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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Nov 15. 2020

<노터리어스 RBG> 팬심 리뷰인데, 아쉽기만 하네요


RBG를 단지 유리천장을 부수고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합류한 여성 정도로 여겨선 안 된다. ACLU에서 여성권익증진단을 공동으로 출범시켰으며.. 사회 변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점진적 전략을 신중하게 고안한 인물.. 남성이 여성과 손잡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세상, 여성의 평등 위에 성적 자유와 임신 및 출산의 자유가 뿌리 내린 세상을 꿈꾸었고, 그런 세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투해왔다. 남성 해방부터 돌봄 제공자의 가치를 인정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RBG가 품은 이상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RBG 가 기존의 생활양식을 따르는 단정하고 깔끔하며 말씨 고운 여성의 이미지를 풍기지 않았떠라면, 열혈 급진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27쪽)

책도 RBG를 단순한 인물로 보지 말라고 하듯, 그에 대해서는 기득권으로부터 약자를 지켰던 위대한 판사 라는 류영재 판사의 시사인 기고를 비롯해 설명이 더 필요할까 싶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건 제 착각이었어요. #트레바리 #기막힌논픽션 10월 책으로 함께 읽었는데, 멤버 절반 정도는 RBG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고 합니다. 몇 년 전부터 RBG에 열광해온 제 주변이 특이했고, 제가 좁은 세상에 살고 있는 거겠죠. 종신직인 연방대법원 법관의 보수 진보 비율이 5대 4인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 재임 중 6대 3이 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나이 여든에 팔굽혀펴기 스무 개씩 하며 버텼던 그가 떠났습니다. 끝내 바이든이 승리하긴 했지만, 연방대법원은 기울어진 균형은 미국 사회의 여러 규범을 바굴 수 있죠... RBG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 난리의 중심에 있게 된걸까, 그런 분들을 위해 강추하는 책입니다.

MSNBC 기자로 RBG를 인터뷰했던 아이린 카먼과 셔나 크니즈닉이 공동저자로 나오지만, 셔나는 로스쿨 시절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게 바치는 블로그 '노터리어스 RBG'를 만들어 세계적 열풍을 만든 그 주인공입니다. 아이린 말대로 둘 다 밀레니얼 세대. 자료를 조사하고, 책을 쓰는 과정이 그들에겐 두근거리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 뿐이 아닙니다. 전설적 래퍼 노터리어스 BIG 을 오마주하며, 각 장의 제목은 그의 노랫말에서 따왔고(저작권자 허락 받고요), 각 장의 제목은 여성 그래피티 리더 마리아 'TooFly' 카스티요가 써줬다고요. 저자가 서문에 썼듯, 여러 예술가와 창작자가 RBG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힘을 보탰다는걸 알 수 있는 그런 책. 인포그래픽이라든지, 사진 설명 하나하나 다정하고 따뜻해요.  봐요, 멋지잖아요...


1933년에 태어난 그의 삶은 고비고비 역사입니다. 그에 앞선 시대도 그래요.  "자신들의 무리에 여성이 합류할 경우 사임하겠다는 뜻을 내비쳐온 남성 대법관들은 어쩐 일인지 계속 자리를 지켰다." 1981년. 별로 놀랍지 않지만, 미국의 연방대법관들은 자기들 동료로 여성을 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군요ㅎ

2007년 쯤, 법조 기자단의 1진들만 모여있던 대법원 기자실에서.. 당시 법조 현장반장이던 제가 조만간 그 기자실에 합류할까 걱정들 했다고 들었어요ㅎㅎ 여자 없는 공간에 여자 들어오면 불편하다고요. 이후 제가 기자를 그만두는 바람에 상냥하게 인사할 기회를 놓쳤네요ㅎ


"나는 급여를 적당히 받아야 공평하다더군요. 남편이 퍽 좋은 일자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1959년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는데 애 먹었다는 RBG. 1963년 럿거스대 로스쿨 정교수로 취임할 때 대학 총장의 저런 말씀ㅎㅎ  (이후 여성 교수들과 힘을 모아 대학을 상대로 성차별적 급여체계에 관한 집단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까지 끌고 간 끝에 마침내 승소했다고요!)

남편이 어떤 일을 하니, 어쩌고 하는 얘기는.. 저 에피소드 이후 반 세기가 넘은 2020년에도....


"대법원은... 여성을 보호하는 판결을 내린 척한다" ... 이것은 무려 2007년 RBG 멘트.

 


그는 때로 과격하고, 때로 온건해 보입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깨우침을 얻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대개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진정한 변화란 한 번에 한 계단씩 일궈나감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했다는데, 정말 끈질기게 싸웠을 뿐입니다. '말투는 단조롭고, 때로는 머뭇거리기도 하지만, 언제나 정확하다. 옷차림은 보수적이다', 튀지 않는 편을 택했지만, 점점 돋보이는 건 그의 운명.

"나는 내 성별을 근거로 나를 우대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다. 당신들의 발로 우리 여성들의 목을 더 이상 짓누르지 말라. 이것이 전부다. (66쪽)


이 유명한 멘트가 나온 상황은... 이 특출한 남성 판사들은 이제껏 스스로를 훌륭한 아버지이자, 선량한 남편이라고 여겨왔다.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바깥세상의 온갖 추잡함과 곤경에 델 일이 없는 것이 여성에게는 행운이라고 믿었다. 그런 대법관들을 상대로 마흔 살도 안 된 젊은 RBG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지위를 누려 마땅하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했다. (65쪽)


"오늘날 투표권법 파괴에 앞장서는 자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오만"... 보수 대법관들이 선을 넘고야 말았다고 덧붙이며 한 말. (17쪽)  이 책이 정말 좋은건.. '나는 반대한다'며 꿋꿋하게 소수의견을 낸 RBG의 말이 어떻게 역사가 됐는지 친절하게 정리해주는 점입니다. 평생 난해하고 잘난 법조계 언어 대신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쓰려고 애썼던 RBG가 좋아했을 것 같아요. 좋은 책은 사서 보시라고, 일부만 인증샷.


그리고.. 변론취지서라든지 소수의견마다,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달아준 책. 훌륭하다니까요.


연방대법원 구성과 면면을 소개한 이런 짤, 진짜 세심해요ㅎㅎ


작심하고 뽐뿌할 책이라 저도 친절하게 옮겨놓는 거라 해봅니다. 사실, 이 책으로 독서 토론을 이끌기에는.. 제가 그리 전문가는 아닌지라, 공부도 좀 했습니다. 도움되는거 다 옮겨보면.. 팟캐스트 아메리카노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미국이 왜 그리 난리인지.


이건 딸과 들었는데 딸이 경악했어요. 연방대법원의 최근 판결인데, 성소수자 차별 금지가 최근에야 인정받았다는데, 그동안 미국도 후진국이었다는데 놀란거죠. sex에 대한 차별 금지가 명문화되어 있긴 했는데, 1960년대 법안이라 그건 남녀 문제일 뿐 성소수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왔다네요. 그래서 동성혼이 합법화된 이후에도, 성소수자 커밍아웃하고 회사에서 해고되더라도 대응하기 어려웠다고요. 이제야 인정받은거죠..


제가 독서토론에 가지고 간 발제문은 이렇고요. 기록용!


<노터리어스RBG>

그에 대한 경외>
- 인간적으로 어떤 모습이 가장 멋진가요? 그의 태도? 전술? 작은 유머감각?
- 나의 상사라면, 이럴 때 힘들었을 것 같다는 순간이?
- 나라면 어땠을까,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혹은 다르게 했을 것이다 같은 순간은요?
- 가슴에 담아두고 싶은 그의 말이 있어요?

법치에 대한 생각>
- 미국식 연방대법원(종신제, 보수진보 임명 이슈 등)이 최선일까요?
- RBG 소수의견 중에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요? 현안에 대해 우려되는 부분이 혹시 있나요?
- 법을 통해 바꾸고 싶은 무엇인가 떠오르나요?
- 한국의 법관 중에 혹시 떠오르는 분, 기억나는 판결이 있나요? 한국의 대법원은 왜 신뢰도가 계속 떨어질까요?


토론에 앞서, 몇 몇 글을 우리 클럽 멤버들에게 공유했습니다. 그대로 참고 삼아 올려놓습니다...

<참고> 대법원과 검찰과 정의당은 신뢰도가 떨어진 예외 세 곳이다. 신뢰도 조사 초기인 2009년만 해도 대법원은 국가기관 중 단연 높은 신뢰도를 자랑했다. 이 해 대법원 신뢰도는 5.35점이었고, 이것은 11년 후인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국가기관 신뢰도 최고점이다(청와대 제외). 그러던 것이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법원이 정권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한다는 의혹이 거세졌다. 박근혜 정부 들어 대법원은 내리 4점대를 기록하다가,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파동이 불거진 2018년에는 3.42점으로 추락했다. 2019년 조사에서는 4.35점으로 올랐으나, 올해 다시 4.01점으로 떨어졌다. 사법농단 여파가 남아서일까? 그보다는, 대법원에 대한 신뢰가 이념 성향에 따라 크게 갈렸기 때문이다…특히 대법원 신뢰도가 정권에 따라 이념 편차가 크게 나기 시작했다. 좋은 징후는 아니다.


<참고> "과연 그 시대에 훌륭한 판검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눈앞의 고문과 학살을 몰랐을까? 피고인들은 목숨을 걸고 고문당한 사실을 알렸다. 판검사가 눈만 크게 뜨면 어디에나 진실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공소제기와 유죄판결이 이어졌다." (606쪽)
1982년 유태흥 대법원장은 지체장애 지원자 4명을 법관 임용에서 탈락시키면서 “신체가 비정상인 사람보다는 정상인 사람을 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발언해 거센 사회적 반발에 부딪쳤다죠. 이듬해 이들을 판사로 임명했다는데, '상식'을 바꿔온 세월이네요.
유태흥 대법원장의 이런 발언도 박제되어 오늘날 전해집니다.  “분단국의 현실에 비추어 사법부의 수장은 정치적, 공안적 사건에서는 정부에 협력해야 하고, 일반 사건에서는 양심적으로 소신껏 독립해 심판해야 한다.” (553쪽)


<참고> 류영재 춘천지방법원 판사는 법관 경력 9년차인 젊은 법조인이다. 그는 최근 ‘힘의 역전’을 주제로 열린 제1회 메디치포럼에서 ‘사법권력에 대한 국민의 통제, 가능할까’라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는 사법개혁의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한 뒤 “우리 국민들이 (사법개혁에) 관심을 가져야 10년, 20년 후에 사법농단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표 말미에는 법원 권력을 향한 직언(直言)을 쏟아냈다. “판사가 회사원이 돼선 안 된다”, “판사가 법원장 눈치를 볼 게 아니라 시민사회, 시대정신, 재판 당사자를 의식해야 한다”, “군부독재시대에 행해진 고문과 민주화운동의 많은 희생에 관해 법원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사법권력 분산과 관련해선 “우리나라처럼 대법원장이 많은 권한을 행사하는 나라가 없다”고 역설했다.


책이 맘에 들어서, 무엇보다 RBG에 대한 존경으로.. 훨씬 근사하게 리뷰를 남기고 싶었지만, 밀린 숙제 해치우듯 뚝딱 하게 된 건 모두 제 잘못. RBG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와있지만, 이 책 좋습니다. 잘 살아야겠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지치지 말아야겠다, 이런 종류의 마음 다짐에도 좋습니다.


9월19일 제 포스팅


19년 제가 별 다섯 줬던 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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