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7일차> 써티 파이브? 알렉산드리아의 그녀들
<이집트 8일차> 알렉산드리아, 그 문명의 아우라
여행 내내 웃음 주고 '도시의 정석'을 보여주신 정석 님, 놀라운 반전 매력으로 압도하신 Hae-kyung Han 님, 박물관 인사이트에 더해 사진가였던 이현주 님, 함께 공부하고 어울리는 여행을 기획하신 메대표 김현종 님까지 5인5색 여행기다. 인복 많은 인간 답게 멋진 분들과 여행하니 후일담도 이렇게 엮인다.
원고 청탁 받고서 셀프컨닝 위해 내 여행기를 다시 보니 오타에 비문 투성이다. 당일 기록이 그렇지 뭐, 하기엔 부끄럽고. 그렇다고 다 고치려니 한숨 나와서 일단 넘어갔다.
내가 궁금한건.. 보낸 원고에서 몇 대목이 짤렸다. 왜 일까ㅎㅎ 너무 억지로 엮었나?
원래 원고>>>>>>>>
고대 문명에 홀리는 시간여행이었다. 워낙 유명해 다 아는 모습이지만 실물 알현의 경험이 남달랐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4500년 전 무덤부터 도무지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외계인 문명설을 의심하며 감탄사만 쏟아냈다. 이집트 여행의 온갖 반전은 겪어보고야 알았다.
나일강을 따라 이어지는 여정에서 첫번째 만남은 피라미드였다.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50km 거리, 도심 바로 옆에 사막과 기자 지역 피라미드가 불쑥 등장한다. 비현실적이다. 고대 로마의 포로 로마노 유적이나 그리스 아고라의 돌무더기 흔적들에도 감동했지만 이집트는 문명의 기원이다. 카이사르가 포로 로마노에서 쓰러진 건 기원전 44년이고, 그리스 아고라는 기원전 900~700년이라는데, 이집트 역사는 기원전 5000년까지 올라간다. 피라미드는 기원전 2500년, 즉 4500년 전에 절정기였다. 우주를 탐사하는 인류는 아직까지 피라미드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 파라오의 부활과 영생을 위해 만든 무덤에서 오히려 영원하지 않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압도적 아우라와 달리 피라미드는 여행자에게 인색했다. 후다닥 인생샷 찍는 것 외에 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기획이 없었다.피라미드에서 부속 건축물인 장례신전까지 참배길을 걷는 코스, 3개 피라미드 주변 산책 코스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기자 피라미드의 역사를 알려주는 표지판도 안보였다. 웅장한 유적 앞에서 겸허해지는 시간을 갖기에는 무척 어수선하다. 낙타 상인들도, “원딸라”를 외치며 물건을 들이미는 꼬마들도 자기들끼리 경쟁하는데 호구가 되는 기분이다. 무려 피라미드 보유국 이집트의 2019년 관광객이 1300만 명. 약 9000만 명으로 1위를 차지한 프랑스는 그렇다 치고, 4000만 명이 찾은 대만에도 밀린다. 대단한 유적에 기대어 이집트 관광당국은 일을 안하거나 못하는 것 같다.
고대 파라오들이 일을 잘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146m 높이 쿠푸의 대피라미드는 2.5톤 석재 230만개를 210단으로 쌓았다. 당대 권력이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노예처럼 부린 줄 알았는데 오해였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SOC 사업이다.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나일강은 해마다 범람해 비옥한 흙을 남겼는데 홍수 탓에 1년에 4개월은 농사를 짓지 못했다. 농부들이 일감 없이 먹고살기 막막한 농한기에 피라미드 공사가 이뤄졌다. 피라미드 인근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유적지에는 빵과 맥주를 대량생산한 흔적이 남아있다. 소뼈도 나와 소고기 먹고 일했구나 한단다. 파라오 쿠푸가 1년에 4개월 씩 20여년 동안 대피라미드를 지은 것은 사람들을 굶기지 않고 민심을 달래는 정치였던 셈이다.
피라미드가 대표적이지만 이집트의 유적은 무덤 아니면 신전이다. 파라오와 신들의 이야기를 벽화로 남긴 책이나 다름없다. 아름다운 누이 이시스 여신과 결혼한 나일강의 수호신 오시리스는 그를 질투한 형제, 사막의 지배자 세트신에게 살해당했다. 이시스 여신의 아들인 독수리신 호루스가 세트신과 80년 간 싸운 얘기는 막장의 끝판왕, 아니 시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막장 드라마 뿌리가 이집트 신화일까. 설상가상 점입가경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제대로 꿰어낸 스토리텔링은 유적지 어디에도 없었다. 무식한 여행자는 검색을 거듭하면서 아쉬웠다. 그리스 로마 신화 못지않은 IP(지식재산권) 비즈니스 기회가 이집트 신화에도 있을법 한데…
이집트의 매력 포인트에 신들만 있는 건 아니다. 신들 대신 민초들의 삶을 벽화에 남긴 이도 있다. 기자 인근 사카라에는 4300년 전 고위관료 카젬니의 무덤이 있다. 규모는 소박하지만 내용에서는 단연 압권이다. 그 시절 옷을 입지 않았던 소년과 옷을 입은 어른들이 함께 메기와 뱀장어, 오징어를 잡고 있다. 큰 물고기는 줄에 꿰어 나르고, 작은 물고기는 파피루스 바구니에 담았다. 사람들이 카젬니에게 선물을 가져온다. 사슴, 오리, 비둘기, 쇠고기, 파피루스, 파와 야채. 아직 닭은 이집트에 없던 시대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한 벽화는 신을 경배하는 만큼 국민도 챙긴 그 시절 지도자를 상상하게 한다. 좋은 통치자는 어려운 이들의 살림살이를 먼저 챙긴다. 파라오도 정치인이었다. 신을 앞세워 선량한 시민을 격려하고 부정부패를 심판했다. 이렇게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다보면 다시 현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이집트 정부가 좀 더 유능했다면, 관광지에서 온갖 삥 뜯는 관행이 없어졌을까? 유적지는 제대로 정비됐을까? 세금을 덜 내기 위해 짓다 말고 철근이 삐져나온 건물들은 완공됐을까? 꼬마들은 관광지에서 “원딸러”를 외치는 대신 학교에 갔을까? 관리능력이 없는 이집트 대신 귀한 유물을 보관할 뿐이라는 영국과 프랑스의 박물관들은 입장을 바꿨을까? ‘아랍의 봄’ 이후 여름이나 가을은 오지 않는 걸까?
친구 T가 2004년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에는 거리에 히잡 쓴 여자들이 매우 드물었단다. 2009년에는 절반이 쓰고 있었고, 2014년에는 안 쓴 여자를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2023년에는 머리카락을 가린 스카프 정도가 아니라 달랑 두 눈만 노출한 니캅 차림의 여자들도 종종 보였다. 이집트가 100년 전 이슬람 페미니즘의 산실이었다는 T의 설명은 믿기지 않는다.
이집트 문명 기행은 누구에게나 로망이다. 나는 다시 이집트에 가고 싶다. 도시가 정비되고, 관광의 경험이 달라지고, 유물 관리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며 여자들이 히잡을 벗은 자유로운 이집트를 만나면 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