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comfort woman 라는 단어를 성노예, 특히 종군위안부는 military sexual slavery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1999년 유엔에서 나왔다. 전쟁 중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기지촌 위안부에 대해 정부는 책임이 없을까? 기지촌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오히려 조장했다면?
이땅에 공창제公娼制를 도입한 것은 일본이다. 여성을 비인격화하고 국가가 성매매를 공인한 역사는 1916년 그렇게 시작됐다. 식민지 지배 정책의 하나였다. 선교사들이 먼저 반발했고, 기독교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등장했으나 소용없었다. 공창제가 폐지된 것은 1947년 미군정청이 결정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 정부는 ‘한국군 위안부’를 설치했다. 군대를 유지 관리하는데 필요하다는 발상은 오랜 관행 탓이었을까? 1961년 정부는 다시 윤락행위 방지법을 제정했지만, 1962년 미군기지 인근 104개 지역은 성매매 단속에서 제외했다.
정부는 오히려 미군한테 성접대 잘하라고 교육했다.
”아가씨들이 서비스 좀 많이 해주십시오. 미군한테 절대 욕하지 마십시오. 바이 미 드링크(Buy me drink. 술 사주세요) 하세요. 그래야 동두천에 미군들이 많이 옵니다. 우리나라도 부자로 한번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에 대한 존중은 없었고, ‘달러 버는 애국자’라고 가스라이팅 한게 정부였다.
그 시절에도 공창이 뭐하는 곳인지, 위안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가는 이는 없었다. 공장에 일하러 가자고 꼬신 친구 따라 갔다가, 빚에 시달리던 친구가 자신을 팔아넘긴걸 알게 됐다. 일자리 찾다가 흘러들어간 여자들은 그런 곳인지 몰랐다. 매를 맞으며 마약을 먹으며 일을 배웠다. 먹고 자는게 빚이라, 두어달 일해서 갚으면 되겠거니 했지만 언제나 빚만 늘었다. 도망치면 잡혀와 반송장 되도록 맞았고, 경찰은 포주 편이었다. 국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성병 검진 도장을 찍어줬다. 수치스러운 검사는 비인격적으로 이뤄졌고, 도장이 없으면 수용소에 감금했다.
오래 전 기사를 읽는데 울컥하는 대목이 여럿이다. 2022년 9월, 대법원은 기지촌 위안부들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들이 국가 상대로 소송을 낸 지 8년 만의 일이다. 대법원은 95명에게 1인당 300만~7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단한 원심을 확정했다. ‘양공주’로 멸시받아온 세월이 위자료로 보상될 리 없지만, 그래도 국가 책임이었다고, 인정은 받았다. 국가가 조직적이고 불법적으로 기지촌을 운영한 것을 인정하는데 오래 걸렸다.
이 소송에 관여했던 친구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을게다. 어제 소식에도 축하 메시지만 던졌다. 그런데 친구가 2014년 포스팅에 남긴 사연과 관련 기사에는 평정심이 무너졌다.
”아직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 정부가 자행해 왔던 불법행위.
그로 인해,
반세기의 시간 동안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 소외계층으로 비참하게 살아야만 했던 미군 위안부들의 실상”
에 대해 그는 토로했다. 10여명의 변호사들이 함께 세미나를 거듭하면서 1년여 준비하고 소송에 나섰다.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 한 번 없었던 국가의 불법행위.
”승패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또 다시 이유도 알지 못한 이들의 돌팔매를 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회의 반응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과거와 상처들을 세상밖으로 꺼내는 용기를 내야만 했던,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그분들의 어려움과는 비할 수가 없다.”
그가 남긴 8년 전 포스팅에 걸려있던 기사다.
늦었지만, 대법의 판결을 환영한다. 오랜 시간 애써주신 분들에게도 감사하고,
더 오랜 세월, 모멸감과 수치심을 끌어안고 버텨온 분들께 미안하고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