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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n 08. 2022

<이탈리아 5일차> 사기캐 토스카나에서 관광 대신 여행

로마 떠나는 날 아침, 주말 사전예약제 때문에 못 들어간 판테온을 찾았다. 8시40분쯤 도착하니 이미 분수대 한 바퀴 줄. 근데 9시부터 줄은 쑥쑥 줄어든다. 들어가서 으아아아.. 하고 나오는 곳이지. 9년 전 가장 강렬했던 곳이라 다시 가보고 싶었다. 기원전에 건축된 완벽한 돔. 경외감으로 숙연해진다. 나는 2000년 전 사람들의 흔적에 미쳐버린다. (다행히 이태리, 그리스, 이집트 순으로 가볼 것 같다..터키 언제 가보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도 그 아름다움에 흥분했던 판테온. 라파엘로는 아예 자신의 무덤으로 삼았는데, 그의 관을 보는 기분은 묘하다. 수백 년 동안 관광객들이 그를 이렇게 보게 될줄 알았을까? 딸기가 말했다. "오래오래 나 좀 알아보고 기억해달라고 예술하는 거잖아"

판테온에서 새롭게 인상적인 것은 아침 청소 풍경이다. 9시 다되도록 청소차가 시끄럽다. 차가 들어오지 못하니 돌길을 따라 수레를 끄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 밤에 도시를 치우고, 물건을 배송하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누군가의 노동을 무리하게 몰고 가지 않는다. 박봉에 올빼미가 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듯. 다들 출근할 시간에 함께 일하는 도시의 소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시끄러운게 좋은 곳은 또 있다. 판테온 가는길 트레비 분수 옆 골목을 지나는데 아이들의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꼬마들의 등교시간이었다. 관광지 옆 골목의 오래된 건물에 학교 간판이 붙어있다. 한 옥타브 높은 아이들의 소리가 마구 섞여 시끌벅적한데 그게 그렇게 좋더라. 노키즈존? 차별부터 가르치는게 무슨 권리라고.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동네에서도 아이들 노는 소리가 다시 들리는게 저릿했다. 아이들을 슬쩍 지나가면서만 봐도 희망이란게 꿈틀거린다. 그저 좋다.

판테온에서 멍하게 혼을 달래는 것도 잠시..숙소에서 짐챙겨 테르미니 역으로 10시까지. 소연과 진빈은 렌트카를 찾으러 판테온을 포기하고 출동한 상태였다. 고맙고 미안하지만, 또 갚을 날이 있겠지.


소연이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2003)을 본건 거의 20년 전. 해바라기 흐드러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에서 여주인공 다이안 레인이 충동적으로 버스에서 내리면서 펼쳐지는 얘기다. 평온했던 미국 도시녀가 갑작스러운 이혼 이후 삶의 상실감을 토스카나에서 다시 채워나가는 사연이랄까. 일단 영상이 끝내줬던 모양이다. 실화인데, 그 작가는 실제 코르토나 Cortona 라는 곳에 집을 사서 정착했다. 익숙한 일상에서 배신당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 자리에서 그걸 끝내 극복하는게 인간이긴 하지만, 완전히 낯선 어딘가에서 출발하는 것도 괜찮지. 빛나는 태양 아래서 초록의 포도밭이 이어지고, 늘씬한 사이프러스 나무 향기가 짙은 동네라면 또 다르겠지. 느리게 숙성한 치즈와 와인이 식탁을 행복하게 만들고, 매력적인 새 친구들을 사귄다면 또 어떨까. 이건 너무 비현실적인가?

소연은 십수년 만에 토스카나 여행의 로망을 이뤘다. 소연은 공들여, 아마도 기꺼이 즐겁게 토스카나 여행을 준비했다. 덕분에 나와 딸기는 아무 생각 없이 덩달아 토스카나를 만났다. 로마에서 한 시간 정도 북으로 올라와 만난 첫 도시는 토스카나 아래 움브리아주의 오르비에토. 내가 국제부 기자로 일할때 슬로우푸드, 슬로우시티로 기억하는 이름이다. ancient future 를 위해 nature, culture 를 보존하려고 했던 노력들. 그때 사실 패스트푸드 대신 오래 숙성한 음식들에 끌려 오르비에토Orvieto를 기억했는데, 실제 와보다니 나도 성덕일까.
차는 외곽에 주차하고 오르비에토 골목길 탐험에 나섰다. 어느새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고요함에 빠져 하늘과 길을 즐기는 것 외에 할게 없다... 는 아니고, 열심히 찍는다.


점심은 오르비에토 방식으로 숙성한 뭔가를 먹고 싶었다. 점찍어둔 식당에 한국 아저씨들이 있길래 우리는 괜히 피했다. 편하게 수다를 떨어야지. 15유로에 포르게타(돼지고기)와 감자,  브루케스타와 파스타 셋트가 있다. 각 셋트마다 와인 1/4병이 기본. 10유로 피자 하나 추가하고 와인 반 병을 느긋하게. 페친 추천에 따라 치즈파스타인 카치오에페페를 즐겨 먹는데 딸기 말을 빌리면 우동 사리 같은 저 면은 이 동네 전통면일까?
팁을 넉넉히 드려야지 했는데, 알고보니 corpeto(자릿세) 인당 2유로가 있길래 패쓰. 메뉴에 그런게 써있는걸 처음 봤다.


오르비에토를 사기캐로 기억하게 된건 저 골목 부터다. 건물 사이로 두오모가 보였다. 특이한데?


계단을 올라오니, 두오모가 웅장하다. 이건 무슨 양식이지?


앞모습은 또 반전. 밀라노나 피렌체 두오모 부럽잖게 화려하다. 이 작은 시골 마을에?
알고보면 1290년부터 300년에 걸쳐 만들어진 오래된 성당. 교황도 머물렀던 곳이다.


독특한 양식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조차 특이하다.


여기서 눈길을 잡은 벽화. 저때는 다 남자 뿐이구나. 저 둘은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여자는 진정한 인간이 아니었으니, 사랑도 역시 남자들끼리. 고대 로마 동상들이 옆에 소년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은데 로마는 공부해본 바 없고, 그리스는 최소한 그런 사랑이 일반적이었다. 나이든 현자와 젊은 청년 커플.


오르비에토 두오모는 옆의 박물관과 함께 입장료 5유로. 저 박물관은 도무지 정체를 모르겠다. 영어 표지판이 하나도 없다. 다만 여자 조각이 많다. 웅크린 자세조차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다. 소피아 로렌 사진이 나오는데 하여간에 이탈리아 하나씩 입력해서 번역해볼 의지까진 없어서 사연 모름.


나와 진빈이 박물관을 돌아볼 동안, 소연과 딸기는 상점을 돌아다녔다. 오르비에토를 떠날 무렵, 서로 새 우정을 기념하며 선물 교환식을 했다. 오르비에토 특산 장식품 목걸이를 사고 싶은데 둘다 망설이다가, 서로 그 정도 선물을 해줄 수 있지 않냐며 사서 주고받았다. 신박한 아이디어다. 1930년대부터 할아버지가 만들고, 이젠 브라더가 만든다는 가게 쥔장 설명에 안 사고는 못 배겼다나.
지나가던 길에 음악소리에 끌려 건물 들어갔다가 공연 리허설도 목격. 스텔라 첸과 이미경님이란 분의 이름이 보인다. 와웅.


오르비에토는 잠깐 들린 곳이고 소연의 토스카나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코르토나 Cortona. 바로 다이안 레인의 그 도시다. 실제 원작자인 프랜시스 메이어스는 소연이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출신이고, 코르토나에 불현듯 멈춰서 브레마솔레 라는 집을 덜컥 샀단다. 막막한 미래를 미리 걱정하는 대신 일상을 유지하면서 단단해지는 과정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Under the Tuscan sun(1996)'은 50개국 넘는 곳에 번역됐다니,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 위안이 되는 이야기였겠지. 바로 그런 곳 코르토나. 차를 밖에 세우고 아치형 돌문으로 들어선다. 오른쪽 사진은 나올 때 찍었다.


역시 중심 광장에는 성당이 있다. 로마에서 끊임없이 압도당한 덕분인지, 작은 마을의 소박한 성당에 더 마음이 간다. 계단 위는 에트루리아인이 만든 기원전 건물이라는데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성당 앞 와인샵은 1937년부터 영업한 곳이다. 2차 세계대전 때도 와인을 팔았을지 궁금하긴 한데, 하기야 사람들이 있다면 와인도 마셨겠지..

영화에서는 분수대에서 다이안 레인이 춤추는 장면이 그리 멋지다는데, 그 분수대는 촬영용. 그 광장은 현재 오른쪽 모습이다. 소연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다. 로마와 사뭇 다른 골목길의 정취가 좋다. 오르비에토가 은근히 활기가 넘친다면, 코르토나는 사실 한 골목 안쪽만 들어가도 시간이 멈춘듯 조용하다. 여기서는 누가 사는 걸까. 아랫쪽 포도밭과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이들일까. 빨래가 널려있는 집을 볼 때 마다 궁금궁금.


오르비에토에서 코르토나 가는 길, 다시 숙소로 가는 길 모두 절경이다. 토스카나의 태양이 서울의 그것과 다를리 없을텐데 쨍하다. 하늘이 무척 파랗다. 어딜 가나 새소리 외에는 조용하다. 우리는 뭘했냐고? 차를 빌렸더니 본격 시작됐다. BTS 노래를 듣는 건 나도 좋다. 그런데 왜 다들 떼창 분위기지? 나만 빼고 친구들은 모든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리고 어느 공연 때 뭐가 좋았노라, 온갖 에피소드를 얘기한다. 너도 곧, 여행이 끝날 무렵엔 다 따라부를 수 있을거라 한다. 으어어...
가는 길에 딸기가 찍은 사진들. 어쩜 저렇지...관광 대신 여행이다... 그저 웃고 노래하고 떠들고 즐기고.


소연이 토스카나 농가민박에서 3박을 할거라 했을 때는 별 생각 없었다. 예약 사이트의 사진은 그냥 홍보용이겠거니 했지, 사진보다 실물이 더 좋을 줄이야. 소연 덕분에 이런 곳에 와보는구나!
우리가 묵는 농가민박. 두개 층에 방 셋. 욕실 둘. 거실과 부엌도 완벽하고, 와인잔 등도 훌륭. 참고로 3박에 총 690유로. 최대 6명이 묵기에 적당하다. 친절한 안드레아씨가 뭐든 챙겨주신다. 뒷편에 보이는 몬테풀치아노에는 차량으로 데려다주고 데리러오신다. 와인 실컷 마시고 돌아다녀도 좋다는 얘기다.


이날 저녁은 인생에서 잊지 못할 호사였다. 맛도 로마의 좋았던 음식들보다 괜찮았고 가성비조차 믿기지 않는 수준. 와인 14유로. 햄과 치즈 브루케스타 플레이트 22, 트러플 탈리아텔레 15, 스테이크 16유로. 다만 스테이크 메뉴 하나 주문한게 3개 나왔다. 합쳐서 메뉴 셋 얘기했는데 직원의 영어가 짧았…몹시 친절했기 때문에, 그리고 기분이 워낙 좋아서 그냥 먹겠다고 했다. 화이트 와인은 물론, 낮에 본 코르토나 쉬라까지 와인 세 병은 마시고, 한 병과 남은 고기는 싸들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 저녁이 총 137유로. 맛있는 음식을 저렴하게 즐겼다는 말로는 이날 저녁을 설명할 수 없다. 포도밭 옆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우거졌고, 테이블 주변에는 올리브 나무가 은은하게 빛났다. 밤이 깊어갈수록 정원의 불빛이 더 아름답게 빛났고, 아이보리 커튼의 캐노피 아래에서 우리는 각자 영화를 찍는 기분이었다. 음악이 흐르는 밤, 어느새 정원에는 우리만 남았고, 기꺼이 스텝을 밟으며 와인에 젖어드는 시간.

(농가민박 외에 레스토랑만 별도 방문 가능. L'Oliveto )


나는 아직 아미가 아니지만, 딸기는 arminized 됐다고 놀린다. 0시라는 노래는 가사가 진짜 좋다. 친구들이 저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을 달랬다고 입을 모았다. 나 빼고 모두 바쁘고 치열해보일 때가 있고.. 맘은 구겨지고 말은 없어지고. 그럴 때가 있겠지. 그래도 0시에, 세상을 잠시 숨을 참는다니. 그렇게 우리는 또 하루를 보낼 수 있다니. 토스카나의 첫 밤은 내내 BTS와 함께 했다. 니들이 좋으면 나도 좋다.

그런 날 있잖아
이유 없이 슬픈 날
몸은 무겁고
나 빼곤 모두 다
바쁘고 치열해 보이는 날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
벌써 늦은 것 같은데 말야
온 세상이 얄밉네

Yeah, 곳곳에 덜컥거리는 과속방지턱
맘은 구겨지고 말은 자꾸 없어져
도대체 왜 나 열심히 뛰었는데-ㅔ
오 내게 왜-ㅔ Yeh

집에 와 침대에 누워
생각해봐 내 잘못이었을까?
어지러운 밤 문득 시곌 봐
곧 열두시

뭔가 달라질까?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래도 이 하루가 끝나잖아
초침과 분침이 겹칠 때
세상은 아주 잠깐 숨을 참아
Zero o'clock

And you gonna be happy
(Ooh-ooh) And you gonna be happy
막 내려앉은 저 눈처럼
숨을 쉬자 처음처럼

And you gonna be happy
(Ooh-ooh) And you gonna be happy
Turn this all around
모든 게 새로운 zero o'clock

조금씩 박자가 미끄러져
쉬운 표정이 안 지어져
익숙한 가사 자꾸 잊어
내 맘 같은 게 뭐 하나 없어

그래 다 지나간 일들이야
혼잣말해도 참 쉽지 않아
Is it my fault?
Is it my wrong?
답이 없는 나의 메아리만

집에 와 침대에 누워
생각해봐 내 잘못이었을까?
어지러운 밤 문득 시곌 봐
곧 열두시

뭔가 달라질까?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래도 이 하루가 끝나잖아
초침과 분침이 겹칠 때
세상은 아주 잠깐 숨을 참아
Zero o'clock

And you gonna be happy
(Ooh-ooh) And you gonna be happy
막 내려앉은 저 눈처럼
숨을 쉬자 처음처럼

And you gonna be happy
(Ooh-ooh) And you gonna be happy
Turn this all around
모든 게 새로운 zero o'clock

두 손 모아 기도하네
내일은 좀 더 웃기를 for me
좀 낫기를 for me
이 노래가 끝이 나면
새 노래가 시작되리
좀 더 행복하기를, yeah

And you gonna be happy
(Ooh-ooh) And you gonna be happy
아주 잠깐 숨을 참고 (참고)
오늘도 나를 토닥여

And you gonna be happy
(Ooh-ooh) And you gonna be happy
Turn this all around
모든 게 새로운 zero o'clock
 


이 글을 정리하는 부엌 창문뷰.. 멀리 보이는 몬테풀치아노는 6일차 일기에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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