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노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모인 우리는... 희곡을 낭독합니다. 서툴고 어색하지만 해보면 무척 재미있습니다... 지난 겨울 이후 한두 달에 한 번 모일 때 마다 낭독만 딱 하고 헤어졌죠. 한동안 줌으로 모임을 하다가, 정말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작품은 진짜 끝내주더라고요ㅠㅠ <부부의 세계> 쯤은 가볍게 제압하는 어마무시한 고전. 너무나 현대적인 드라마.... <메데이아 Medeia> ... 간단히 작품소개를 보시면, 느낌 아실겁니다...
이런 작품이 기원전 5세기에 쓰여졌다는게 믿기지 않습니다. (그때 고조선은...)
에우리피데스는 기원전 480~406년 분.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비극적인 작가'라 했다죠.
거대한 막장의 아우라... 읽다보면 아찔합니다... 너무나 당당한 이 여성을 이런 고통으로 몰아넣다니....
무튼, 이걸 차례로 읽어가던 우리는 중간중간 탄식과 웃음과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 몇 대목 옮겨봅니다.
가련한 내가 당한 형언할 수 없는
이 고통!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박맞은 어미의 저주받은 자식들이여,
아비와 함께 사라져버려라! 온 집이 무너져 내려라!
정말 이아손에게 반해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해 황금 양모피를 훔치도록 해준 메데이아. 고비마다 동생도 죽여, 사기친 다른 나라 왕도 죽여, 그렇게 사랑의 힘(?)으로 도피해 새 삶을 시작해 아들을 둘이나 낳았는데... 남편이 그 나라 공주랑 결혼을?? 그것도 자신과 아들들은 추방한다고??? 이게 미춰버리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이긴 한데... 솔직히 저렇게 대단한 여성이 소박맞았다고ㅠㅠ 저렇게ㅠㅠ
내 모든 인생이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내 남편이
가장 비열한 인간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에요.
생명과 분별력을 가진 만물 중에
우리 여자들이 가장 비참한 존재예요.
첫째, 우리는 거금을 주고 남편을 사서
우리 자신의 상전으로 모셔야 해요. 이 가운데
두번째 불행이 첫 번째 불행보다 더 비참해요.
다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얻는 남자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거예요. 헤어진다는 것은 여자들에게
불명예스럽고, 남편을 거절하기도 불가능하니까요.
고대 그리스 때 여성들도 다 알고 있었던거죠.... 게다가 그 시절 부인의 지위란. 이아손을 영웅 만들어줘도... 부질없다, 부질없다.... (이쯤에서 BGM은 팬텀싱어3 라비던스의 흥타령..)
그대는 천성이 영리하고 온갖 사악한
일에 능한 데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원한까지 품고 있소
대체 크레온 왕은 공주인 딸을 왜 애 둘 딸린 영웅과 결혼시키는데 앞장섰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사위될 이의 부인에게 저런...
아아, 크레온 님,
내 명성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고
크게 낭패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자식을 너무 영리하게 가르쳐서는 안 돼요.
그들은 태만하다는 비난을 듣는 것 말고도
시민들에게 미움과 시기를 사게 될 테니까요.
그대가 어리석은 자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말해주면
그대는 쓸모없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일 거예요...
메데이아, 재주가 독이 된건가요. 그 시절 여자들이 다 그랬겠죠.. 아니 참 오랫동안.... 아니..
게다가
우리 여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일에는 서투르지만
온갖 악한 일에는 가장 영리한 장인들이 아니던가!
이렇게 자학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사실 이아손보다 더한 영웅이라면 영웅인데, 멘탈 무너진 메데이아의 모진 결심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목표를 위해 독하게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신의 손녀로서 그냥 부귀영화를 누려도 될걸, 국보를 훔치러 온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이쯤에서 ... 이아손의 이야기. 아놔... 진짜.
당신이 나를 구해준 대가로, 준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겠소.
첫째, 당신은 야만족의 나라에서 사는 대신
헬라스 땅에서 살고 있고, 정의를 배웠으며..
모든 헬라스인들이 당신이 영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신은 명성을 얻었소…
당신은 또 공주와의 결혼을 비난하는데, 그 점에서
나는 먼저 내가 현명했다는 것을, 다음에는 품행이
방정했다는 것을, 다음에는 당신과 내 자식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을 보여주겠소...
추방자인 나에게 공주와의 결혼보다 더한 횡재가
어디 있었겠소?...
나는 자식들을 내 가문에 어울리게 양육하고...
당신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형제를 붙여주고...
공주가 메데이아로 인해 비참한 죽음을 맞은뒤, 이아손이 새장가 재미도 못보게 했다고 분개하는 장면은 정말...
메데이아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손녀. 반신의 아우라가 대단한데.... 그래도 그렇지, 두 아이를 죽이는 장면은 몹시 슬프고 끔찍합니다. 에우리피데스 작가님은 아이들의 절망적 비명까지 세심하게 쓰셨더군요ㅠㅠ 메데이아는 이 과정에서 엄청난 내적 갈등을 보여주는데... 고대 그리스 극장에서 이걸 보던 시민들은 얼마나 놀랐겠냐는 얘기를 R쌤과 나눴습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아이들을..... 엄청 비극적이어요ㅠㅠ
정작 메데이아는 이 엄청난 비극이 끝이 아니라....... 이 작품에도 등장하는 아이게우스 왕을 찾아가 왕비가 됐다가, 아이게우스의 아들 테세우스를 해하려다 오히려 본인이 다시 고국으로 도피하게 된다죠.. 고국에서 아들을 끝내 왕으로 만들고요. 그 아들은 이아손 아들인지 아이게우스 아들인지.. 무튼 이러니 전설..... (메인 이미지는 들라크루아의 메데이아...)
지난 6월 모임에서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낭독했죠..줌으로. 당시 짧은 기록을 붙여놓습니다... 그땐 정말 사랑이 뭐길래.... 라는 생각을 여러 갈래로 했는데 말입니다..
그리스 비극은 이토록 격정적인 것이었나요. 희곡 낭독 모임에서 아서 밀러의 시련 끝내고 그리스 시대로.. 오늘은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무려 줌으로 모여 차례로 낭독.. 안티고네 너무 슬퍼요. 2500년 전 인류가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놀랍지만.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인가 싶다가도,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의 저항이 얼마나 독하고 처절한지.. 그리고 하이몬의 엄마 에우리디케.. 아니 그 시절엔 대체ㅠ 인간의 운명이란 예나 지금이나 가혹한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건가 싶네요. 2500년 전 이런 비극을 쓴 소포클레스, 당대의 그리스 수준에 감탄하다보니 중국엔 그 무렵 공자님이... 우리는 고조선 청동기의 기록은 뭐가 있었을까요.. 밤에 H와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니. 안티고네 라는 영화도 작년에 나왔네요. 캐나다로 이민간 중동 출신 가족 이야기. 예고편만 봐도 쉽지 않아 보이는 아우라.. 무튼 넘 재미있어서 다음 모임엔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 도전. #남은건책밖에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