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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Oct 17. 2022

<공정 이후의 세계> 이 주제가 어려워진 이유


공정은 시대정신이고, 최우선 가치다. 그런데 과연? 저자는 여기에 반기를 들면서 출발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손쉽게 내세워지는 공정이라는 가치는..보편적 가치로서의 공정, 사회정의를 확보하기 위한 필수원리로서의 공정과 거리가 멀다. ‘공정하지 않다’는 외침은 많은 경우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 억울함, 박탈감 등의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라고.


왜 공정인가. 사회가 불안하다. 10~30대 경제 활동도 구직 활동도 없이 쉬고 있는 청년이 78만명이다. 흔들리는 사회에서 박탈감과 불안은 커진다. 내 몫을 빼앗기고 있다는 억울함은 함께 커진다. 한때 ‘밀려난’ 백인 남성들이 스스로 피해자 정체성을 갖고 ‘피해 입은 특권’을 주장하던 시절과 비슷하다고? 이를 부추기는 것은 정치다. 억울함에 공감하는 척 갈등을 부추기는 거, 이젠 노골적이다.


결국 사회 변화에 따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공정한 경쟁’을 통해 각자도생하라는 주문. 저자는 1) 개인 책임 (네가 진 빚은 네 책임이지) 2) 각자도생 (나도 노력한거야, 너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어) 3) 고통 감내의 원칙 (나도 죽도로 고생했어. 너도 고생 좀 해야지)이라는 미국의 담론을 소개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은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외면하게 한다.


어떤 종류의 왜곡은 ‘담론적 폐쇄’를 가져오는데 우리의 공정이 여기 갇혔다는게 저자의 지적이다. 기득권 집단은 갈등의 실체를 은폐하며 ‘불공정의 수혜’를 입은 자들로 명명한 상대로부터 논의 참가 자격을 빼앗는다. 기존 불평등한 구조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 정당하다는 식의 ‘자연화’가 진행되고, 첨예한 이해관계를 묻어버리고 기득권의 주장이 이해충돌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포장하는 ‘가치중립화’까지. 공정이 폐쇄 담론이 되어버렸다는 주장과 함께 이런 식으로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니, 나로서는 몹시 설득력 있었다. 이게 도입부 얘기다. 책이 마음에 들 무렵, 이 책을 함께 읽은 모임 멤버가 분개했다.


”굉장히 당황스러운 책이네요. 무엇보다 책 전반에 걸쳐서 균형 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찾기 어려운 책입니다. 균형 감각이 없다 보니 책의 제목인 공정과 정의도 책 안에서 찾기가 어렵네요. 책을 읽어봐도 왜 저자가 이렇게 공정에 대해서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고요.”


‘공정 이후의 세계’는 공정을 넘어 정체성 정치로 가자고 하지만, 비현실적이고 분열적인 정체성 진보 대신, 시민이라는 보편적 가치로 현실을 바꾸는게 진보의 미래라고 그 분은 비판했다.


이 분의 당혹감 이상 나도 당혹스러웠다. 공정이란 가치와 담론이 최근 왜곡되고 있다는데 나는 공감했고, 균형 감각이 없다는 생각을 전혀 못해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책을 다른 관점의 분들과 함께 읽은 건 행운이었다. 사실 두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각각 읽었다. 평균연령이 대략 50대인 모임과 30대인 모임. 저자는 소수자 감수성과 정체성을 부각하는데, 50대 모임 멤버에게 불편했을까? 처음엔 아재라 그런가 했다. 그런데 30대 여성인 S님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 공감하지만, 사람들이 이 논리에 설득될까 싶다고 했다. (아재님들 미안요)


정리의 달인 청년 N님이 구세주로 등장했다. 공정에 대한 현재 담론의 문제점을 분석하는 건 모두 공감. 그런데 여기에 소수자 이슈를 더해서 정리하다보니 뭔가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차별의 ‘패널티’를 제거하는 것에는 공감이 쉬운데, 소수자에게 ‘리워드', 보상까지 더해주는 그림은 공감이 쉽지 않을거라 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소수자에게 더 분배하는 것이 공정 아닌가? 그러나 S님은 이런 질문을 가져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도 없는 이가 훨씬 많을거라 했다. 차를 바꾸거나 아파트, 재테크에 관심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공정 담론도 낯선데, 더 가면 힘들 수 있다고 했다. 세상을 조금 더 나아가게 하려면, 대중의 공감이 필요한거 아니냐, 그렇다면 조금 더 친절하게 정리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설혹 인국공 사태 관련, 누군가의 이기심을 비판할 수 있지만, 결국 그들과 함께 ‘공정 이후의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게 현실이다. S님은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을 읽은 뒤, 일단 “그래, 넌 윤정부를 지지한다고, 넌 문정부를 지지했다고, 알았어. 그걸로 붙지는 말고 서로 입장 인정하고 얘기를 더해보자"고 한다고 했다. 평행선을 달리는 이들과 함께 대화하는 법이란.


나는  저자가 공정을 넘어 정의와 돌봄을 고민하는 방향까지 격하게 수긍했다. 모임 어떤 분들은 나와 비슷했고, 어떤 분들은 뜬금없다고 했다. 현실성이 없다고 했다. 나는 저자가 모범답안과 해법까지 척척 다 내놓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도 공정을 착각 말고, 운빨 많으니 겸허해지란 주문이 전부였다. 능력주의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그 불평등체제를 ‘능력과 노력에 따른 분배’의 결과라며 정당화하는 가운데 발전한 이데올로기. 과거로 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한국의 유교 전통 역시 능력주의 기반 승자독식을 정당화했다. 그런데 줄어든 파이를 나누는데 사람들은 날카로워지고, 능력주의 너머, 공정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며 새로운 룰을 상상하지 못한 단계인 것 같다. 시험 점수 외에 줄세우는 길은 오답처럼 보이고, 시험을 준비하는 환경의 불공정함, 편법 탈법으로 세습되는 관행과 구조가 격화된들 뭐라 해본 적이 없다.


해법까진 아니더라도 ‘공정 이후의 세계’를 함께 상상하자고 초대한 저자에게 그래서 나는 고맙다. 교수답게 공정에 대한 담론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체계를 잡아준 느낌이다. 앞으로도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난감해질거란 불안함이 있다. 블라인드 채용이 왜 공정한 거냐고, 열심히 공부해 스펙 쌓으라는 사회 아녔냐고, 엄마도 노력해서 좋은 대학 가라고 한 거 아녔냐고 묻던 아들과 대화는.. “노력과 별개로 대치동 학원까지 다닌 학생들은 몹시 운이 좋은 편이며, 똑똑한 친구들과 잘 배울 기회까지 가졌으니 관문 기회 정도는 평등해도 되지 않겠냐”는 말로.. 이해는 하겠는데 공감은 어렵다는 정도로 마무리했다.


오케스트라는 한 때 백인 남성들의 왕국. 블라인드 채용 이후에야 여성들이 진입하게 시작했지만.. 히스패닉, 흑인은 여전히 극소수. 음악 교육 자체가 운 좋은 이들에게 집중된다면.. 패널티 외에 리워드까지 필요한게 아닌지. 그런데 다양성보다 능력주의를 우선하는게 나쁘냐는 반문에는.. 아아. 고민이 더 필요하다니까.


일면식 없는데, 저자의 동생과 인연으로 사인본을 받았다. 언젠가 서울 오실 때 따뜻한 밥이나 차를 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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