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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Feb 25. 2022

<제주 여행> 친구와 둘이 뭘해야 잘 놀았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 이해했습니다.
언제 갈까. 딱 한 마디 던졌어요. 조금 밍기적 버티던 친구가 결국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뭘 할지 서로 묻지 않았어요. 그냥 좀 걷자는 정도. 우리는 치밀하게 계획적이지 않아요. 상황에 대응하는 순발력,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력은 어느 정도 훈련된 인간들인 것도 맞죠(항상 잘한다고 말한거 아님.. 아유 구차해). 둘이 함께 한 세월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길다는 걸 이제 알았을 정도로 둔한 인간들이기도 합니다. 베프라면서 둘이서만 여행은 처음이었어요.

토막토막 포스팅을 합쳐서, 오랜만에 시간 순으로.. 기록 남깁니다.

첫 날


맛집도 구상 없이 떠나는 인간이 아닌데 이번엔 그랬어요. 식탐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요즘 충전에 열 올리는 중이잖아요. 결국 닥쳐서 검색했는데 현장에서 여러번 실패. 놀랍게도 그때마다 급히 찾은 다른 집에서 즐거웠어요. 인생 모퉁이 너머 뭐가 나올지 모르는게 묘미라고, 제가 매번 하던 소리인데 말입니다. 새삼.


점심 무렵 제주 도착..

(1시 넘었길래 도전했으나..) 그리운 제주시 올래국수 40분 대기라니. 인근 검색해 #제주국담. 맑고 깊은 맛의 돼지국밥과 들기름 고소한 유지름국수 기대 이상. 친구가 집에 돌아가 들기름 국수 포부를 키우고 있으니 성공


숙소는 성산. 가는 길에 걸을 만한 곳으로 절물휴양림. 장생의 숲이라는 긴 코스를 걸어볼까 했는데 아이젠이 필요할 만큼 눈이 쌓였다고 불가. 결국 숲 안쪽 말고 휴양림 1시간 정도 산책. 그래도 삼나무 우거진 절물은 산책로가 단정하고 풍요롭습니다.


숲 대신 산책만 한 덕분에 예기치 않은 선물 같은 시간을 만끽. 성산 방향이라면 마침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죠. 그리고..

“모네 그림 본다고 이렇게 좋지 않잖아. 이건 너무 좋다. 너무 좋다. 너무 좋다"

너무 좋다는 말을 진짜 77번쯤 들은 듯.

#빛의벙커. 꼭 가보라는 얘기를 들은지 2년여 만에 드디어.친구는 모네 르누아르 샤갈 전이라는 제목에 별 기대 없었던 모양이지만 그림은 거들 뿐. 진짜 동굴 같은 벙커의 전시장에 입장한 순간 거짓말 같은 환상이 펼쳐졌어요. 빔프로젝터로 구현한 미디어아트에서 그림은 살아 움직여요. 그림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도, 좌우로 엇갈리는 유려한 움직임도, 음악과 맞물린 쇼도 미쳤어요. 르누아르의 여인들을 좋아하진 않았는데 그들이 옆에서 함께 춤추는 기분은 꿈 같아요. 모네의 양산 쓴 여인들이 움직이는데 함께 산책하다니.

(주로 비디오만 찍어서, 사진은 친구 딸기 컷)

클래식한 작품을 교과서에 박제하는 대신 새로운 영감으로 부활시키는 미디어아트. 거대한 스케일 자체가 작품을 다르게 만들어요. 벽과 바닥까지 이어지는 역동적 리듬에 정신이 혼미해져요. 멀미도 살짝 느낄 정도. 벽 가득 꽃이 피어날 때,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펼쳐질 때, 설레임이 공간을 지배합니다. 파울 클레의 빛나는 물고기 움직임은 경이로워요. 천천히 따라 걷다가 바닥에 앉아 즐기다가..어른을 위한 놀이터네요.


숙소 들어가기 전 저녁. 성산에서 허영만쌤 백반기행 나온집을 골랐는데 영업 않는다고요. 급히 검색해 바로 인근 #은미네식당. 돌문어볶음에 고등어구이 꽤 괜찮았어요. 역시 착한 동네식당


둘째 날


가성비 끝내준 숙소뷰.


사실 섭지코지는 최고의 절경.


성산 쪽 동쪽 바닷길은 예쁘다.


오랜만에 낮술 한 잔 하려고 2시간을 걸었다. 하아..


밑창 두꺼운 딸 신발을 빌려신고 왔더니 역시나. 살짝 컸던 모양. 뒤꿈치 까져서 양말에 피가 배었는데 쿨하게 반창고 밴드를 건내준 그는 오후 코스 구상 중. 아름다운 날.


종달리 골목길은 듣던대로 아기자기. 작은 골목길의 오래된 나무가 멋드러지고. 드디어 매화가 피었네요. 길가에 말리는게 한치죠? 오징어와 차이가 뭔지 대화를 나눠봐도 둘 다 아는게 없음.. 길 가 나무를 봐도 둘 다 아는 이름이 없고.. 오리는 온혈 동물인데 저 찬 바다가 왜 좋을까 궁금해도 답은 모르겠고.. 호기심은 많은데 아는게..

이진수님 댓글 = 이건 오징어로 추정됩니다. 한치는 몸피는 얇고 무엇보다 다리가 오징어보다 많이 짧습니다. 한 치, 두 치 할 때 그 한 치라는 뜻이라고...

그래도 #두가시앤오가니끄 카페에서는 클라쓰가 다른 구정은 기자의 우크라이나 정세 분석. 바이든과 푸틴의 외교 전술이 어떻게 다른지, 폴란드와 괌의 미국 핵 얘기부터 유럽의 러시아 의존 구조, 우크라이나 내분과 크림반도 얘기까지.. 책 좀 보는척 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시간. 뭘 물어도 배경을 술술 말해주는 전문가와 함께 하는 여행. 네. 단 둘이 호젓한 곳만 방역수칙 지키면서.


휴식 후 다시 걷기.

지미봉. 160m라고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 하지만 무슨 산길이 이 모양인지. 수직 직선 코스는 반칙. 원래 산길은 지그재그 구불구불 굽이굽이 뭐 그런 맛이지. 저질엔진 터질 뻔. 올래 21코스 일부입니다. 2코스 오조리, 1코스 종달리 거쳐 갔어요. 남쪽에서 올라가면 수직길이고, 북쪽 하산길은 그나마 좀 나아요. 360도 뷰가 끝내준다고 했는데 그건 팩트.

이날 2만8000걸음


친구가 돔베고기를 먹어본적 없다길래 10년 전 가봤던 옛날옛적 찜했는데 이전 앞두고 닫았다는 소식. 숙소 인근 재검색해 #가시아방국수. 고기국수 비빔국수 셋트에 곁들여진 돔베고기는 좋았는데 고기국수가 아쉽.. 그의 첫 고기국수로는..


셋째 날


전날 바닷길 걷는 건 바람과 싸우는 일이고 부질없다는 교훈을 얻었죠. 바람이 덜 부는 곶자왈을 가야겠다 결심하고 일단 길을 나섰습니다. 그래도 바닷길 지나다보니 잠깐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진짜 칼바람을 맞았습니다. 그래도 바닷물 차가운 기운 만져보고, 파도랑 놀기. 밀물인 것인지 파도 들어오는 선이 올라오는데 서로 이게 맞나? 갸웃갸웃. 알록달록 해초들이 추상화처럼 보여요.


제주 곳곳에 있다는 해녀상. 여성들의 강인한 생활력은 동서고금..이지만, 특히 해녀들의 육체적 노동강도는 최강이 아닐런지. 저 차가운 바닷물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쉴 곳도 돌바닥 밖에 없다니. 벽돌 안에 불피우는 곳은 있지만 어쩐지 슬퍼요. 몸의 곡선을 여성스럽게 둥글게 살린 조각도 괜히 슬프고요.


느지막히 출발했으니 일단 아점.

시골동네 상점들 틈에 눈에 띄지 않기로 했나봐요. 내비와 고객 후기들 없다면 장사 안될 작은 가게. 하지만 고사리파스타는 고소한 풍미가 좋았고, 흑돼지스튜파스타의 돼지고기도 뭉근하게 녹았어요. 직접 만든 티라미슈의 냥 마크는 감동. 사실 들어서자마자 온갖 냥이들 소품에 홀리는 집입니다. 당초 물색한 곳은 파스타 2만원대였는데, 이 집은 두 접시에 그 가격. 휴무 소식에 급히 3분 검색해 찾아낸 저를 칭찬. 착하고 예쁜 구좌읍 #그릉그릉파스타가게


식당에서 10분 거리가 1차 목적지인 비자림. 곶자왈 검색해보니 제주 동부 곶자왈로 꼽히더군요. 나름 유명 관광지. 문제는 진짜 관광지. 곶자왈은 야생의 비경이라 믿는 제게는 너무 정비가 잘된 숲. 울창한 숲의 기운은 그대로 전해지지만 그럼에도.


비자림은 1시간이면 충분해서 곧바로 더 달려서 교래휴양림. 선흘곶자왈(동백동산) 갈까 하다가 스케일 더 큰 곳으로 골랐어요. 친구에게 곶자왈이란 이런거, 보여주고 싶었어요. 덜 정비되고, 더 거칠고.. 다 좋은데, 제가 착각한 건 계절. 울창한 초록이 가득한 곶자왈만 보다가 나뭇가지 앙상한 숲을 만났어요. 비자림만 해도 침엽수인 비자나무를 비롯해 나뭇잎이 꽤 있었는데 교래의 곶자왈 나무들은 달랐어요. 그런데 이끼만 초록으로 빛나는 풍경은 또 다른 방식으로 몽환적 분위기를 만들더군요. 곶(숲) 자왈(덤불).. 역시 걸을 때 최고로 빠져드는 곳. 바람은 덜 불었으나 추웠던 것만 빼면 좋았죠. 친구가 보온병에 준비한 뜨거운 차를 마시며.. 저녁 일정 감안해서 곶자왈에서 이어지는 초지와 오름은 생략. 탁트인 초지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날은 1만7000보


저녁은 스페셜 게스트와. 제주도민 K님 저도 반가웠지만 친구의 30년 인연..이라 쓰고보니 우리들 연식이ㅠ 그가 고른 식당은 역시 영업 않고.. 인근 보통의 쫄깃 흑돼지 이어 숙소로. 저녁마다 술 없이! 가볍게 먹고 숙소에서 둘이 와인 홀짝하며 BTS 영상, 싱어게인 주행하는 음악힐링일정 와중에 이날은 수다수다수다.. 척 하면 착. 아 하면 어. 서로 다정한 응원들. 날카롭지만 속정 깊은 친구가 제게 정신차리라 해준 조언들은 과연.


넷째 날


어딜 가볼까 했지만 깔끔하게 포기. 우린 둘 다 프리랜서답게.. 친구는 원고 마감이 하나 걸려있었고, 저는 줌 강연이 예정된 날. 전날 원고를 시작했음에도, 소재를 갑자기 바꿀 처지가 되어버린 친구는 아침 일찍 일어나 글을 썼고요. 저는 강연에 참고가 될까 가져온 책의 한 챕터를 읽고요.. 오전은 그렇게 보내다가

아무튼 제주인데 성게미역국과 해물뚝배기. 평소 취향은 허름한 동네 식당이지만 찐 관광지에선 과욕. 깔끔하고 뷰 좋은데 채식 찬 등 음식이 입에 맞아 즐거운 한 끼. 섭지코지 #해왓


  강연은 13:30~15:00. 숙소 체크아웃 시간을 늦추고 방에서.. 식탁 의자에 앉았고, 하이체어에 책을 쌓고 놋북을 놓는 셋팅이었고..


괜히 기념 삼아 인증샷. 전직 뭐뭐뭐, 작가로 복귀해 그 얘기로 강연한 건 진짜 오랜만.

끝나자마자 비행기 시간 감안해서 곧바로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로 달려갔는데.. 인친 포스팅 보고 아라리오를 가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게 패착. 1시간만 보면 될 줄 알았는데 그런게 아니더만요. 동문모텔은 또 뭔가요. (아라리오는 탑동시네마와 동문모텔로 이뤄진 곳이란걸 그제야..)

시간 부족으로 미지막 일정 무산 뒤, 그래 친구에게 제대로 된 고기국수나 소개하자, 공항가기 전 늦은 오후 올래국수를 다시 찾았는데 영업 마감이 15시. 낭패에 급히 찾은 떡갈비집은 브레이크타임. 결국 인근 #장수물식당. 백종원님 방송 탄 작은 국수집인데 며칠전보다 훌륭한 고기국수. 돔베고기는 안된다더니 반접시 급의 서비스가 기본.


평소 여행가면 악착같이 삼시세끼 챙겼지만 이번엔 하루 두 끼. 허기진 속을 채우는 건 식탐이 아니라 편안한 우정이라 강조해보죠. 혼란의 시기, 힘 보탤 일은 또 있겠죠.

아미인 친구가 BTS 노랫말로 남겨준 글귀. 스물일곱 번의 여름과 겨울을 보냈다니ㅠㅠ 정말 어릴 때 만난 첫 직장 동료. 그대가 있어서 버틴 세월이 아득하고. 서로 일만 하다보니 언제 시간이 이렇게.. 이젠 잘 놀아야 하는데 그대 말대로 오래. 오래. 우리 뭘 해도 괜찮을거란, 즐거울거란 믿음과 함께.

I just wanna understand

Hello my alien

우린 서로의 mystery

그래서 더 특별한 걸까

스물일곱 번의 여름과 추운 겨울보다

오래

수많은 약속과 추억들보다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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