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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Apr 25. 2021

<착취도시, 서울> 불편한 풍경을 제대로 봐야하는 이유


"서울에서 나고 자라는게 특혜란걸 모르겠죠." 
차도녀 인상의 ㅅㅇ님은 이른바 지방 사람. 이 책은 자신의 그 시절과 고스란히 겹칩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반지하 생활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또렷합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ㅎㅈ님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트레바리 #기막힌논픽션 21년 4월 책. 멤버 다수가 좁은 방을 전전하던 시절을 공유했습니다. 독서모임을 함께 했어도, 그동안 나누지 않았던 말들과 기억이 쏟아졌습니다.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가 쓴 '지옥고 아래 쪽방' , 그리고 '대학가 新쪽방촌' 시리즈는 2019년 온갖 기자상을 휩쓴 보도입니다. 누추하다는 표현으로 부족한 비인간적 공간이지만, 평당 월세로는 아파트보다 비싼 쪽방. 그 수익은 '빈곤 비즈니스'에 나선 타워팰리스 거주자들이 챙겨간다는 보도였고, 작은 집을 쪼개고 또 쪼개서 '新쪽방'으로 만들어 청년들에게 장사하는 대학가 풍경을 그렸습니다. 책은 지면에 나가지 못한 이야기까지 담았습니다. 얇은 책이지만 무겁습니다. 


당초 2월 모임 책인데, 코로나 탓에 계속 모이지 못했고 결국 4월 줌모임. 제 발제는 이렇습니다. 

<착취도시, 서울> 


1. 가난과 불평등에 대하여 

- 빈곤 포르노와 쪽방촌 논픽션은 어떻게 다른가요? 우리는 언제부터 가난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게 됐을까요?

-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제한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 불평등 해소를 위한 '연대'가 가능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당신의 부담이 늘어난다면요?

- 각자도생으로 밀려나고, 개인이 책임지는 사회가 지속가능하려면요? 


2. 도시의 미래에 대하여 

- 쪽방촌, 신쪽방촌은 편법과 불법를 넘나듭니다. 처벌과 규제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시장의 논리라는데요? 

- 주거권, 행복추구권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까요? 

- 지방소멸과 서울공화국 문제가 위정자의 책임이라고 하지만, 선출직은 기득권을 옹호합니다.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요?

- 저출생, 도시문제, 세대갈등은 모두 맞물려 있어요. 어떻게 보세요?

저자는 고시원 화제사건 취재 당시쪽방촌을 찾습니다. 스스로 고백해요. '건조하고도 폭력적이며 일방적인 질문들'을 던졌다고요. "온통 관심은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이 공간이 얼마나 열악한지에만 쏠려 있었다. 방은 얼마나 좁은지, 춥기는 또 얼마나 추운지, 불이 난 것을 목격한 적은 없는지. 고시원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곧 들이닥칠 겨울이 얼마나 두려운지. 생계는 어떻게 이어가는지. 집값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외롭지는 않은지. 멀쩡한 집에 살고 싶지는 않은지.." (31쪽)


단순히 가난하고 불쌍한 삶을 취재로 소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무렵, 다른 팩트들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 골목에 있는 쪽방 건물은 모두 우리 집 주인 거... 그 가족들은 돈을 모아 근처 역세권에 빌딩도 하나 세웠다니까요." (47쪽)

저 한 마디가, 그 동네 등기부등본을 다 떼도록 만들고, 이름을 하나하나 대조하고, 다른 자료와 교차 검증해 쪽방촌 실체를 드러내게 만들었습니다. 노숙과 주거의 경계에 놓인 쪽방이라는 최저 주거 전선에서 '가족 비즈니스' 형태로 월세 장사가 이어지고 있다니. 그야말로 고장나고 병든 자본주의의 민낯을 보는 기분.(54쪽)


이 논픽션이 귀한 건, 단순한 풍경 스케치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자 고백처럼 '가난은 미디어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구조까지 세상에 드러내어 보인 적은 많지 않습니다.'(6쪽) 


법은 '최저 주거 기준'이라며 14제곱미터(약 4.24평)의 면적까지 제시합니다. 2015년 제정된 이 법은 '물리적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쾌적하고 안정적인 주거 환경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주거전선 쪽방 앞에서 최저 주거 기준은 무력하다. 집이 아닌 비 주택으로 분류되는 쪽방은 법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제대로 된 정의조차 없습니다. (36쪽) 저자는 쪽방에 대해 '살아서 들어가는 관'이라며 보통 3제곱미터 전후의 방이라는 설명을 붙였습니다. 

판잣집, 비닐하우스, 달방(여관, 여인숙의 월세방), 고시원, 쪽방 등 비주택에 사는 가구 수는 2015년 39만3792가구. 10년 전인 2005년 5만7066가구에 비해 7배 가까이 폭증했습니다. (37쪽) 평균 평당 임대료 18만2550원. 서울 전체 아파트 평균 평당 월세인 3만9400원의 4배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법 바깥에 있으니 대부분 무허가. 세금도 내지 않습니다. 장애인에게 세놓고, 장애인 연금, 기초생활수급비를 탈탈 털어가는 사연도 기막힙니다. 대학가의 신쪽방촌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방을 쪼개고 쪼개서 더 작게 만들어 월세를 몇 배로 챙겨가는 구조. 역시 불법입니다. 걸리면 시정 명령을 받고 이행강제금을 내야 하는데, 월세 수익이 훨씬 많습니다. 최근 방을 구하러 다닌 S는 "부동산에서 주민등록 이전을 하지 말라는 집주인 요구를 제시하더라"고 했습니다. 사람 사는 곳으로 등록되는걸 피하는 거죠. 청년들은 '을'로서 그런 요구도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고요.

청년들에겐 사실 기숙사가 더 필요합니다. 인구 감소로 입학 정원이 줄었나 했지만, 중국 등 유학생이 늘면서 기숙사와 인근 주거 상황은 더 열악해졌습니다. 신쪽방촌 주인들은 자신들의 비즈니스를 위협하는 기숙사 신축에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정치인들은 이들과 결탁하여 이익을 지켜줍니다. 청년 임대주택은 '빈민아파트'라 폄훼합니다. '잠재적 범죄자', '방탕한 청춘'으로 몰아가죠. 행복기숙사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 목소리입니다.

"딸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행복기숙사 소식에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이 성범죄입니다. 주거지역에 상업성을 가진 기숙사 시설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젊은 층 대거 유입으로 주거 환경이 열악해지면 성폭력 사건이 다발적으로 일어날 확률이 큽니다."
 (133쪽)

장애인 시설, 2030의 거주지에 대한 이런 반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쪼개지고 또 쪼개진 신쪽방은 살만하지 않습니다. 햇빛을 바라는 건 사치이고, 최소한의 공간이 안 나와요. 청년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집에 살면서 세입자로서 임대인에게 개선을 요구하기보다는 카페, PC방, 도서관, 술집 등 바깥으로 나돌며 자발적으로 '집의 외부화'를 실천하는 온순한 세입자들'입니다. 코로나 탓에 이 구조가 무너지면서 더 많이 고통받을 수 밖에 없었죠.

경제적 이익에 눈멀어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윤리 없이 기숙사 신축을 반대하면서도 청년들의 고혈을 빨아 부를 축적하는 '신쪽방' 건물주가 존재한다.. 고통받는 청년의 귀에 맴도는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경구. 그리하여 버티고 정신승리하는 것은 청년 개인의 몫... 세상이 얼마나 가혹하게 청년들을 각자도생과 자력구제로 내모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 피라미드 한 층을 올라서가는 누군가에 대해 얼마나 윤리적으로 무딘지.. (191쪽)


가난을 능력 탓으로 돌리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 출발부터 다르고 격차를 좁히기 어려워진 것을 이제 모두 압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을 무심히 내뱉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외국의 슬럼과 달리 우리는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의 사람들이 투명인간처럼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가난이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법이 제대로 주거권 등 인간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봐야 합니다. 

저자가 만난 청년들은 고충을 말하지만, 절망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저자 말대로 무슨 거창한 청사진이 있는 것처럼 '자신은 다 계획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고작 열거하는 것은 집의 너무나 기본적 조건인 것들. 햇빛, 부엌과 방의 분리, 면적... 가난을 숨기는 게 미덕인 사회에서, 자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직시하게 만드는 질문은 불편한거죠. 

기막힌논픽션 클럽 멤버들의 이야기는 도대체 감도 오지 않는 해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거 어려운 문제 맞죠. 단번에 해결될리 없습니다. 다만 서울대를 비롯해 대학의 지방 이전 밖에 답이 없다, 지방소멸과 연결해서 주거문제를 봐야 한다는 말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시사인 '빈집' 기획보도를 보면, 문제는 더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지역에 어떻게 일자리를 만들고, 로컬의 역전을 만들어내느냐. 저는 '힘의 역전' 당시 김경수 지사의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이 떠올랐습니다. 대학 개혁을 통해 지역의 체력부터 키우는 건데, 이건 과연 가능할까요? 토론의 갑론을박은 다들 짐작하는 정도...


규제와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면, 이기적 집주인 대신 청년을 보호하면 나아질까요? 저자 고백처럼, 그나마 대학가 청년들 얘기입니다. 그 울타리 바깥의 청년의 삶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토론은 우리가 과연 집주인의 욕망을 남 얘기로만 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돈 버는게 죄인가요? 최소한 탈세와 불법은 않도록 강력 처벌해야 하는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이런 현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다른 이들과 공감을 넓혀나가는 것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곁에 있다는 것'.. 다시 한번 시사인의 보도를 인용합니다. 


"가난이 부끄러움이 된 사회에서, 행여 가난의 냄새가 새어나갈까봐 온몸을 꽁꽁 감싸고 다녔던 지난날. 하지만 저는 빈자의 이야기를 씀으로써 저를 속박했던 가난에서 해방됨을 느꼈습니다. 기자로서도 '나' 스스로를 인정하며 살아가는데 전환점이 된 보도"(7쪽) 라고 합니다. 

이 모든 문제를 각자도생으로 떠넘긴다면, 공동체가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요. 불편한 진실을 인지하는 것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최소한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책, 이 놀라운 작업에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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