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냐 정혜승 Sep 13. 2020

<사람에 대한 예의> 나를 지키며 살 때 외롭지 않도록


“한 독서 클럽에서 저자 초청을 받았다. 저녁 8시쯤 모여 밤 11시 정도까지 책 한권을 주제로 대화하는 모임이었다 책은 ‘왼손으로 거들 뿐’이고, 서로의 삶과 생각을 나누는게 중심이었다. 한 젊은 회사원이 “직장에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나쁜 일을 안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 참석자가 조언했다. “본인의 캐릭터를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잡으면 돼요. 일단 캐릭터를 그렇게 잡으면 누구든 쉽게 어떻게 못 해요. 아, 물론 사장 되고, 부사장되기는 어렵겠죠.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올라갈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겁날 게 없어요.” 그는 대기업 부장으로 있다고 했다. 어느 곳에나 현자는 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이 사회가 그 많은 모순 속에서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200~201쪽)
 
2019년 11월 #트레바리 #기막힌논픽션 클럽에서 <두 얼굴의 법원>을 읽었어요. 저자 권석천님을 클럽장의 지인 찬스로 모셨죠. 직전 모임에 <법률가들>의 김두식님을 청했는데 규모는 적어도 찐 독자들과의 만남을 좋아하시길래 용기를 냈죠. 그런데 <사람에 대한 예의>에 그날의 이야기가 담겼을 줄이야. 새삼 대기업에서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K님도 보고싶고요.
저 에피소드 관련, 제정임 선배의 모범답안도 기록해둡니다.

“언론사에 입사했는데, 부장이 나쁜 기사를 쓰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옆에서 사회를 보던 제정임 교수가 말했다. “실력을 쌓아서 일을 정말 잘한다는 평가를 받도록 하세요. 좋은 기사 많이 쓰고요. 그러면 나쁜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을 거예요” (197쪽)

 
이번에도 #기막힌논픽션 클럽에서 함께 봤습니다. <판데믹, 바이러스의 위협>, <임계장 이야기>, <판문점의 협상가>에 이어 5~8월 시즌의 마지막 책. 코로나로 힘든데 좀 쉬운(?) 책으로 마무리할까 했죠. 헌데 이 책이 그리 호락호락한 책이 아니어요. 쉽게 읽히는데 쉽지 않아요. 던지는 질문이 많기 때문이죠.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됐다는 반응이 꽤 있었어요. 어쩌면 발제자인 제가 그걸 유도했을 수도 있고요. 책과 영화에 대한 리뷰 모음 정도로 편하게 본 2030 멤버들도 있었어요. (때묻은 4050일수록 성찰의 기회가 다르게 다가왔나 잠시 생각ㅎㅎ)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연기했다가 결국 줌으로 9월에야 진행한 8월 모임. 독서클럽을 위한 제 발제문은 이랬어요. 사실 핵심 주제가 있는 다른 논픽션 책에 비해 발제 정리가 좀 어려웠어요. 어디서 갈래를 타야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마음이 흔들리는 지점이 조용히 이어지는 책이거든요.
 
 1) ’나'에 대해 
 -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에 혹시 심쿵하셨나요? 책을 읽은 뒤 조금 자신 없어졌다거나, 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나요?
 - 조직을 위해, 세상을 위해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인데, 흑화라고요? 이 대목에서 혹시 흔들리셨나요? 흑화는 게으름 탓이라고요? 
 - 나를 성찰하게 만드는 영화나 책에 대한 경험을 나눌 수 있나요? 낯선 나와 마주하게 되는 서늘한 순간을 기억하세요? 꾸밈을 완전 배제할 수 없지만 나란 인간을 되돌아본다면?
 - ‘나를 지키며 산다’, 트럼보.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는 성실한 노력이 자존감을 지켜줄까요?
 
2) 우리, 관계에 대해 
 - ‘나’를 넘어서 ‘우리’를 의심해야 할 때라고 깨달았던 경험이 있나요? 우리의 소속, 직업, 그 무리의 이해관계는 괜찮아요? 

- 기수와 경력을 구분하고, 우리는 ‘같음’보다 ‘다름’에 주목해 나누고 차별하지 않나요? 그런 경험 없어요? 당신의 조직은 괜찮아요? +10 노쇠한데 미성숙한 걸 목격한 적 있나요?
 - 한국 사회는 같은 기억을 찍어내는 인큐베이터. ‘나 다움’과 ;개성’을 버리기를 요구받는다고 느꼈을 때 어떠셨어요?

-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말로 눈 감았거나, 침묵하거나 동조해서 후회한 적이 혹시 있나요?

- 타인에 대한 배려를 인지하고 노력한 적 있나요? 우리가 인간의 ‘정의’를 지키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아, 한국 사회
 
저도 기자 출신이라,  ‘기수’와 ‘경력’을 구분하는 언론사 문화에 대한 얘기들이 씁쓸했어요. “인간은 ‘같음’보다 ‘다름’에 주목해 나누고 차별하려 든다"(15쪽)는데, 정말 많은 장면들이 떠오르더군요. “취재 경쟁은 단편적 팩트를 확보하는 데 집중됐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설익은 기사들을 끝없이 납품했다. 공정 보도나 언론의 책임 같은 가치는 저 멀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118쪽) 이 정도의 성찰을 글로 남기는 기자가 드물다고 멤버들이 입을 모았어요. 기자들 술자리에서 흔한 얘기인데, 그것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던 걸까요.


 “그놈은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 딸내미는 고것을 확 물어분 것이여.” 영화 <곡성>은 ‘미끼를 물어버린’ 피해자 탓을 합니다. 이 한마디에 저자의 생각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나 봅니다. 독자의 생각도 함께 출렁거립니다.
 “밤늦게 다니지 마라” “짧은 치마 입고 다니지 마라”.. “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느냐” “왜 세월호에 올랐느냐” “그 위험한 장소에 왜 갔느냐”  이 물음들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음모다. (31쪽)
 
이 사회에 대한 그의 단상 몇 개를 옮겨봅니다. 어떻게 엮어야 할지 제 역량이 부족해서.
 

범행은 특별할게 없었다.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들의 무표정 때문이었다. 그 누구의 표정에서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울먹이기는커녕 자신이 놓인 상황에 대한 분노나 슬픔, 아쉬움, 후회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세워본 가설은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외부에서 부정적인 자극이 반복되면 그 자극에 순응해 스스로 상황을 바꾸려는 의욕을 잃는다. 의욕의 문제만이 아니다. 스스로 상황을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가 없다. 그들은 사회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실제론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삶은 주류 사회에서 호명되지 않는다. (55쪽)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 이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들을 때로 생각합니다. 제 주변은 온통 엘리트 뿐인가 싶을 때 뭔가 뜨끔합니다. 조은 교수님이 <사당동 더하기 25>에서 추적했던 도시 빈민들이 딱 저랬어요. 대를 이어 몹시 고단한 삶이라 감히 뭐라 할 수 없더군요.


“한국 사회는 너무 많은 정보를 강요합니다. 끊임없이 뇌를 지치게 합니다.. 수백 개의 자기소개서를 읽엇는데 개개인의 개성이나 특징이 드러나지 않더군요..한국은 같은 기억들을 찍어내는 거대한 인큐베이터.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도미노처럼 무너지게..”(65쪽)
 다양성에 대한 고민이 턱없이 부족한 사회. 너무 급하게 달려온 사회라 그런 걸까요.
 

“한국의 공적 분야에서 일하는 직업인들은 ‘플러스 10의 마법’에 걸려 있다. 실제 나이에 열 살을 더해야 그 사람의 사회적 연령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 의식이 노숙 혹은 노쇠하다. 젊은 기자, 젊은 검사, 젊은 판사들이 괜히 10, 20년 전 ;’평균인의 상식'으로 기사를 쓰고, 수사를 하고, 판결을 하는 게 아니다.

사회적으로 조로하면서도 정신 연령은 낮다. 조직 밖에 나가면 노숙한 척은 다 하면서 조직 안에만 들어오면 어린아이가 된다. 상사와 선배들 앞에선 스스로를 아직 모자라고 배워야할게 많은 존재로 여긴다. 자기주장을 펴지 않고 늘 고개를 끄덕일 자세가 돼 있다.” (105쪽)
옛날 취재원들 생각도 떠오르고, 제가 만났던 그들이 그 시절 고작 3040에 불과했다는게 이제와서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저도 스물셋에 기자 시작해서 엄청 노숙한척 무게 잡았던 인간이었거늘.


남자들이 사자성어에 묘한 향수를 느끼는 거. 그 이유가 뭘까. 뭐긴 뭐겠어? 아련하게 멀어져가는 가부장사회에 대한 미련이지. 남녀유별, 출가외인, 부창부수.. 2000년 전의 교훈을 삶의 좌표로 삼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심지어 전쟁과 살육이 판치고 신분 차별이 극심하던 춘추전국, 한나라, 삼국지 시대를? (161)
저 대목에서는 아차 싶었어요. 사실 고전, 전통이란 필요할 때 거기에 맞춰 써먹는게 아닌지. 선인의 현명함을 담았다고 선량하게만 해석할 일은 아니죠. 

‘좋은 게 좋다’는 규칙에는 선택과 배제의 원칙이 적용된다. 정치권력-재벌권력-검찰권력-사법권력-언론권력의 펜타곤 안에서만 유통되는 가상화폐다. 서로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짬짜미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펜타곤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길들여지지 않은 이용마는 한국 사회에 내장된 폐쇄회로를 냉철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문화가 팽배해지면 그 조직은 발전보다는 정체나 퇴보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이런 게 통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국민이 검찰과 언론, 그리고 엘리트들을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건 그래서다. (166-167쪽)

‘남자는 여자와 다르다’ 이게 무슨 도덕률이냐고? 분명한 도덕률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역시 예수다. 인간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말씀이다. 다만, 그떄 예수가 이 물음부터 던졌다면 어땠을까. “저 여인과 간음한 남자는 지금 어디 있느냐?(182쪽)

낙태, 간음..여성에 대한 기울어진 시선은 역사가 길군요. 정말 길군요.


결국 중심 잡는 건 나


“내가 이러는 건 다 조직을 위해서야.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니야”, “지금 내가 이러는 건 나중에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야.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그렇게 흑화는 완성되네… 한가지 특징이 더 있네. 자기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악마화하기 시작하지. (25쪽)  
영화 '조커'의 목소리로 '흑화'에 대한 얘기가 나와요. 꼰대가 되지 않기, 흑화되지 않기, 다 비슷한 맥락이라 봐요. 개인적으로 어떤 자리로 승진하겠다, 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저를 칭찬해요. 목표가 너무 분명하면 그 길로 가기 위해 흑화를 감수할 개연성이 높아서요. 그냥 열심히 살자, 좋은 사람 되자, 정도가 좋더라고요.

침묵의 문화는 침묵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란, 굳건한 믿음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침묵은 잠시 시간을 늦출 뿐이다. 침묵하는 자도 희생될 수밖에 없다… 집단 따돌림과 마녀사냥은 동조자들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조자들은 대개 착하고 평범하게 생긴 얼굴들이었다. (177쪽) 
영화 <우리들> 못본게 좀 아쉽지만, 하도 좋은 리뷰가 많아서 거의 본 느낌ㅠ '냄새'로 '선'을 긋고 '금'을 넘지 말라고 하는 일은 사실 드물지 않아요. 존경하는 K 형님이 예전에 '감히'라는 단어를 얘기했어요. 누구에게도 '감히'라는 말을 들이밀지 않노라고. 선을 긋는 선민의식을 경계합니다. 침묵하는게, 동조하는게 훨씬 쉬운 길이고, 생각 없이 살면 그럴까봐, 경계합니다. 나부터. 


좋아했던 영화 <트럼보> 에피소드를 꺼내주셨듯, ‘나를 지키며 산다’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이들이 있습니다.  '때론 자존감이 인간의 모든 것이기도 하니까요'.(78쪽) 권석천 선배는 혹시 이 글을 쓰면서 외로우셨을까? 문득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나를 지키며' 사는 이들은 조금 든든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을지 모르니, 외로워 마시길. 제가 그런 인간이란 건 아니고요. 그러고 싶어하는 인간이라 그래요. 우리 모두 이용마씨처럼 원칙을 지키며 살고 싶은 거잖아요. 평소 그리 못하는 일이 종종 생겨서 문제일 뿐. 누구나 '사람에 대한 예의'를 주문처럼 외우면서 나를 지키고 싶을겁니다. 그렇지 않다고요? 그럼 책 한 번 보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소멸에 맞선 이야기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