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냐 정혜승 Aug 26. 2020

<시선으로부터> 기세 좋은 여자들에게 반할 때


질문자 :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시선 :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왜요? 할머니가 섹스라고 말하면 웃긴가?
질문자 :... 흥미로운 대화나 서로에 대한 이해 같은 건요?
심시선 :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세상을 우리처럼 못 봐요.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섹스,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0쪽)

심시선 여사, '시선으로부터' 얻은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저런 말을 공공연하게 하는 심시선 여사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말해 뭐합니까. (딴 길로 새고 싶지 않았지만, 섹스를 좋은거라고 말하면 세상 무너지는양, 건강한 성교육 교재에도 난리치는 세상이 오히려 이상하죠...)
이야기는 심시선 여사가 돌아가신지 10년, 가족들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챕터마다 살짝 살짝 드러나기 시작하는 심시선, 그녀의 삶에 대한 퍼즐을 맞춰가면서 그 인간에게 홀딱 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쟁통의 비극에서 탈출해 홀로 살아남은 그녀. 뮤즈로 소비되고 박제되는 삶에서 다시 탈출해 자신을 찾아가는 그녀. 남들의 말과 일에 신경쓰는 대신 자신에게 집중한 그녀. 통념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삶으로 만든 그녀. 느리게 직진하며 기쁨과 슬픔을 모두 품었던 그녀. 애랑과 우정을 나누고 살아남아 끌고 가는 그녀. 


시선가의 여자들, 기세가 좋거나 저마다 결이 다른 여자들의 시선이 좋았어요. 물론 그중에서도 남의 시선 따위 신경쓸 겨를 없이 본인의 시선을 고집하며 살아온 그녀가 가장 멋지지만 모두 저마다의 꿍꿍이로 각자 역사를 쓰잖아요. 개별적 존재에게 고루 집중해주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그들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머니이자 할머니 제사를, 10년 만에, 하와이에서 가져보기로 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리고 시선을 추억하며 뭔가를 찾아가는 각자의 모험은 떠난 이를 위해 가장 근사한 인사입니다. 떠난 이의 유산, 살아온 기억을 토대로 현재의 나를 품어주는 다정한 의식 같아요. 눈물 나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사란 단어에 갖고 있던 비호감을 씻어내는 효과를 인정합니다.

정세랑 작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 번도 그를 읽지 못했다가 이번에 정말 제대로 반했네요. 심윤경 작가 이후 여성 소설가에 반한 것도 오랜만인거 같고요. (라고 쓰고 보니.. 김초엽님!을 비롯해 한강님, 김애란님, 김금희님.. 와. 까먹을 일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 여성 소설가들 두터워지고 있군요.) 그런데 그중 심윤경님만 먼저 떠올린건, 아마 비슷한 맥락의 유쾌함, 사랑스러움 같은걸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무튼. 이 여름, 고마웠던 소설입니다. 그리고....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 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되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회복하지 못했으면 하는 집요한 의지의 실행이었다." (178쪽)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저 문장은 너무나 유명해져버렸습니다.... 온라인에서 저 문장에 부딪칠 때 마다, 피해자에 대한 고통스러운 연민과 동시에 복잡한 감정에 시달리곤 했죠... 그런데 정작 <시선으로부터> 책에서 만난 저 문장은 당황스러웠어요. 주인공 시선을 꾸준히 학대해온 가해자 마티아스의 옹졸하고 비겁한 가해거든요. 진짜 악의로 가득찬 가해. 어떤 가해에 대해 다르다고 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지만, 머리가 복잡했어요. 저 대목에선.


매거진의 이전글 <배움의 발견> 종교와 가부장이 지옥을 만들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