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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Sep 04. 2020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소멸에 맞선 이야기의 힘


일 년만 쉬기로 했다
 
첫 문장입니다. 두번째 문장은 “턱밑까지 숨이 차올랐던 것”이라고요. 1996년 이후 장편소설만 스물아홉편을 쓴 소설가. “23년 동안 골방에 틀어박혀 이야기를 쓰고 쓰고 또 쓰는 삶!” 
소설가 김탁환님의 열렬한 팬으로서 넙죽넙죽 소설 받아먹을 땐 좋았죠. 이렇게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리셨구나, 팬으로서 당황했어요. 미안했습니다. 작심한 소설가는 글 감옥에서 벗어나 걸음을 내딛습니다.
 
길 위의 나날은 구불구불한 인생과 닮았다. 공간 여행이든 시간 여행이든 인간 여행이든, 낯선 시간과 공간과 인간과의 만남은 우리네 인생을 풍족하게 한다. ‘나, 지금, 여기’의 아집을 벗어나게 만든다. 자유로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든다. 떠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기쁨이자 고통이다.” (67쪽)
책은 공간 여행이자 시간 여행, 인간 여행에 나선 기록입니다. 거의 서울 만큼 크지만 서울목5동보다 훨씬 적은 2.8만 명이 살고 있는 전남 곡성을 살피며, 우리가 잊은 옛 방식의 일상을 지켜보고, 농부가 된 과학자를 탐색합니다.

메인 사진과 마찬가지로 탁환쌤 페북에서 퍼온 사진. 사진치유자 임종진님 촬영. 소셜미디어는 소설가와 공감하는 틀을 훨씬 확장해주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책을 읽는 내내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도시소설가가 농부과학자 이동현님을 만나 지방, 농촌, 벼농사, 공동체 등 네 가지 소멸과 맞서는 이야기를 풀어낸 듯 보이지만, 이들의 교감하고 여행하는 길은 그보다 더 짜릿합니다. 보이지 않던걸 보게 되고, 들리지 않던 걸 듣게 되는 과정, 오감이 열리는 경험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뭐죠?
 
아름답지요?

......

소리였다.
흐르는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쿵쿵 심장이 대북처럼 울렸다. 물소리가 다리를 흔들고 옆구리를 휘감고 얼굴을 덮었다. 내가 강으로 스미고 강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강과 내가 엉키고 울리고 치솟고 가라앉았다. 아득했다. 물 밖에서 물에 사로잡힌 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웅장하고 청량했다.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끽한 후엔 그 경험에 어울리는 단어를 고심하는 법이다. 아무리 찾아도 하나뿐이었다. 아름다움! (42쪽)
 
곡성에 자리잡고 친환경농업법인 ‘미실란’을 운영하는 이동현님을 따라 김탁환님이 겪는 일. 이동현님은 (독자 눈에도) 뜬금 없이 아름답지요? 라고 자주 묻습니다. 그리고 도시소설가는 매번 새로운 세상을 만납니다. 구멍으로 물이 퐁퐁 솟는 뿅뿅 다리에 주저앉아 이동현님을 따라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들어보니, 소리가 들린 겁니다. 섬진강이 이렇게 아름다고 다채로운지, 독자까지 한없이 빨려듭니다.

메인 사진과 마찬가지로 탁환쌤 페북에서 퍼온 사진. 사진치유자 임종진님 촬영


제가 또 플라톤 책 좀 보면서 '사랑'을 탐구중인 인간. 플라토닉 러브로 한정지을 필요는 없지만, 세상을 다른 눈으로 만나고 함께 성장하는게 사랑입니다. 어디 강물 소리 뿐이겠습니까. 곳곳에서 “아름답지요?” 질문은 감탄이 되고,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23년 동안 스스로 글감옥을 만들고 흘러넘치는 이야기를 정리한 도시소설가는 자신과 본이 다른 이야기꾼을 만났습니다. 평소 인간 여행을 즐기며 혜초스님, 이순신, 박지원, 정도전을 파고들어 이야기로 풀어낸 탁환쌤이 이번에는 고전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인간을 만났을 뿐입니다.
더구나 이동현님은 도시인의 눈에는 더 그렇겠지만, 남다른 인간입니다. 산골에서 자라 순천대를 졸업한뒤 서울대 농생물학 석사, 일본 규슈대 농학박사로 미생물을 연구한 학자. 교수로서 세계적 연구자가 될법한 상황을 마다하고 결국 농부로 돌아온 이. 동물실험이 싫어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듯 생명에 대한 감각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온갖 실패 끝에 곡성의 폐교에 터를 잡고 농업법인 미실란을 만들었습니다. 소설가는 우연히 그곳의 '반하다밥카페'에서 한 끼 식사를 했다가 인연이 닿았고요.

시간과 노력을 쏟는 대상에 대한 짙은 관심과 지독한 애정,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믿음이 특별한 경험을 만든다. 농부에게 그것은 논과 밭을 이루는 땅이고......매혹되지 않는다면, 마음을 주고받으며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찌 평생을 머물러 살겠는가. 근대식 공장노동자나 도시의 월급쟁이는 결코 모를 고통과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91쪽)

이동현님의 저 짙은 관심과 지독한 애정을 관찰한 소설가의 이야기 또한 절창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열하광인』을 집필할 때는 『열하일기』의 상세하면서도 다채로운 글쓰기에 빠져 지냈다. 한양에서 열하까지 다녀오는 동안, 연암 박지원은 발길이 닿은 마을들을 그야말로 오감을 총동원하여 담아냈다. 사람, 동물, 식물, 무생물을 가리지 않았고, 익숙한 유교의 풍습이든 낯선 이교의 풍습이든 자신의 문장으로 옮기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열하일기』는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을 때, 얼마나 집중해서 몸과 마음을 열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249쪽)

탁환쌤이 연암 박지원에게 감탄한 대목이지만, 그는 곡성에서 이동현이라는 인간을 만난 뒤 집중해서 몸과 마음을 열고 기록했습니다. 평소 기록의 힘에 열광하는 제가 또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나요. 더구나 농부의 철학, 비료나 제초제를 쓰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애쓰는 농부의 삶에는 순결한 감동이 있습니다. 예컨대, 문명의 힘을 빌리지 않고 태어난대로 자란 벼의 이야기입니다.

뿌리가 완강하게 버티는 기분이 들었다. 두 번 세 번 힘을 실은 후에야 겨우 뽑을 수 있었다.. 쓰러진 벼는 뿌리가 제대로 뻗질 못했다. 땅속 깊숙이 내려가서 흙을 움켜쥐지 못한 탓에 바람을 맞자마자 쓰러진 것이다. 잘 견딘 벼는 뿌리를 쭉쭉 뻗어내렸다. 길이를 비교해 보면 두 배 아니 세 배 넘게 차이가 낫다. 왜 이 뿌리는 짧고 저 뿌리는 길까. 잔뿌리가 왜 여긴 적고 저긴 많을까.

쓰러진 벼들은 비료를 넉넉하게 많이 준 것이다… 반대로 친환경 농법을 쓴 논, 그러니까 비료도 주지 않고 제초제도 쓰지 않은 벼들은 영양분을 찾기 위해 논바닥을 깊이깊이 파 내려가야 했고 잔뿌리도 최대한 많이 만들어야 했다. 태풍이 몰아치자 두 벼의 운명이 확연히 갈렸다. (155쪽)


똑같이 탐스러운 모습으로 자라도,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세월을 보낸 벼는 뿌리가 다릅니다. 보호받으며 주는대로 받아먹는 삶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오롯이 집중하며 성장하면 깊이가 다릅니다. 단순하지만 정직한 이 메시지에 다시 한 번 겸허해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동현님의 인생 역시 대부분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고비고비 힘들었어요. 그냥 묵묵히 다시 걸었을 뿐이죠. 제 개똥철학 역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들과, 뭔가 함께 도전하는, 그 과정의 즐거움에 더 무게를 두기 때문에 이런 대목이 와닿았습니다. 이것은 실패한 이들에게 다정하면서도 든든한 위로입니다.


누군들 현실의 벽을 부순 후 성공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최선을 다하더라도 실패하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실패했더라도 패배한 것은 아니다. (131쪽)


두 이야기꾼을 따라 공간 여행, 시간 여행, 인간 여행을 하다보면 제 생각까지 조금 맑아지고 정리되는 느낌을 얻습니다. 의사처럼 농부에게도 명예로운 자격증을 부여, '할 일 없으면 농사나 짓지'가 아니라 아무나 지을 수 없는 농사를 다시 정의해보자는 제안에 끄덕거리기도 하고요. “촌놈들은 역시 안 돼”, 라는 식의 비난이 어떤 맥락에서 얼마나 잔인한지 생각해보고요. 서울이 아니면 모두 지방이고, 지방이란 곧 촌이라는 등식 속에 서울중심주의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서울시민으로서 제 편협함과 무심함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코로나 같은 질병의 시대가 기후위기와 겹쳐 인간을 정신차리게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고, 이 논픽션은 기꺼이 실마리를 제공하려 합니다. 탁환쌤 채식하는 것을 그냥 신기하게만 보다가 동물권에 대한 깊은 성찰에 부끄러워지기도 하는데..저는 육식을 끊을 엄두가 나지 않아 더 부끄러워지는...ㅠ


소설가의 여행은 이렇게 독자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줍니다. 다 따라하지 못하더라도, 100의 성찰 중 5만 챙기더라도,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다는 열망의 씨앗을 남깁니다. 이동현님은 미실란에서 278종의 벼를 심고 키워 발아를 시험합니다. 도시소설가와 농부과학자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 저마다 다른 속도와 비율로 발아의 신비를 겪을겁니다. 아름다운 거 맞죠?



그리고 2020년 여름, 마침 이동현님의 흔적을 이런 기록에서 봅니다. 직접 남겨준 사진..... ㅠㅠㅠㅠ 원래 자연은 무자비하고, 인간은 또 일어섭니다. 그리 믿어봅니다. 지치지 마시길.




P.S> 이거슨 자랑. 원래 20대 시절부터 잘 알던 옆지기에게 탁환쌤이 가끔 저자 사인본을 보내주시곤 했는데, 사실 우리집의 탁환쌤 찐팬은 접니다! 드디어 이번엔 순서에서 제가 앞섭니다. 호호호. 제가 탁환쌤 '성덕'이잖아요. 2007년에 리뷰를 시작해서...  퍼나른 것 포함해 브런치에 있는 기록만 모아봅니다. 다 강추하는 책들이지만..바쁜 핑계로 리뷰 못하고 넘어간 책들 중에 <살아야겠다>도 꼭 보세요. 메르스 이야기이지만 코로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열하광인>문장에 취하고 사건에 빠빠졌으며 이치를.. - 2007.11

<목격자들>4.16 기억하는 또다른 방법 - 2015.6
<거짓말이다>잠수사들과 마주하다,  아이들과 포옹하다 - 2016.8

<이토록 고고한 연예> 조선 광대 달문에 홀리다 - 2018.7

<덕후의 식탁> 김탁환쌤 팬의 성덕기록 & w-ing - 2019.6

<가시리> 그리워하며 부르는건 모두 사랑노래 - 2019.9

<달문의 길>김탁환쌤과 함께 걷고, 백탑을 만나다 - 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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