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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Feb 10. 2020

<모스크바의 신사> 매력은 유한계급의 마지막 야망?


책 2차 퇴고를 어찌저찌 넘기고 3차를 시작하기 앞서 온전히 쉰 주말. 백수인데 왜 이 시간이 이리 귀한 건지ㅎㅎ 마음의 여유를 즐기는 제 선택은 #모스크바의신사. 2020년 첫 소설. K쌤이 지난해 7월 중순 일을 막 그만둔 제게 추천해주셨는데 이제야 봤네요. 717쪽 중 거의 700쪽 가까이 어제오늘 몰입했네요.

혁명의 시대에 호텔에 연금된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의 삶을 따라 1920년대 이후 모스크바란 도시, 소비에트의 역사를 슬쩍 볼 수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신사로서 삶의 중심을 잃지 않는 이는 매력적이고. 세상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이어가는 니나와 소피아의 모습에 빨려듭니다. 전형적 악당 1인을 제외하면 각자 색깔 있는 캐릭터들이 메트로폴 호텔의 세월을 다채롭게 만드는군요.

나름 모스크바국립대 교환학생 출신으로서 오래 잊고 있던 불가꼬프 아흐마또바 만델슈땀을 비롯해 좋아했던 마야꼽스끼 이름을 언급하는 장면들에 아련했어요. 투자은행에서 일하던 미국인 에이모 토울스는 40 후반에 소설가로 데뷔했고  작품은 50대에 발표했네요. 오바마와  게이츠 추천도서.

이렇게 짧게 정리한 인스타그램 리뷰가 성에 차지 않아서... 몇 줄 더 붙여봅니다.

혁명이 세상을 뒤집을 때, 부와 명예는 흔적 없이 사라지죠. 서른 셋의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은 총살형은 간신히 면하지만 호텔에 평생 갇히게 됩니다. 볼셰비키의 세상에서 귀족인 그가 발붙히도록 허용된 공간. 그런제 원래 머물던 최고급 스위트룸 대신 좁은 하인용 다락방에서도 그는 매력적인 인간입니다. "매력은 유한계급의 마지막 야망이란  역사가 보여주었다"는 싸늘한 선고도 부질없는 거죠.
  
감옥은 아니지만 호텔에 종신연금형. 그는 모든 걸 잃은듯 하지만 사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이어갑니다. 벗을 사귀고 동료를 만들고 사랑을 하고 인연을 쌓는데 호텔은 좁지 않더군요. 시와 여행, 로맨스의 시대와 작별했지만, 그는 호텔을 탐험하는 새로운 여행에 나서고, 아홉살 니나와 친구가 되고, 당대의 미녀와 사랑을 나눕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지성과 세계를 돌아다닌 경험의 깊이, 남다른 어른들과 자라면서 얻은 지혜와 태도가 그의 무기죠. 그의 매너와 대응은 어찌나 훌륭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요.

배경이 되는 시대는 몹시 특수합니다. 쇼스타코비치가 구 소련의 억압 속에 예술가로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보여준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도 떠오릅니다. 신념 없이 살아도, 신념에 따라도, 숙청은 예기치 않게 닥치고요. 시베리아 유배는 흑산도 귀양과 차원이 좀 다르긴 하네요. 호텔 밖으로 나서면 총살이라는 감금형도 비현실적이긴 해요.
"바야흐로 강철시대가 시작"되던 무렵, "발전소를 세우고 마천루를 짓고, 비행기를 만들 능력을 가지게 되었어.. 우리는 우리 시대에 무지의 종말, 압제의 종말, 인류애의 출현을 목격하게 될거야.. 우리의 시는 행동의 예술이 되었어. 대륙을 가로질러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고 별들에게 음악을 전달할 거야."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친구 미시카의 신산한 삶이 증명하듯, 그리 쉬운 시대가 아니었죠. 전쟁과 혁명을 거쳐 대기근과 숙청, 다시 전쟁을 겪은 시대에 호텔은 감옥이 아니라 오히려 안전하고 풍요로운 공간이라는게 아이러니.


러시아 제국 귀족의 DNA가 볼셰비키 세상을 만나서 고생하는 이야기로도 읽히는데 이것은 미국인 작가의 편견이거나 혹은 기득권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향수일지도 모릅니다. 음식에 맞는 와인을 고르는데 천부적인 알렉산드르를 시기하거나 혹은 그에 분노하여 와인 라벨을 없애려 한 이는 와인 목록이 혁명의 이상에 어긋난다고 주장합니다. 알렉산드르는 고상하고 세심한 반면 혁명세력은 단호하고 무식한 식으로 묘사되는게 불편한 지점들도 있어요. 귀족의 특권과 인텔리겐쨔의 나약함으로 몰아붙여 와인을 익명의 바다로 보내버린 걸 '평균과 무지의 영역'으로 던져졌다는 식인데요. 미세한 차이를 감별하는 재주를 기반으로 럭셔리 시장이 형성되는게 틀린 해석은 아니죠.. 인류의 문명과 예술이 권력자의 부를 과시하는 용도였거나 부자의 호의에 기반하여 발전해온 역사를 부정할 수도 없고요.


까칠한 볼셰비키의 눈으로 보면 세상의 부조리함은 더 크게 보입니다. 모든 걸 통제로 대응한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대비가 다시 생각납니다. 통제도 답은 아니었지만, 모든 걸 다 풀어준다고 해서 세상의 부조리가 해결되지도 않았죠..

"누아르 영화들은 한결같이 부패와 잔혹성이 소파에서 빈둥거리는 미국의 현실을 묘사했다. 누아르 영화에서 정의는 거지였으며, 친절함은 바보였다. 충성심은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사리사욕은 강철로 만들어졌다. 바꿔 말하면, 누아르 영화들은 꿋꿋하게 자본주의의 현실을 곧이곧대로 묘사했다." (464쪽)
조국의 빵이 다른 나라보다 맛없다는 얘기도 결코 공개해서는 안되는 사회. 볼셰비키 당 간부의 눈에는 누아르 영화를 냅두는 미국 자본주의 권력은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볼셰비키가 망한건 자본주의에 밀려서가 아니라 제국과 닮은 권위주의 독재의 실패인데 마냥 제국을 그리워하거나 서구를 동경할 일은 아니죠...


다소 불편해도 이 소설에 마냥 빠져드는 건, 순전히 알렉산드르의 매력 덕분입니다. 유한계급의 마지막 야망? 정말 철없고 오만한 진단이죠. 사람의 매력을 어떻게 계급으로 재단하겠어요. 알렉산드르는 체제를 따지거나 환경을 탓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로스토프 백작 가문의 일원'으로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해도 스스로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 누구나 반할 만한 겸손한 태도를 가졌죠. 알렉산드르에게도 볼셰비키가 악은 아녔어요.  "경의를 표하는 사람, 등을 토닥여주는 사람, 뒤늦게 오는 사람 등이 옛 시절의 그런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뻤다"고요. 사실 알렉산드르의 삶에 빛이 되어준 이들은 주방장, 식당 지배인, 호텔 재봉사, 가난한 글쟁이였는걸요. 그를 말그대로 구해낸 중요한 인물은 청소부였고 그때 그들이 발견한 놀라운 섭리는 전혀 귀족적이지 않아요.


독립적 영혼의 소유자 니나를 걱정하는 알렉산드르에게 "그 나이였을 땐 분명 당신과 당신 친구들도 열정과 자신감 넘치는 말들을 했을 것"이라며 "설혹 그 애가 외골수라서 어떤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때가 되면 깨닫게 될 것라고 믿어주셔야만 한다"고 하는 재봉사 마리나의 지혜가 결코 알렉산드르보다 못하지 않거든요..


"분명 여러분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 도약했던 순간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 여러분은 자기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그 순간들을 되돌아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약하는 데 약간이나마 기여했다고 인정할 만한 제삼자가 정말로 없었을까? 시의적절하게 조언해주고 소개해주고 칭찬의 말을 해주었던 멘토나 가족의 친구나 학교 친구가 정말 없었을까?" (318쪽)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이 누군가에게 저런 사람이었듯, 그에게도 누군가 그런 사람들이 늘 있는 겁니다. 제가 지칠 때 마다 힘이 되어준 분들의 얼굴이 스쳐가는 대목이었어요.
'유행에 뒤떨어진 것'에서 오래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도,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것도 다 하기 나름. 삶의 철학이란 걸 갖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다르다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사람이 매력은 폄하하거나 조롱한다고 없어지는게 아니죠..

사실 두꺼운 벽돌책인데, 주말 사이 끝내버릴 수 있도록 대단한 '이야기'의 힘을 갖춘 소설입니다. 매력적 주인공 캐릭터 뿐 아니라 호텔에 감금된 수십 년 세월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풀어나가는 리듬이 좋아요. 감금됐든, 몰락했든, 삶을 아름다고 자유롭게 꾸려가는 것은 결국 인간. 결국 인생에서 중요한 건 사람 혹은 사랑이란 걸 보여주는 고전의 향기가 있네요. 2016년 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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