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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Sep 28. 2020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되야지


'할머니들에게 아침은 TV의 시간입니다. 아마 전쟁이 나도 KBS <인간극장>과 <아침마당>이 끝나야 피난을 가실 거예요. 할머니들은 모닝TV를 충분히 즐긴 후 9시 반에서 10시 사이에 한 분씩 느릿느릿 마을회관으로 모이셨지요. 
화투용 담요를 펼치기 전에 오랫동안 굳어진 할머니들만의 습관이 있습니다. 일단 믹스커피로 속을 따뜻하게 데우고 하루를 시작하는 거예요. 커피는 무조건 맥심 모카골드. 할머니들의 스타벅스죠. 동서식품 주식을 사야 하나 고민될 정도로 많이 드시더군요.'
 (19쪽)

본문은 이렇게 시작해요. 할머니들의 일상을 이렇게 자세히 지켜볼 일인가 싶은데, 감독님은 사랑에 빠진게 분명해요. 그리고 독자로서, 순식간에 저도 이 할머니들 사연에서 사랑의 포로가 됩니다... 정말 너무 행복한겁니다. 


"나는 TV에 나오는 맛집이 왜 맛이 없는지 알고 있다"며 뒷광고의 원조 격인 TV 맛집 프로그램을 비판한 <트루맛쇼>를 비롯해  <MB의 추억>, <쿼바디스>, <미스 프레지던트>, 늘 유머를 잃지 않았지만 독하게 작심한 다큐만 만들던 김재환 감독님. 그런데 문득 결심한 겁니다. 다음 작품은... "어머니를 위해, 칠십 대 중반 여성들이 까르르 웃으며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녀들의 공통점은 무려 '권사님'이다".. 3년 뒤 효도 기획, 주문 제작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 완성.. 


다큐를 찍은 감독님이 '일용할 설렘을 찾아다니는 유쾌한 할머니들'을 정리한게 바로 이 책입니다. 배우 김혜자님은 "이 책이 속삭이네요. 오늘을 살아가라고. 눈이 부시게"라고, 유재석님은 "하루하루 밥을 짓듯 설렘을 찾아가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뭉클한 웃음을 주네요.. 어떻게 하면 재밌게 나이 들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오상진님은 "매일매일의 소중함과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라고 추천사를 남겼어요. 추천인이 왜 이렇게 훌륭하냐고 감탄하다가.. 책 쫌 보니 알겠더라고요. 이 책은 마음에서 우러나 사랑할 수 밖에 없어요.. 한글을 몰라 모진 삶을 더 힘들게 보냈던 분들이 할머니가 되어 한글을 배우고, 세상을 만나는 설렘에 공감할 수 밖에 없어요. 

곽두조 할머니가 노래자랑 대회에 나간 사연은 각별히 따뜻합니다. 황금빛 인생은 드라마에나 있죠.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도 넘어지고, 거절당하고, 쓰라림의 연속이고..그래도 친구가 주는 요구르트. 이 에피소드는 보셔야 합니다. 책을 주문하세요. 

주리 님의 삽화가 예뻐요. 저 장면이 막 상상되요.. 금색 블라우스 차림에 향수를 뿌리고 나선 할머니. 


'재미있게 살고 의미 있게 죽자'고 했던 감독님은 할머니들과 지내면서 '재미있는 게 의미 있는 거다', 생각을 바꿉니다. 이런 재미? 뭔들요. 


맙다 화투야

오백 원만 있으마 하루 종일 즐겁다
니가 영감보다 낫다

- 박금분, '화투' 중에서 

시골 할머니들의 사랑스러운 일상과 달리, 할아버지들 얘기는 좀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다짐하게 됩니다. 웃으며 살기 위해 더더더 애써야겠구나. 


우리나라에는 한글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311만 명(2017년 기준)의 사람이 있고, 그 상당수는 할머니들입니다. '가시나'란 이유만으로 지독한 노동과 차별은 당연했어요. 집안의 모든 정서적 물질적 자원은 오직 아들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 태워졌습니다. (123쪽)

300만 명.... 할머니들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평생 신산합니다. 아들이 아니라 딸이 태어나 분하다고 '분한'이라고 이름 붙여진 딸들의 생애. 배울 기회도 없이, 시집 어른들과 남편을 섬기며, 대를 잇는 도구로서, 밥벌이를 위한 노동자로서, 어떻게든 자식들 교육시켜 도시로 보낸 할머니들. 글을 읽지 못하는 수치심으로 때로 오열해도 어쩔 수 없던 삶.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 함께 한글을 배우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요... 사실 이분들의 모든 에피소드는 긍정 에너지가 넘쳐요. 감독님이 그런 시선으로 그린 것도 있겠지만.. 그 고단함 삶을 견뎌낸 에너지 자체가 대단한거고, 세상 이치를 삶으로 익힌 분들이이란게 실감납니다. 

할머니들이 보내주신 영상 편지.... 그 무렵 기억이 떠오르네요. 


저건 19년 3월.... 그리고 9월에 한 번 더 보내주셨군요. 


한참 할머니들에게 푹 빠져 있는데, 써니가 그래프를 하나 공유해줬어요. 무시무시한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ㅠㅠ  (Y축이 완전 달라요..) 뭐랄까, 한참 꿈꾸는 중에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차가운 현실. 그러나, 그럼에도.... 



현실이 암담하다고 해서, 거기에 발목 잡힐 수는 없습니다. 이런 책을 통해 따뜻한 에너지를 얻은 보람이 없잖아요... 할머니들의 이야기 속에서 김 감독은 속삭입니다. 

우리 시대 효도는 전화가 알파요, 용돈이 오메가입니다. (54쪽) 
전화도 잘 않는 저란 인간... 전화를 해야죠, 전화를.... 

설렘의 시작은 배움입니다. 두려움을 넘어 배움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를 기다리는 건 어제와 똑같은 지겨운 일상뿐이에요. 시간은 무디게 흐르고 무료함이 영혼을 잠식하지요. 오직 설렘만이 나이 든 자에게 생기와 재미를 공급합니다. 재밌게 나이 들고 싶다면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야 해요. (78쪽)
어르신들도 행복해야죠. 홧병에 시달리는 대신 다른 에너지를 만드셔야죠. 고령화사회의 최우선 고민. 어르신들이 설레이며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뭐가 있죠? 저는 사실 춤을 배우고 싶어요. 감독님 춤 에피소드에 완전 공감... 교회 뿐 아니라 다른 공간이, 기회가 필요해요. (이걸 스타트업으로 풀겠다고 했던 S님 생각...) 

할머니들에게 배웠어요. 나이듦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행복한 노년을 상상할 수 있겠구나. 재밌게 나이듦의 완성은 죽음을 준비하고 환영하는 것이로구나.
 (199쪽)
뭔가 가르치려고, 조언하려고, 충조평판 하지 않아도 할머니들의 일상 자체가 공감을 부릅니다. 어휴. 에피소드 하나하나 왜 이렇게 살아있어요. 감독님 말처럼 '아흔이 된다면 나는 어떤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고 있을까', 생기 넘치고 즐겁게 잘 늙어야 하기 때문에... 이쯤에서 이 책을 만난 것도 인연입니다. 고마워요.. 많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일용할 설렘을 찾아다니는, 사랑스러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야죠.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저는 저자 사인에도 악필인데... 아, 이 단정한 글씨. 고마워요. 거듭. 사인해준 감독님에게도, 기회를 마련하고 책을 선물해준 뽀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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