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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n 07. 2022

<이탈리아 4일차>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이란

고대 로마의 정쟁, 보르미니와 베르니니


1.

믿지 못할 나의 기억 대신 기록한다. 하지만 빈곤한 어휘와 뻔한 표현으로 그 시간을 온전히 담기 힘들다. 고대 로마가 남긴 황량한 폐허, 찬란한 유산인 포로 로마노 Foro Romano의 느낌을 어떻게 남길 수 있을까. 이래서 다들 사진만 남기는구나.
그런데 어느새 내가 정리 담당이다. 소연과 진빈은 숙소 차량 예약부터 거의 모든걸 다 했다. 딸기는 사진을 찍고 지도를 본다. 나도 구글맵 좀 거들지만 우리는 모두 정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날마다 돌아다니니 어딜 갔는지 벌써 헷갈린다. 사진 정리도 만만찮다. 처음엔 너만 믿는다고 하더니 이젠 아직도 안 올렸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묻는다. 벌써 며칠 밀린거 아니냐 걱정해준다. 물론 나도 여행은 소재일 뿐, 당초 네 여자의 사랑과 우정을 정리해서 책이라도 내볼까 했다. 일하는 여자 넷이 모처럼 나왔는데 얘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다들 밝히는 걸 몹시 꺼리지만 진빈은 역사를 가르친다. 물론 유럽은 전공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딸기는 알고보면 옛날옛적 미술사 전공이다. 처음 여행지를 결정한 소연에겐 다 사연과 이유가 있다. 솔직히 같이 다니면 듣는 얘기가 쏠쏠하다. 정리는 내 몫 맞고, 내 취미이기도 하고, 기록 없이 기억 못하니 해야지. 근데 토스카나로 건너오니, 벌써 로마는 가물가물. 그 감동은 다 어디갔단 말인가. 밀리는 순간 숙제가 되고, 그건 안되지..


2.
일요일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하루 2만보 씩 걷다가 전날 3만보를 걸었더니 저녁에 발이 무거웠다. 아름다운 거리에 홀려서 무리했다. 피곤해지면 쉬는게 아니라, 그 전에 적당히 쉬었어야 했다. 무릎도 시큰하고 발병 나도 이상하지 않을 우리. 욕심 버릴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멀었다. 20대 여행자가 아니니까 피곤하면 젤라또나 먹으며 쉬엄쉬엄 다니자, 빡빡한 일정 같은거 잡지 않고 놀멘놀멘 편히 가자고 했는데 지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과했다. 로마는 여전히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었다.
이건 로마 탓이다. 과하다. 바티칸을 보다보면 이걸 다 모아놓았단 말인가? 하나하나 엄청난 것들이 그냥 줄을 선다. 3박4일 로마를 걸어다니면 모퉁이마다 흔한게 예술적 건물과 조각, 유물이다. 대단한 명소가 골목 돌면 또 나와버린다. 기대 없이 가다가 우연히 발견한게 알고보니 어쩌고, 이런 사연이 계속 생긴다.
 
 3.
9시에 문이 열렸다. 매달 첫 일요일의 혜택. 0유로라고 찍힌 티켓을 받고 들어갔다. 우리가 표도 구하지 못한 포로 로마노 공식 입구는 바글바글인데, 거의 반대편 새로 구성된 패키지의 입구는 한적했다. 갈매기 소리 외에 적막했다. 석벽 아래 통로는 서늘했고, 우리는 유적지를 천천히 걸었다. 3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왼쪽 오벨리스크 옆이 티켓 박스. 오른쪽 사진은 오픈 시간 기다리며 사람 없는 의자에 누워서... 음.


크고 웅장한 것은 그냥 경탄하면 된다. 2000년 전 사람들의 흔적이라면 경외하면 된다. 그리 했다.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 로마는 부서지고 풍화된 문명의 흔적이 곳곳에 즐비하다. 하지만 포로 로마노는 그 스케일과 아름다움이 다르다. 딸기는 내게 터키나 그리스, 이집트 가면 좋아서 쓰러질 것이라 놀렸다. 나도 그럴 것 같다.

https://youtube.com/shorts/OhKIWzdGnDM?feature=shar




4.
가장 인상적인 곳은 베스탈. 윗 사진 오른쪽 기둥은 불의 여신 베스타를 모시던 신전의 흔적. 왼쪽엔 신녀 베스탈들이 머물던 곳이다. 6~10세 귀족 여자 어린이 중 6명을 선발해 30년간 신전의 불꽃을 지켰다고 한다. 각종 면책특권을 누렸지만, 결정적으로 불씨를 꺼트리거나 처녀성을 잃으면 생매장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수녀나 승려는 본인의 선택일 수 있지만, 아이를 순결한 대상으로 만들어 사실상 제물로 삼는게 말이 되냐고 흥분했더니, 딸기가 노예보다는 나은 삶이었을거라 한다.


5.
기원전 7세기, 8세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해 고대 로마의 왕정과 공화국의 의회 활동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고, 정치, 사법, 상업 모든게 이뤄진 도시. 그 시절 수도도 갖췄다는게 가장 놀랍다. 로마는 곳곳에서 차가운 식수를 쏟아내는 식수대가 있는데 수도 관리 내력이 어마어마하겠지. 기술만 대단했던게 아니라 부를 위해 정복에 나서고, 노예를 늘리고, 정치도 장난 아니었지. 기원전 44년 시저가 '부르투스 너마저'.. 칼 맞은 곳도 여기다. 한해 수백 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도록 후손들의 먹거리를 만들어준 위대한 조상들이지만 권력 다툼은 요즘과 마찬가지로 치졸했다는 사실에 순간 괴로웠다. 이건 나아질 수 없는 걸까? 이토록 장엄한 인류 문명 앞에서, 사람이 겸허해지고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려다 말고, 그 조상들도 별 수 없었구나 싶은 깨달음이라니.


포로 로마노 전경은 미켈란젤로 광장 캄파돌리아 언덕도 좋지만 팔란티노 언덕이 더 낫다. 그래도 전자는 무료, 후자는 티켓팅 필수. 이걸 무료로 보다니 정보 확인한 소연 만세!

https://youtube.com/shorts/cEEiTX1gfnk?feature=share


포로 로마노까지 호기롭게 걸어갔지만 3시간 걷고 나니 기진맥진. 이전 3일간 7만보를 걸은 피로 덕에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택시를 타고 일단 숙소로 철수. 전날 과음에 따라 한번 갔던 중화루에 또 갔다. 국수의 국물이 속을 풀어주고, 생선찜 요리도 덮밥도 훌륭. 넷이 과식해도 50유로를 넘지 않는다.


6.

좀 쉬다가 쨍쨍한 햇볕이 누그러질 무렵, 다시 나섰다. 목적지는 젤라또만 먹고 지나갔던 나보나 광장. 진빈의 지인이 이 광장의 사연을 전해줬는데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타녜세 인 아고네 성당을 설계한 보르미니와 라이벌 천재 베르니니의 황당한 기싸움. 아네스 성녀를 모신 성당을 지었더니 베르니니가 못볼 걸 본 마냥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무너질까 팔로 피하는 분수대를 만든 것은 분명 도발이다. 보르미니는 차분하게 아네스 상을 만들어 대응했다지만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살의 직접 원인은 모르겠지만, 행복하지 않았나보다. 바로크 건축의 아버지라니, 17세기의 천재 베르니니에게 밀린건 당연하다는게 딸기의 보충 설명. 같은 선생에게 배운 둘은 왜 그렇게 못잡아먹어 으르렁댄건지. 천재는 자기 작품으로도 사심 분풀이한 것도 유적으로 남는다. 인간들이란.

보로미니의 성당도 사실 엄청난 작품이다. 베르니니에게 밀렸다고만 할 수 있을까. 신의 뜻만 내세우던 중세를 끝내고 인간의 화려한 욕망이 어딘가 꿈틀댄다.



7.
가까워서.. 진짜 로마의 대단한 유적들은 다 가까워서, 나보나 광장 본 김에 전날 실패한 판테온 주변 두 성당을 방문.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는 카라바조의 그림 3점이 있다. '성 마태오의 간택', '성 마태오의 천사', '성 마태오의 순교'. 어느 선량한 관광객이 2유로를 넣어 잠시 조명이 켜질 때 봐야 한다. 흑백 분명하고 강렬한 카라바조 작품은 어쩐지 빨려드는 기분. 화려한 세리들의 의복과 허름한 예수님이 대조되고, 대체 저들 중 누가 마태오일까, 누가 따라나섰을까 살펴보게 된다.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십자가를 쥔 그리스도' 상이 있다. 그의 조각은 살아 움직이는듯 근육이 팽팽하다. 예수님인데 좀 불경스러워 보였다는 그 시절 평가도 그럴만.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청동으로 그곳을 가려준 건 좀 아니지... 하여간에 왼쪽의 미켈란젤로 조각이 얼마나 남다른 작품인지는 오른쪽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다.


여행자에겐 먹는게 가장 중요하다. 이날 저녁은 관광객답게 최고 관광 명소 나보나 광장에서 보르미니와 베르니니를 바라보며 즐겼다. P님이 맛난 거 먹으라고 '옛다 용돈' 주신 덕분에 친구들에게 생색냈다. 아마 이탈리아 와서 가장 비싼 와인인 38유로. 자릿값이 물론 한몫했겠지. P님 친구들이 다 고맙다고 꼭 전해달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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