 인생이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는 왜 그랬을까요. 

헨더샷은 트라우마가 남을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후 기억이 왜곡되는 사람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많은 이들이 사건을 시간 순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트라우마는 두뇌에 손상을 입힌다.. 압도적인 공포가 지배하는 몇 초 사이에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이 분출하면서 난폭한 화학적 변화, 곧 연금술을 일으킨다. 우리 정신은 스스로의 경험에 대한 불확실한 목격자가 된다. 기억 속에서의 시간은 실제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일치되지 않는다. (72쪽) 


마리는 실제로 진술할 때 마다 디테일한 부분에서 순서가 틀리곤 했어요. 그런데 강간당하는 상황을 시간 순으로 제대로 완벽하게 복기하지 못한다면 거짓말이라니.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였던 어린 소녀는 2008년 사건 이후 끔직한 상처로 수술받는 와중에 무려 여덟차례나 진술을 반복했어야 했다고 합니다. 국민청원 20만을 넘겼던 단역배우 자매 사건이란게 있습니다. 성폭행 이후 오히려 매도당하던 피해자가 자살했고, 함께 고통받던 동생도 자살한, 처참한 사건입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경찰의 반응과 대응은 아주 끔찍했습니다. 피해자는 한 번도 보호받지 못했어요.. 이 사건이 국민청원으로 다시 문제가 되면서, 경찰은 일선 형사들의 성폭력 수사 대응 매뉴얼을 정비했습니다. 2차 가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가이드가 나왔죠. 물론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그런 노력이 현재진행형입니다. 미국에서도, 마리 역시 당시에는 전혀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마리에게 거짓 증언으로 감옥에 보내버릴 수 있고, 살던 집을 잃을 수 있다고 경찰이 협박한 사실도 나중에 드러납니다.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후에 진실로 밝혀질 성폭력을 당하고도 가짜 주장을 한다는 비난을 받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외상 흔적이 없다는 이유로, 우울증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1997년에도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된 패티라는 여성의 사건이 유명했습니다만, 아마 적지 않은 피해자들이 보호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폭력 범죄와의 전쟁 

그냥 흔하다면 흔한 강간 사건. 범인의 특징을 파악한 형사 한 명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다른 동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드라마에서도 멋지게 나온 두 여성 형사가 만나게 되는 순간이죠. 이들은 각자의 사건이 전부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수사를 확대합니다. 그리고 유사한 패턴의 사건을 더 찾아냈습니다. 이들이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드라마여요. 책으로 봐도 그래요. 

특이하게 끔찍한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범인은 주한미군으로 주둔했던 사람입니다. 한국에서도 몇 차례 시도했는데 실패했어요. 미국으로 돌아간 뒤, '연습'을 더 하고 본격적으로 연쇄 성폭행에 나섰던거죠. 이 자의 나쁜 짓은 그게 끝이 아니어요. 범인은 아동포르노를 비롯해 불법음란물을 유통시켰고, 매 사건마다 피해자에게 포즈를 요구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언제 끔찍한 사진이 유출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리가 결백하다는 것, 허위신고가 아니라 실제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밝혀낸게 그 사진이었습니다. 범인이 전리품처럼 저장해놓은 사진. 경찰 관계자의 멘트도 나옵니다. 수사를 계속하면서 피해자들을 알게 됐던 경찰은 각각 수백 장씩 찍힌 겁에 질린 표정들의 사진을 봅니다. 아는 사람의 지옥같은 시간을 증명하는 사진. 보는 이에게도, 아무리 수사를 위해서라지만 피해자에게도 끔찍할 그 사진. 


범인 마크 오리어리는 327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검사 측은 최소 294년을 주장했었는데 판사는 더 엄격하게 판단했어요. 327년 형..... 우리는 양형기준을 대대적으로 손봐야 합니다. 

피해자들...

오리어리의 피해자 앰버는 강간 이후 현관에 세 개의 자물쇠를 달았다고 합니다. 창문을 꽁꽁 잠그고 잠듭니다. 좋아했던 방 색깔은 강간을 상기시키는 색깔이 됐습니다. 세라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슬픔에서 회복되려던 참에 강간당했습니다. 도청된다는 공포에다 이웃을 겁내기 시작했답니다. 릴리는 친구들과 만나지 않고, 경호원을 고용했지만 악몽에 시달렸답니다. 67세의 도리스는 샤워할 때도 보안 알람을 켜놓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어떻게 나를 이토록 나약하게 만들어버렸습니까?"라고 강간범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자유와 안전과 신뢰와 평화의 감각을 잃었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끔찍한 사건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범인이 잡히고 나서야 공포를 덜어낼 수 있었다는게 그중 다행일 뿐입니다. 그저 서서히 회복되고 대체로 일상을 되찾기를 바라는 거죠. 주인공 마리가 우여곡절을 겪고 한참 뒤 스테이시 갤브레이스 형사와 통화한 얘기가 나옵니다. 출구가 없는 막다른 길에 놓여있던 마리는 갤브레이스 형사가 해준게 어떤 의미인지 전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요. 


피해자 우선주의 

2019년 12월 #힘의역전 포럼을 앞두고 '피해자 우선주의'를 외치며 분노하는 이수정 교수님을 두 차례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아동유인방지법을 통해 제한적 함정수사 허용, 의제강간 연령의 상향 조정 등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스토킹방지법을 통해 예비적 행위를 제재하고요.

이후 우리는 n번방 폭풍을 거치고서야 2020년 4월 미성년자 의제 강간 연령 기준을 만 13세에서 만 16세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어른 주제에 중학생과 합의한 관계랍시고 법망을 빠져나가는 일은 이제 불가능합니다. 불법 촬영물의 경우, 갖고만 있어도 처벌이 가능해지고. 직접 찍었어도 타인이 의사에 반해 유포하면 처벌하도록.. 당연히 최초 n번방 법안 통과시 포함됐어야 하는 내용들이 뒤늦게 법제화됐습니다. 성인들의 성매수 대상이 되어 성착취, 성학대를 당하는 10대 아이들을 처벌하는 대신 ‘피해자'로 보호하도록 바꾼 것도 정말 오래 걸렸네요. 어른들이, 신고하면 너도 처벌받는다고 협박하며 아이들을 지옥에 몰아넣지 못하도록... 
이수정 교수님은 '피해자학'을 미국 유학 시절 연구하셨다는데, 미국도 피해자를 보호한게 오래되지 않았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같은 생각이란게 분명합니다. 

훌륭한 논픽션과 기자들


넷플릭스 드라마만 '믿을 수 없는' 충격을 주는게 아닙니다. 꼼꼼하게 취재했고, 디테일하게 재구성했습니다. 한 번 펼치면 손에서 놓기 어려운 종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줄거리를 다 알고 봐도 빠져들만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논픽션은 읽어줘야 합니다. 


책은 두 사람이 썼습니다. 심층보도 전문지 프로퍼블리카의 T.크리스천 밀러와 비영리 저널리즘 기관인 마셜프로젝트의 켄 암스트롱. 둘은 마리 사건을 각자 취재하다가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힘을 합칩니다. 실패로 돌아갔던 수사와 제대로 흘러간 수사를 연결하는 작업이죠. "우리는 강간 피해자가 자주 마주치는 의심의 역사를 따라가보고 싶었고 형사들을 잘못된 수사로 빠지게 하는 편견과 가정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싶었다"고요. 


강간을 소재로 한 이 기사에서 그들은 세심하게 주의했습니다. 그들은 "오리어리가 피해자들에게 준 공포를 전달하기 위하여 되도록 자세히 묘사하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불필요한 세부 사항을 거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피해자 신분이 노출될 수 있는 사항은 생략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취재하고 집필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남자이기 때문에 젠더 문제에 더욱 주의했고, 마지막엔 마리에게 원고 검토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부정확한 부분은 없는지, 혹시 자신의 고통을 불필요하게 과장하진 않았는지 확인해줬다고요. 이런 기준은 우리 기자들에게도 중요한 현안인지라, 기록해둡니다. 

1월 독서모임 책을 뒷북이라도 정리한 것은 여성들을 보호하는 문제가 2020년대를 통과하는데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인터뷰에 응해준 마리를 비롯해 피해자들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독서모임 발제문 덧붙여봅니다.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1.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요

- 마리의 이야기에 어떤 느낌을 받으셨어요?
-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일을 본 적 있나요?

- 2차 가해 와중에 피해자에게 온전한 치유와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 여성은 잠재적 희생자로 머무를 수 밖에 없나요?

- 성범죄에 대한 선제적 대응, 예방적 대응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2. 우리의 인식, 사회 분위기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 쉽게 충조평판하는 분위기에서 페기가 되지 않으려면 어떤 생각을 해야할까요?
- 권력 상실에 대한 근본 없는 두려움에다 '순수하지 않는 피해자'를 나와 구별짓는 안정추구심리. 본능이 이렇다면 어떤 학습이 필요하죠?
- 오히려 무고죄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세요?

- 가해자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과 실상은 어떻게 보세요? 
- 성차별하는 가부장제 문화에서 괴물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필연이라고요?
- 그래도 변하고 있으니 기다려볼 일인지, 변화의 속도가 더딘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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