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냐 정혜승 Jul 07. 2018

<이토록 고고한 연예> 조선 광대 달문에 홀리다


심장이 뛰는 삶


“...이야기를 쓰고 있으면 심장이 요동치네.”
“어허, 고약한 바람이 들었군요.. 저는 그게 뭔지 압니다.  구걸만 다녀도 한세상 그럭저럭 꾸릴 텐데, 악착같이 철괴무를 배우고 곤두놀이와 줄타기와 재담과 소리를 익혔습니다. 잘 먹고 잘살려고 이러는 거라며 핑계를 댔지만...저와 당신 같은 이상한 사람한테만 불어 대는 바람입니다. 지금은 태풍처럼 휘몰아치겠지요.”

심장이 뛰는 것이 무엇인지. 10여 년 전 첫 직장을 그만두고 허허벌판에 나온 제게 “꿈꾸는 자는 다르게 진화한다”는 말을 해준 분이 있었습니다. 최근 직장을 그만둘 때도 ‘심장이 뛰는 일을 해보자’는 제안에 혹했죠.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이렇듯 평범한 직장인도 꿈을 꿉니다.
조선 최고의 광대 달문은 심장이 뛰는 대로 삶을 일구어 전설이 된 인물입니다. 다리 밑 거지 왕초, 가장 못생긴 인간이라 했지만 그의 몸짓, 말짓에 사람들이 덩달아 요동쳤습니다. 

“어떤 걸 입었고 무엇을 쥐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죠. 오라버니가 춤을 추는 내내 사람들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으니까요. 밀양강이 범람하여 삼랑진 전체를 뒤덮는 정도의 충격을 줬어요. 이어진 열두 무인의 검무 따윈 기억도 나지 않아요.”


한 없이 좋은 사람


‘한 없이 좋은 사람’과 함께 장편의 늪에 빠져보라던 김탁환님의 주문은 그대로 이뤄졌습니다. 620여쪽 중 100쪽을 읽고 바쁜척 미루다가, 지난 토요일 나머지 500여쪽을 해치웠습니다. 달문에게 빠져 헤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척박한 신분 사회, 생존이 절박한 시대에 아랑곳 않고 스스로 삶을 만들어가는 달문. 사람이 먼저라는 원칙 아래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은 달문. 냄새나는 거지로 살아도, 조금 씻고 점원으로 살아도, 광대, 장인으로 살아도 한결 같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사심 없이 올곧은 사람,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갖춘 사람에게는 사람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만드는 사연, 인연마다 이야기가 넘칠 수 밖에 없네요.. 남다르니까요.


육신의 안위 대신 사람만 보는 바보, 한 없이 좋은 사람이잖아요. 못난 얼굴이지만 ‘선하게 살아 낸 세월이 순간순간 반짝’이는 웃음을 가진 사람. 사람의 외로움과 절망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어 외로울 겨를이 없는게 고충이랄까요. 악당을 미워하기 보다, ‘그 마음과 태도를 고치거나 버리지 못하는 걸 볼 때마다 가엾단 생각’을 하는 넓고 바른 사람. 아니, 실존 인물이 모델이라니요..


조선의 고고한 연예
 

달문의 탁월함은 매설가 모독으로 빙의한 김탁환님의 글로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원래 좋아하는 작가님의 문장 앞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더군요. 이야기 진행에 애가 타서 휙휙 넘기다가도, 달문의 재주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문득문득 상상에 속도가 더뎌졌습니다. 왜 ‘고고한 연애’가 아니라 ‘고고한 연예’인건지, 갸웃했는데, 읽어보시면 압니다. 그리고 연예든 연애든, 본질은 사람이 뜨거워지는 겁니다. 누군가 함께 하면 더 후끈 미쳐버리는 것이고요.


"북과 춤, 소리와 동작이 서로를 향해 파고들어 깊이 사랑을 나눴다. 북이 앞서면 춤이 휘감고, 춤이 앞서면 북이 두들기며 쫓아 균형을 맞췄다...둘은 사랑을 나누면서 또한 전투를 벌이는 듯했다. 완전한 아름다움에 이르거나 완벽한 폐허에 도달하거나. 그 중간은 없는 판이었다. 북을 치는 달문도 눈물을 글썽거렸고 춤을 추는 운심의 눈도 젖어 들었다. 너무 짜릿하고 황홀해서, 이런 순간은 다시없을 것만 같아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읽는 독자도 짜릿하고 황홀하게 홀리는 기분입니다. 열정과 몰입이 사람을 가장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그게 춤이든 무엇이든, 혼자 하든 함께 하든, 인생 가장 행복한 순간들로 이어지나봐요. 기왕이면 함께 나누면 더 근사하겠죠. 달문에게는 달문을 믿고 따르고 사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덕분에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삶이 그렇죠.


빛과 그림자


“이 나라를 제 나라라고 여긴 적이 없습니다. 이 나라는 나라님의 나라입니다. 또 그 나라님 아래에서 높은 벼슬을 살고 드넓은 땅을 지닌 양반님네의 나라기도 하고요.. 이 나라는 땀 흘려 땅을 일구는 농부의 나라였던 적이 없습니다. 농부의 나라가 아닐진대 어찌 저 같은 거지의 나라이겠습니까?”


무섭고 위험한 주장이었다는 매설가 모독의 말. 달문에게는 그저 담담하고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달문이 실제 어떤 삶을 사는지, 소설을 보세요. 그의 말에 힘이 실릴 때, 인기인이자 유명인 달문에게 주목이 쏟아질 때, 순간순간 가슴을 졸이게 될지, 책을 보세요. 일단 달문에게 빠져보셔야 합니다.


책 표지 뒤편에, 달문의 생을 이렇게 ‘18세기형 만능 엔터테이너’로 그려낸 작가에 대한 헌사가 있습니다. 광대 달문과 춤꾼 운심은 기록에 나오는 인물들입니다. 책 말미에는 참고 자료 목록이 나옵니다. 거저 받아먹고, 한 없이 좋은 사람을 만나 장편의 늪에 푹 빠져 설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탁환님 팬 인증 리스트 덧붙여봅니다.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방각본 살인사건', '리심, 파리의 조선 궁녀'는 미처 리뷰를 남기지 못했네요. 


이건 무려 2007년 글. 예전 블로그에서 퍼날라오는 정성..


2015년에 봤네요..


이건.. 아이들을 생각하며, 참 힘들게 마주했던 2016년의 책



매거진의 이전글 <열하광인>문장에 취하고 사건에 빠빠졌으며 이치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