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땅은 대한민국 10배다. 아부심벨 신전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한시간 반 비행기 타고 내려온 아스완에서 다시 버스로 3시간 이상 내려간다. 쿠푸의 대피라미드에서 약 1100km 남쪽이다. 새벽 4시 집결했는데, 일행들은 버스에서 사막의 일출을 보고 태양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는 소감을 내놓았다. 나는 잤다. 일행을 굳이 깨우지 않는 다정한 이들로부터 사진만 챙겼다. 사막의 일출...
아부심벨 신전은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2세의 상징이다. 알고 보니 우리 팀은 모두 소설 ‘람세스’를 기억하는 세대다. 그는 용맹한 정복왕이었고, 도시와 신전 건축에 신경 쓴 강력한 통치자였고, 히타이트 원정 끝에 인류 최초로 평화조약을 체결, 유엔에 복제본까지 남긴 지도자였다. 왕비 네페르타리를 사랑한 로맨스 주인공인 동시에 여러 후궁을 통해 후세가 100여 명에 달하는 사내였다. 통치기간 66년에 90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감안해 주자. 자신을 신과 동급으로 과시하는 자기애 넘치는 파라오였고, PI를 비롯해 자기 홍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소통의 달인이었다.
서쪽으로는 서아시아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였으며 남쪽으로 누비아 등 아프리카 정복에도 신경 썼다. 나일강 하류 북쪽 도시들을 해적들로부터 보호하느라 바빴을 텐데 남쪽 끝 수단 국경 부근에 지금 봐도 어마어마한 신전을 세우다니. 아부심벨 신전은 사실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세 홍보관이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신전에 압도당하면서도 나는 이 사실을 놓칠 수가 없었다. 람세스 2세가 원하는 바다. 1 이집트파운 지폐에도 남으신 위대한 분. 다른 파라오 기념물을 자기 이름과 얼굴로 바꾸는 작업도 서슴지 않은 분이란다.
암벽을 깎아 만든 높이 20m 거대한 석상 넷이 모두 람세스 2세인지 나는 몰랐다. 얼굴이 조금씩 다른데, 젊은 람세스가 나이 먹는 모습을 구현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 양 옆으로 8개의 람세스 2세 석상이 또 나온다. 신전 가장 안쪽 네 개의 석상 중 하나가 또 람세스 2세. 나머지 셋은 신들이다. 신과 동급이라니까.. 믿으라.
벽에는 그가 전차를 타고 히타이트 군을 무찌르는 카데시 전투 모습이 남아있다. 카데시 전투는 무승부, 혹은 이집트가 많이 잃은 전투로 알려졌으나 람세스 2세가 남긴 벽화의 서사로는 승리한 위대한 영웅만 보인다. 1년에 2월과 10월 딱 이틀만 태양의 빛이 신전 안쪽 끝까지 닿는다. 태양신 라의 대리자답다. 와중에 ㅇㅈㅅ님께 벽화 질문 하나 했다가 음란마귀 탓을 해야했..
아부심벨에는 위대한 람세스 2세와 같은 사이즈로 왕비를 조각한 작은 신전이 옆에 또 있다. 6개의 석상 중 람세스가 넷, 네페르타리가 둘. 방금 봤던 람세스 석상들에 비해 3분의 1 크기라지만, 왕비를 남긴 자체가 대단한 거란다. 히타이트, 누비아, 그 시절 온 나라 공주들과 결혼한 람세스 2세가 네페르타리 앞에서 사랑꾼이었다는 이야기가 마냥 지어낸 건 분명 아니다.
아부심벨 신전이 아스완 하이댐 건설 과정에서 수몰될 뻔 한 사연도 놀라웠지만, 실제 보니 물에 잠기지 않을 자리로 끝내 옮긴 유네스코와 전 세계 기술자들 정말 대단했다. 아스완부터 아부심벨까지 이어진 나세르 호수는 아름다운 신전의 일부다. 반짝이는 물빛은 태양빛을 닮는다는데, 태양신 라가 됐든, 그의 현신 람세스 2세가 됐든 방문자를 겸허하게 만드는 아우라에 한몫한다.
아스완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막의 신기루 봤다!!! 달려가고 싶더라! 여행자를 홀리는 신기루는 이제 무섭다기보다 신기할 뿐이다.
ㅊㅎㅈ님 컷
이집트에서 만난 사막은 영화처럼 황금빛 모래사막이 아니다. 지평선까지 끝도 없이 거친 들판이다. 이 사막에도 길이 있다. 지평선도 신기루 못잖게 신기해서 사진 찍느라 바빴다.
요즘 사막의 오아시스는 간이 쉼터다. 고속도로 휴게소와 비슷하다. 쉼터에 주차한 차가 현대차, 기아차다. 주로 중고차를 거래하는데 한국 차와 중국 차가 인기란다. 독일 차는 비싸졌고, 일본차는 오른쪽 핸들 좌석 중고차라 곤란하다. 한국에서 중고차를 수입하는 이집트는 한국에 사막의 모래를 수출한다. 반도체 원료다.
무튼 쉼터의 화장실 이용료는 5파운드. 1달러에 5명이 이용 가능하다. 오늘 아부심벨에선 1달러에 6명, 3명짜리 화장실도 가봤다. 주먹구구다. 이집트의 허허벌판엔 가끔 싱그러운 초록색 밭이 거짓말처럼 등장한다. 스프링클러의 날개가 닿는 모양대로 원형 밭이다. 조금 더 달리면 넘실대는 나일강이 보인다. 사막을 다 적시진 못해도 부근에 작은 녹색 밭을 만들어 낼 정도는 되나 보다.
제대로 여행 준비를 하지 않다가, 이번 이집트 일정에 크루즈 여행이 포함된 걸 뒤늦게 알았다. 그리스 산토리니섬 주변의 크루즈 선박들을 보면서 70대쯤엔 크루즈 타자고 친구들과 의기투합했는데 생각보다 무척 일찍 탔다. 카이로에서 남쪽 아스완까지 비행기로 왔다가 위쪽 룩소르까지 나일강을 타고 내려간다. 혹은 올라간다. 나일강 하류로 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고, 지도상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라 살짝 헷갈린다. 무튼 크루즈라니. 선실은 딱 호텔방 같다. 밖에 푸른 물결이 보이는 것 외에는 무척 쾌적하다. 오늘 점심 저녁은 크루즈의 뷔페식당. 화려하지 않아도 크루즈는 크루즈다. 세상에, 별 걸 다 해본다.
배는 종일 아스완에 정박 중이고 내일 새벽 4시에 출발한다. 어제오늘 새벽 4시에 집결하느라 힘들었지만 내일은 그냥 자고 있으면 알아서 간다. 이게 좋은 점이구나. 점심 먹고 침대에 누웠다가 그대로 뻗을 뻔. 도착 후 강행군이었다. 늦은 오후 살살 산책을 나갔다.
나일강은 어디서 봐도 도도하게 푸르다. 나일강변 공원에서 아이들은 축구를 한다.
우리는 어제 묵었던 호텔로 다시 배를 타고 건너갔다. 13층 라운지의 일몰 풍경을 욕심냈다. 나일강이 붉게 물드는 장면을 보다 보니, 어차피 크루즈 타는 일정 내내 볼 텐데ㅎㅎ
그래도 아스완을 한눈에 보는 건 좋다. 불빛은 적당히 반짝이고, 까만 하늘에 별들도 반짝인다. 이 정도 도시면 별이 보이는구나.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호텔은 자격 없는 이들의 출입을 원천 차단한다. 쾌적하고 부티 난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별세상이다. 어쩌면 경제성장을 멈춘 데다 코로나로 관광객이 끊기며 혹독한 시절을 보낸 이집트에서 돈 쓰러 온 관광객들 자체가 딴 세상 인간들이다. 와중에 내가 호구가 되어 웃고 있는 사연은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