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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Jun 04. 2022

<이탈리아 1일차> 로마의 휴일, 그래도 팁


 1.
뜻대로 되는 건 없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는 걸, 종종 더 좋은 일이 벌어진다는 걸 우리는 알게 되지만 그건 후일담. 계획이 빗나갈 때마다 당황하게 마련이고, 우리는 인생의 묘미를 매번 새로 학습한다. 말하자면 인생 진리를 배우는 과정인데,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이란 깨달음을 얻기 좋은 기회다.
이번 여행은 도시와 숙소 외엔 구체적으로 정한게 없었다. 잘 먹고 잘 놀자고만 했다. 로마의 코스는 어디어디 가면 되겠지. 다들 바쁘다보니 별다른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난 백수 주제에 바빴고, 사실 마감이 임박하지 않으면 잘 안 움직인다. 그런데 갑자기 T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나, 로마에 온 단 하나의 이유를 꼽으라면 이거야!"
그게 그렇게 의미있는 것인지 무식한 내가 알았을리가. 보르게세 Borghese 미술관에 베르니니 Bernini 의 다비드, 아폴로와 다프네, 플루토와 페르세포네 조각이 있단다. 보르게세라는 이름도 처음 들었는데 교황의 사촌이면서 추기경. 17세기 조각가 베르니니를 전폭 지원한 덕분에 이름을 남겼다. 그의 조각은 뭐랄까, 그러니까 전설. 아폴로에게 쫓기던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하는 순간을 마법처럼 섬세하게 표현했다나. 또 플루토가 페르세포네를 움켜쥔 손 아래 움푹 들어간 피부 표현까지 생생하다니. 카라바조의 다윗과 골리앗도 있다고? 문제는 경유하는 이스탄불 공항에서 표를 알아보니 최소 5일 후에 가능. 우리는 그때 로마에 없다. 미술관 표를 구하지 못할거란 생각을 못했다. 미리 알아봤어야 했다. 마감이 이리 빠를줄 알았나.

팁. 혹 베르니니와 카라바조에 관심 있다면, 하루 300명 2시간 이내 투어만 가능한 보르게세 미술관은 반드시 일주일 전에 예약할 것. 검색하면 사이트 나옴. 다음달 로마 직항이 열리면 예약은 더 서둘러야.

아쉬운대로 이미지만

2.

이번 여행, 우리는 뭉치는게 첫번째 미션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취리히를 거쳐 온 S,  미리 출발해 카타르 도하를 경유한 V, 이스탄불 찍고 온 나와 T. 로마공항에서 드디어 넷이 만났다. 공항에서 시내 숙소까지 택시비는 고정 50유로. 택시 라인의 가장 앞 차는 작았다. 로마는 소형차의 도시였다. 문제는 우리의 짐. 젊은 택시기사는 작은 트렁크에 여행가방 네 개를 테트리스 퍼즐 맞추듯 넣었을 떄 우리는 미라클을 외쳤다. 그도 5유로 팁에 활짝 웃었다. 출발부터 좋잖아? 원래 첫날은 우리 만나기만 하면 된다고, 별다른 계획이 없었으나 T의 외침 덕에 첫 일정이 생겼다. 혹시 현장에서 표를 구할 수 있을까, 보르게세부터 가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20분. 미술관을 못 가더라도 보르게세 공원도 좋다고 했다. 안되면 산책이나 하지. 이스탄불 공항에서 암담한 표정을 짓던 T는 사실 공항의 근사한 점심에 마음이 풀어져 괜찮다 했지만 그래도 가봐야지. 그리고 인생 참 알 수 없다.

 

3.

오후 5시에 어슬렁 나간 우리의 여행 첫날은 결과적으로 완벽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숙소 부근의 공화국 광장에는 큰 감흥이 없었지만 걸어가는 길의 로마다움에 반해서 우리는 금새 흥분했다. 건물은 예쁘고 웅장했다. 미국 대사관은 뭔 건물을 이렇게 많이 쓰나, 어, 웨스틴 호텔과 메리엇 호텔 건물도 예쁘네,

건물 구경하며 느긋느긋.

피아자 델 레푸블리카

보르게세는 입구부터 웅장했다. 뉴욕 센트럴파크보다 더 편안하고 호젓하다고 할까. 깊은 숲 곳곳에 누워 있는 로마 시민들의 한가한 모습에 우리까지 덩달아 편해졌다. 물론 보르게세 미술관은 현장 티켓 따위는 없었다. 5일 이내 티켓은 다 팔렸다고 했다. 그래도 물어봤으니 됐다. T를 비롯해 우리는 그다지 미련은 없었다. 할 수 없지. (이건 다음날 다시 좌절을 준다만..)
팁 : 여행 일정이 잘 안 풀리더라도 대충 어슬렁 나가자. 그럼 새로운 길이 열린다. 일희일비 하더라도 일단 즐거움부터 챙기자


4.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어떤가. 보르게세 공원에서 우리는 ‘로마의 휴일’을 즐겼다. 여행자에겐 날마다 휴일. 올리브그린 색의 나무는 울창했고, 아카시아 향기가 짙었다. 예쁜 꼬마, 귀여운 큰 개를 만나면 가벼운 농담을 나눴고, 산책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다들 구하지 못한 표는 금새 잊었다. 나무 그림자 사이로 햇빛은 눈부셨고,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다. 완벽했다니까. 그리고 일정은 어느새 전문 가이드가계획한 마냥 술술 이어졌다.


지도에서 보르게세 공원에서 가장 가까운 명소는 포폴로 광장. 어슬렁 가다보니 로마를 한 눈에 내려볼 수 있는 전경이 나왔다. 공원은 한적했는데 갑자기 관광객이 많네? 부랴부랴 지도를 열심히 살펴보니 핀초 언덕. 멀리 바티칸이 보였다. 피렌체 두오모도 아닌데 로마를 이렇게 볼 수 있다니.


프로포즈 하는 남자가 반지를 꺼내는 순간을 목격했다. 누군가에겐 평생 잊지 못할 장소로 꼽은 곳이구나. 길을 가다보니 포폴로 광장이 또 한 눈에 보였다. 광장은 이렇게 위에서 봐야 제맛이지.
팁 : 포폴로 광장은 이 순서로 보시길. 아래 내려가서 위를 올려보면, 절대 올라갈 생각은 들지 않는다. 너무 높잖아. 순서는 위에서 아래로.


광장 둘레에 왠 스핑크스? T가 무심히 말했다. 저 오벨리스크가 이집트에서 뺏어온 거겠지. 막 찾아보니 기원전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 맞다. 오벨리스크 옆 분수의 물은 차가워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물장난은 어른도 좋다. 광장 입구의 산타마리아 미라콜리 성당에 들어갔다. 나는 작은 성당에 몇 분이라도 머무는 걸 좋아한다. 카톨릭이 아니지만 살면서 경건하고 겸손하게 뭔가를 갈구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자주 오는게 아니니까. 근데 별로 유명하지 않은 성당도 왜 저렇게 멋진걸까.. 로마에는 200개의 성당이, 이탈리에는 3.5만개가 있다고 한다.

 

5.

어느새 관광객들 사이에서 골목을 걷다가, 큰 길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호젓한 식당을 발견했다. 사람 적고 딱 영화 속 분위기의 테이블. 메뉴 탐색 전문가로서 페투치니 포르치니(13유로), 라자냐(11유로), 비스테카 디 만조(20유로)를 주문했다. 와인은 전문가 S가 편하게 골랐다. 두번째 병은 편하게 하우스 와인으로 주문했는데 어라, 가게 이름이 라벨에 붙어있다. 뭐지? 뒤늦게 검색해보니 1920년에 시작한, 100년 된 알 반타지오 Al Vantaggio 식당. 와이너리가 있단다. 이 하우스 와인이 무려 12유로다. 우리는 아예 한 병을 더 사서 나왔다. 페투치니는 생면 고소함에 기막힌 맛. 라자냐는 멋드러지는 모양새가 아닌데 그냥 엄청 맛있다. 비스테카는 이 가격에 이렇게 푸짐하다고? 넷이서 실컷 먹고 와인 세 병까지 총 99.5유로. 신났다, 신났어.
팁 : 비싸지 않은 하우스 와인 꽤 괜찮다! 계속 도전

 

6.

역시 먹으며 지도를 살펴보니 근처에 강변이 있다. 세번째 와인을 산건 사실 강가에서 따볼까 했는데 결국 숙소에서. 강변을 따라 걷는 건 어느 도시에서나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게다가 테베레 강은 걷기에 딱 좋은 사이즈. 다리에서 바라본 전경 역시 완벽.


이제 슬슬 숙소로 돌아가자고 경로를 바꿨는데, 세상에. 트레비 분수가 우리 가는 길에서 한 블럭만 돌아가면 되네?
팁 : 지도만 잘 봐도 다 술술 풀린다. 구글 맵도 좋지만, 종이 관광지도 유용하다. 숙소에서 받은게 좋았다.


포세이돈의 위엄도 좋았지만, 옆에 말이 있으면 그라고 설명하는 T의 박식함. 늦은 저녁이지만 관광객들이 모두 신나서 사진을 찍는다. 낮보다는 사람이 적어 우리는 분수에 손 넣고, 분수대에 나란히 앉아 사진찍는 행운을 누렸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트레비 분수. 웅장하고 아름답다. 조각은 다 살아움직일듯 역동적이고, 거대한 건축 전체가 구석구석 정교하다. 동전이 없어서 던지지 못했다. 이번에 온 건 9년 전 던진 동전 덕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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