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알아요. 그 정치인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고, 그 발언이 가치 없다는 것을. 그런데 그가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리면 따옴표로 인용해 베껴 쓴 기사가 포털 많이본뉴스로 걸려요. 대개 선동적이고 자극적이라 클릭하게 되는거죠. 우리 정치부 기자들이 고생해서 취재한 기사는 주목받지 못하는데, 온라인팀에서 바로 베껴낸 기사는 주목받는걸 어찌하면 좋겠어요."
한 정치인의 황당한 발언이 네이버 많이본뉴스 10위권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날. 점심을 함께 하던 모 언론사 정치부장 L님의 하소연이었습니다. 네이버 탓? 자극적 한 마디를 베껴 닮은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사 책임이 적지 않습니다. 기사 너무 쉽게 쓰는거죠. 누가 소셜미디어에 뭐라 했다더라. 전형적 따옴표 기사. 이게 바로 <The Oxygen of Amplification> 의 사례입니다. 시라큐스대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수사학(?)을 가르치는 휘트니 필립스가 50명의 미디어 전문가를 인터뷰한 논문입니다. 다운로드 링크도 있고요. 표지 근사하네요.
우리는 <미디어는 어떻게 허위정보에 속았는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 ‘해외미디어동향’ 특별부록으로 나왔습니다. 박상현님이 번역한 보고서 PDF 다운로드 링크도 있습니다.
이 논문은 2016년 미국 대선을 계기로 나왔습니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미국 정당은 물론, 주류 미디어가 주목하지 않았던 온라인의 쓸데없는 얘기가 언제 이렇게 힘이 세졌고 세상을 바꾼거지? 이른바 '진보 버블(liberal bubble)'에 갖혀 있었다는 자각과 함께 시작된 탐구입니다. 저자는 디지털 세상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소셜미디어는 물론 미국의 디씨인사이드 격인 4chan, reddit 등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맥락을 아는 새로운 세대입니다. 훔볼트대 철학과 졸업한게 2004년이군요. 당연히 트위터도 맹렬히 하시는 분.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대안우파(alt-right)'라는 “편리하게 부정확한” 명칭이 세력화했답니다. “음모론자, 기술-자유 방임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 남성권 운동가, 트롤, 판페미시스트주의자, 반이민운동가들, 그리고 단순한 재미를 찾는 젊은이들까지” 다양한 집단이 사용하면서 커졌어요. 주류 매체들의 보도로 인해 극우 과격주의가 실제보다 더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언론학 교수 미셸 페리어는 백인우월주의자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언론의 보도-특히 특정 사건에 대한 과격주의자들의 견해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그들의 관점을 맥락화하지 못한 채 단순히 전달한 보도-가 폭력적인 목소리를 정당화하고 여성과 유색인종 그룹을 극우주의가 벌이는 장기판의 졸로 대상화해버렸다고 주장합니다. <리베라시옹>의 기욤 젠드롱 기자는 뉴스 미디어가 혐오를 증폭하는데 일조했다고 했습니다. 독일 프리랜서 기자 펠릭스 사이먼은 “많은 언론사들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AfD(독일을 위한 대안) 구성원들이 하는 말도 안 되고 끔찍한 트윗을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보도해줌으로써 그들의 생각이 퍼질 수 있도록 도왔다”고 말했다. (58-59쪽)
저널리즘의 정보 전달 의무, 선한 의지가 일을 망쳤습니다. 반복 보도는 오해의 소지가 있고, 오류가 있는, 조작적 교묘한 메시지가 강화한다고요. 제대로 된 정보인 양 탈바꿈시키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전국적 관심을 끌게 만들어줬습니다. 중립성도 해가 됐습니다. 허위이거나, 조작된, 비인간적이며, 보도할 가치 없는 뉴스에 사실적으로 옳고, 공익에 부합하며 뉴스 가치가 있는 보도를 똑같이 제공했다고요. (등가보도? 이건 원문 다시 봐야..) 이건 공정하고 균형잡힌 보도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염된 정보들이 정확한 정보의 반대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도돼서 허위적이고 조작적 입장을 미디어 생턔계로 스며들어 가게 했답니다. (144~148쪽) 미국에서는 종종 팩트가 한쪽의 이야기로 프레임화됐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세계 어딘들요. 개인적으로 제 석사논문도 이 주제를 언급했고, 지금 정리중인 책에도 들어갑니다. 나치의 주장과 나치를 반대하는 주장을 공정하게 같은 비중으로 보도하는게 맞아요? 트랜스젠더 학생의 여대 입학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면서 논란이나 갈등으로 전하는게 맞아요? 이건 헛소리를 키워주는 거죠..
책은 4chan에서 시작된 온라인 트롤링(괴롭힘의 뜻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정의조차 모호해진) 등을 자세한 사례로 정리하고 있어서 미국 여론 움직임이나 이런 미디어 동향에 관심있는 분에겐 귀한 정보. 대중을 위한 친절한 정리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논문이잖아요. 그러나 도움되는 정리가 많아서 언론인에겐 꼭 권하고 싶네요. 언론인에 대한 온라인 공격에 대한 우려도 정리되어 있는데, 격무에 시달리며 기사 막 생산해대는 프리랜서 기자일수록 공격에 취약하다고요. 또 여성이나 유색인종일수록. 이 문제는 우리도 다르지 않죠..
언론인에게 강추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이런 조언들도 유용합니다. 일부만 발췌한 겁니다.
폭력적 적대행위는 본질적으로 전염성. 자세하게 샅샅이 보도하는 것은 모방을 장려
심각하지 않거나 덜 현실적일라는 식으로 상황을 축소하지 않도록 해야
피해자 신원 노출할 수 있는 불필요한 정보가 포함되는 것을 최소화
특정 온라인 공격과 조직적 시도에 참여한 사람들을 애매한 집단명사로 묘사하지 말고 참여자 숫자를 가능란 정확하게 밝혀야
의미있는 논평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인종주의나 여성혐오 표현을 모아서 리스티클 형태로 보여주는 일을 피해야
피해자의 관점을 우선시해야 라며, 속보를 다룰 경우, 그 폭력이 가진 역사를 잘 이해해야 하고
만약 이야기가 오염된 정보를 갖고 있다면, 프로파간다, 미디어조작을 연구한 전문가들의 말을 단순 인용할게 아니라 상의해야
나쁜 행위자들을 내러티브의 중심에 놓는 프레임을 피해야
그 개개인에 대한 세부사항이 보도할 가치가 있는지 계산해봐야
기사에 그들의 말을 반드시 인용해야 하는지 먼저 생각해봐야
기자등은 이메일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 모든 말, 공개발언, 사적발언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매체를 공격하는데 사용될 수 있음을 알아야
미국 사례 보다보니, 전세계가 비슷한 증세를 겪고 있어서.. 제대로 된 미디어에 대한 갈망이 더욱 깊어집니다.. 온라인의 극단적 주장에 프레임을 빼앗기고 의문의 1패를 당한 주류 언론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부 언론도 이 상황을 이용할 때가 있죠. 우리는 더 나은 미디어를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극단적 정보들, 허위 조작 정보가 활개치지 않도록, 다른 대안이 필요합니다.
PS 1.
저자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저는 흥미로웠어요. 다만 이 부분은 동의하지 않아요. "개별 이야기나 개별 기자들을 지목해서 비평하지 않기로 한 이유는 바로 언론에 보도된 것이 반드시 저널리스트들이 원해서 보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매체 입장을 누가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포함해 특정 이야기가 발행된 사정을 자세히 모르면 정확한 비판을 하기 어렵다."(138쪽) 기자는 자기 이름으로 기사 쓰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생각이 다른데 데스크의 지시라서, 회사 입장이라서,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사정 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내부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주면 비겁한거죠. 사정까지 헤아리는 정확한 비판만 할 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기사에 대한 비판을 작성한 기자에게 해주는게 맞다고 봅니다. 그래야 기자도 데스크에게 저항할 수 있어요.
PS 2.
저자는 50명 인터뷰 하면서 "응답자 56%는 여성. 30%는 비백인, 26%는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밝혀줘서 더 호감을 가졌습니다. 미디어 하는 사람이 '백인 남자'의 시각을 갖지 않으려 노력하듯, 우리도 소수자 감수성을 더 키워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택시에서 불편함을 덜 겪어서 타다가 왜 좋은지 모르는 남자, n번방의 근본적 문제가 뭔지 제대로 이해못한 남자들 관점에서 주로 법을 바꾸거나 기사를 보도하는 문제도 진지하게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