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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Apr 10. 2023

<스페인 1일차> 남편의 쓸모, 남편의 재발견을 위해

#남편을_데리고_사는_이유 한때 진지하게 생각했다. 잘 모르겠더라. 그 무렵 남편이 잘나갔는데, 그게 오히려 문제였다. 사회적 성취가 부부 관계의 성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곤궁함이 관계를 망칠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성공은 가정의 평화에 기여하지만, 부부 관계는 고차방정식이다.


당시 나는 스타트업 한다고 바빴다. 남편 역시 회사 살린다고 바빴다. 서로 얼굴 보기 힘들었다. 주중에 우리는 둘다 늦은밤 귀가했고, 주말에 그는 골프 접대에 매진했다. 틈나면 둘의 관심사를 얘기했지만 미디어 토론은 일의 연장선이고 틈도 적었다. 대화든 수다든 딴거든 모조리 부족했다. 부부의 내밀한? 시간도 턱없이 줄었다. 둘 다 스트레스가 많았고 몸과 맘을 아낌없이 일에 소모하던 시기다.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상태로 과연 지속가능한 걸까? 반려란 무엇인가?


#남편의_쓸모 고민은 내가 인생의 고비를 맞으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아이러니다. 사무실에 짐 빼러 갔던 지지난 겨울 어느 일요일 아침, 즐겨가던 콩나물 국밥집에 그를 데려갔다. 수란의 고소한 노른자 맛을 즐기며 김가루 뿌려 먹는 재미를 떠들었다. 목적 없는 시덥잖은 대화가 오랜만이었다. 그 겨울에서 봄, 내가 힘든 터널을 지날 때 그가 틈틈이 옆에 있었다. 살짝 찜찜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약해진 부인을 챙기는데 새삼 적극적이었다. 앓는 소리하는게 효과있다니, 언제나 꿋꿋당당 쎈캐였던 마눌보다 그게 좋았어? 굳이 묻지 않았다.


소싯적 결혼이 좋았던 건 무조건적 내편이 있다는 든든함이었다. 남의 편이라는 남편이지만 어떤 일에서든 내편이 되는 관계 중 하나가 결혼이다. 직장 상사 흉을 봐도, 가족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아도, 막막한 미래에 대해 불안을 얘기해도 일단 내편. 그는 동료로 출발해 연인이 됐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가정의 비즈니스 파트너, 험난한 시절 동지였다. 옆지기, 옆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육아 전쟁 속 전투를 비롯해 격렬한 다툼도 있었고, 무심하고 미지근한 시간도 이어지면서 부부 관계도 흐릿해졌던 터. 진짜 오랜만에 내편 감각을 떠올렸다.


장황하게 남편에 대해 고찰하는 건 여행을 앞둔 긴장 탓이다. 부부 둘이 놀기 시작한 뒤 여행부터 모색했다. 작년에야 한가해진 내가 친구들과 여행에 열중했지만 나도 원래 여행 못해본 인간. 일하는데 각자 바빴던 우리는 여행해본지 오래됐다. 미국 연수 시절 여행은 언제적인가. 남편 해직된 뒤 온가족 유럽을 돌아본 것도 오래됐다. 더구나 부부 둘이 여행이라니. 봄날의 햇살 같은 여행 친구가 남편과 여행은 얼마만이냐고 물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신혼 이후 우리가 둘이 다녀온 여행이??? 12년 전이더라. 그런데 친구와 여행을 준비할 때도, 여행 끝 우정이 깨질 리스크가 있는데 하물며 부부. 오래된 중년 부부 둘이 여행이라니, ‘갈라설 결심’이라도 한 거냐는 농담 같은 질문도 들었다. 아, 어쩌지…


그는 쉴 자격이 넘치게 충분했다. 나도 작년에 좀 놀긴 했지만 평생 일만 했지?

3월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4월에 떠나기로 했는데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난리였다. 와중에 ‘도란도란’ 사건이 터졌다.

“여보, 난 죽을지도 몰라. 이코노미 타면”.. 뭐라고? 남들 다 타는 그걸 왜 못 타? 부부 둘이 놀면서 저비용 구조 의기투합했는데 비즈니스가 웬 말. 조금 불편하면 안되나? 근데, 요즘 내가 내조의 여왕이다. 원래도 그랬지만 올들어 특히 잘하고 있다. 어지간하면 우쭈쭈쭈 넘어간다. 원래 외부의 적이 고강하면, 내부를 챙기는 법. 남편의 편 해주는데 신경쓰는 중이다. 잠시 숨을 고른뒤 말했다. 그럼 당신은 비즈니스 타라, 나는 이코노미 괜찮다. 순간 그의 동공지진. 약 3초의 버퍼 끝에 모범 대응이 나왔다.

“아니, 당신과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가는게 여행이지, 나 혼자 어떻게 비즈니스를 타. 같이 타야지.”

이 사연을 전해들은 친구들이 정말 깔깔대고 웃었다. 혜승아, 이번 여행 컨셉은 도란도란이구나. 제2의 신혼여행이야. 와우우. 뜨겁게 불태워야지. 도란도란, 도란도란이래, 꺄르르…. 중년부부는 여행 갔다가 갈라서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와중에 이게 뭔 소리냐고.. 그는 한국식당 가야하고, 나는 절대 가지 않는 인간. 우리는 서로 ‘타인의 취향’에 무심한 편을 택한 부부다. 각자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다. 음식 취향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한때 지지 정당도 달랐다. 같이 공유해온 건, 미디어 관심사 정도? 단둘이 낯선 곳에서 여행 괜찮은 걸까?


이게 이번 여행을 #남편의_재발견 기회로 결심한 이유다. 약간은 당위고, 약간은 각오다. 헤어질 결심의 여행이 아닌 바, 남편 데리고 살 이유, 남편의 쓸모, 함께 하면 좋은 것들을 찾고 싶다. 여행이 망하고 정 떨어질 리스크를 피해야 한다. 그렇다고 비장하진 않다. 내가 뭐든 미리 고민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렇다. 뭐, 어떻게 되겠지. 남편은 “늘 그렇듯 내가 당신에게 다 맞출테니 걱정말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별로 미덥진 않다. 같이 사는 내내 다 내 뜻대로 한다더니, 결론은 항상 그의 뜻대로 흘러갔다. 내가 헛똑똑이다.


결국 둘 다 비즈니스로 출발했다. 평생 출장만 다니신 아빠 덕에 마일리지를 펑펑 썼다. 대신 둘 다 처음 가보는 스페인 여행을 파리 in 런던 out 으로 하게 됐다. 4월 스페인 티켓을 마일리지로 구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항공사를 알아본건데, 항공편 많은 인근 도시 우회 작전으로 마일리지 티켓을 구했다. 파리는 우리가 가본 몇 안되는 도시라 공항에서 경유해 바로 바르셀로나로 간다. 런던은 또 둘 다 안 가본 도시라 며칠 묵을 예정이다. 우리는 정말 여행 안다녀본 부부로구나. 가본데가 없으니, 이제라도, 무릎 더 삐그덕거리기 전에 다녀야한다. 그러려면, 이번 여행이 좋아야 한다.


끝내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지만 도란도오란? 그는 옛날 영화, 그라운드혹 데이를 보고, 나는 케이트 블란쳇에 푹 빠져 #타르 봤다. 세계테마기행 스페인편 보라고 서로 팁을 준거 외엔 대화가 없… 공항 라운지에서도 그림의 떡인 바를 보며 움찔했는데, 그는 기내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와인을 마셨다. 아, 비행은 와인과 함께 해야 하는데..그라도 마셔서 다행이라기보다 참느라 힘들었다. 여행 내내 어쩌나. 기내 쇼핑 목록 보다가, 조니워커블루 미래의 도시 서울 에디션이 넘 예뻐서 보여줬더니 집에 술 많다고 했다. 아니, 내가 요즘 위스키도 못 마시는 주제에 저건 예쁜 한정판이라 탐낸건데. 집에 술 많아? 이게 무슨 동문서답이람. 우문현답 아님.

14시간 반 걸려 파리 도착. 광활한 샤를드골 공항 셔틀열차 타고 터미널3. 유럽 내에선 주로 저가항공이라 분실 리스크 감안해 첨부터 짐 부칠 생각을 안했고 각자 기내 캐리어+배낭. 내 캐리어는 8.9kg. 우훗.

다시 바르셀로나까지 1시간10분. 입국심사는 파리에서 한걸로 끝. 유럽이구나. 일요일 낮에 서울을 출발, 어찌저찌 자정 전에 바르셀로나 숙소에 도착했다.


#마냐여행 #부부둘이여행 #스페인여행_1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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