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0일차> 사우디 거쳐 18시간
아스완 하이댐은 나세르의 피라미드였다
1952년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그에게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퍼포먼스가 필요했다. 군주제를 무너뜨렸다는 자부심 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미국에 요구했다. 반공 동맹으로 남을 테니 돈을 달라. 그는 그 돈으로 물을 다스리려고 했다. 치수는 통치의 기본이다. 댐을 짓겠다고 했다.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동의했다. 그런데 의회가 반대했다. 이집트가 미국 동맹에서 떨어져 나간 과정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미국 남부 의원들은 이집트 면이 날개를 달면 미국 면화 시장이 죽는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아랍사회주의를 내세워 아랍권을 규합하려 했다. 미국과 영국은 원조를 끊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소련의 흐루시쵸프다.
이집트 여행을 앞두고 한 달에 한 번 전문가 특강을 들었다. 5월에 인남식 교수님 말씀은 흥미로웠다. 그 문제적 아스완 하이댐에 왔다. 이집트의 전력 문제와 홍수를 해결한 댐이다. 카이로 호텔에서 새벽 4시에 모여 6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을 왔다. 기차로는 14시간 거리. 4500년 전 나일강에 배를 띄워 아스완의 붉은 화강암을 카이로 피라미드에 옮겼던 그 길이다. 아스완 공항의 지평선과 호텔에서 조식 대신 챙겨준 도시락 박스는 뽀너스 컷.
50년대에 시작했다가 좌초할 뻔한 아스완댐은 60년 소련의 도움으로 다시 건설을 시작했다. 10억 달러를 들여 1971년 완공했다. 이 과정에서 수몰지구 9만 명이 고향을 떠났다. 무엇보다 람세스2세의 아부심벨 신전, 그리고 필레 신전을 옮겨야 했다. 나세르는 세계를 상대로 베팅했다. 이집트는 댐이 필요하고, 돈을 주지 않으면 신전을 가라앉히겠다고. 결국 유네스코가 나서서 돈을 모았다. 한국에서 누비아 인을 돕는다는 우표가 발행됐다는 것은 ㄱㅂㄱ님이 알려주셨다. 기금마련을 위해 3원, 4원짜리 우표 50만 장을 발행했다고 한다.
미국과 영국의 원조 중단 직후 1956년 나세르는 영국 50, 프랑스 30, 이집트 15로 나누던 수에즈 운하를 1956년 국유화하며 통행세로 댐을 짓겠다고 했다. 그의 영웅적 면모다.
댐은 성공했다. 다만 범람을 통해 비옥한 옥토를 안겨주던 나일강의 축복이 중단됐다. 나일강 부근 땅의 생산성이 떨어졌다. 이집트는 막대한 규모의 화학비료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아스완 댐은 나세르의 피라미드다. 그는 18년 동안 집권한 독재자로서 검열과 도청의 경찰국가를 만들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인기가 있다고 한다. 박정희와 나세르의 권위주의를 비교한 논문이 있다는데 궁금하다.
댐에선 간단히 사진만 찍었다. 댐으로 막은 남쪽 나일강 상류는 바다처럼 넓다. 하류의 북쪽 나일강은 크지 않은 강으로 흘러간다.
총 6000km 나일강 중 이집트에서 1200km이 흐른다. 강이 이집트 만의 축복이 아니란 얘기다. 청나일강 상류의 에티오피아가 그랜드 르네상스 댐을 건축한다고 하면서 두 나라가 붙었다. 국민의 70%가 전기를 쓰지 못하는 에티오피아와 나일강 강물이 2%만 줄어도 100만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이집트 어느 쪽도 양보하기 힘들다. 아스완 하이댐의 이야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10분 남짓 사진 찍은 곳에서 난 혼자 이렇게 놀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가 찾았다는 필레신전
뱃길 따라 가는 길은 온통 푸르렀다. 나일강도 하늘도 눈부신 파랑. 갑자기 나일강에서 솟아 나온 듯 웅장한 신전이 등장했다.
아스완 부근 필레 신전은 나일강 작은 섬에 자리 잡은 물 위의 신전이다. 오시리스 신의 아내이자 호루스 신의 어머니인 이시스 Isis 여신을 모셨던 신전은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수몰되는 지역에서 아질키아 섬으로 옮겨졌다. 당시 물에 잠길 위기의 아부심벨 신전과 함께 전 세계의 도움을 받았다. 나세르 대통령이 ‘배째라’ 한 덕분에 유네스코가 주도해 세계 50여 국가의 기술자들이 4년에 걸쳐 유적을 그대로 옮겼다. 필레 신전의 경우, 1974년에 해체를 시작해 4만 5천 개의 벽돌을 옮겨 준공식이 1980년에 열렸으니, 새로 짓는 것 못지않은 역사였다. 그래도 가볍게 보면 곤란하다. 이집트의 장구한 역사에선 별거 아니지만 나름 기원전 7세기에 처음 세워진 건축물이다.
원래 필레섬에 있던 필레 신전은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신혼여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다른 섬으로 옮겼어도 이집트의 역사와 신화를 빽빽하게 조각해넣은 신전은 당대의 당당함을 숨기지 않는다. 인하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이집트 청년 모히도 고대 이집트를 설명할 때면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현대 이집트를 말할 때 종종 “미안하다”며 양해를 구하는 것과 다르다.
신전 벽의 파라오는 왼발을 앞으로 쭉 내밀고 있다. 한 손으로는 적의 머리채를 붙들고 있다. 발이 앞으로 나온 모습은 살아있는 파라오란 얘기다. 두 손을 엑스자로 교차한 모습은 죽어서 부활을 기다리는 미이라 자세다.
나일강은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른다. 남쪽이 상이집트, 북쪽이 하이집트였다. 사진 왼쪽부터, 하이집트 수도인 기자의 파라오, 상이집트 수도인 룩소르의 파라오는 관이 다르게 생겼다. 그 중간 지대 멤피스의 파라오는 상하 이집트 파라오의 관을 합친 모양의 관을 쓰고 있다.
필레 신전 벽화에는 이처럼 이집트 왕조의 여러 파라오 모습이 등장한다. 신전 안의 작은 공간은 호루스를 위한 곳이다. 벽에는 호루스 벽화가 남아있는데, 호루스 석상은 유럽 땅으로 빼앗겼다고 한다.
나일강 한가운데의 필레 신전은 곳곳이 아름다워서 어디에서든 화보가 나온다. 그런 곳에서도 약탈당한 나라의 한숨은 멈추지 않는다. 필레 신전에 이어 방문한 미완성 오벨리스크도 그렇다.
“오벨리스크, 이집트 밖에 더 많아요. 터키에도 있고, 프랑스에는 5개, 영국에 4개, 바티칸에 1개 있어요. 200년 전 무함마드 알리 왕이 터키 오스만 왕, 프랑스 루이 왕에게 선물한 것도 있어요. 이집트에 쳐들어온 군인들이 잘라서 간 것들도 있어요. 이제 이집트에는 오벨리스크가 9개밖에 없어요.”
가이드 모히의 말이다. 그러게.. 그렇다. 아스완의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3600년 전 하트셉수트 여왕을 위해 열심히 만들다가 금이 가서 버려지고 남겨졌다. 길게 누워있는데 42m 길이에 무게가 1100톤이 넘는다고 한다. 아스완의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든 오벨리스크 중에는 완성되어 룩소르까지 옮겨진 것도 있는데 저 무거운 돌탑을 어찌 운반했는지 현대인들은 알지 못한다. 이집트 고대 문명은 30% 정도 드러났다는 평이다. 70%는 사막 아래 묻혀있다. 현대인들은 알지 못하는 게 많다.
나일강 돛단배 펠루카 뱃놀이, 이것이 인생
어제는 낙타 위에서 인생의 찰나를 즐겼다면, 오늘은 이집트 돛단배 펠루카다. 1월 나일강의 바람은 산들산들 순풍이다. 아스완은 나일강 상류,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누비아와 20~30분 거리다. 누비아 인들의 펠루카를 탔다. 엔진 없이 바람으로 움직이니 고요하다. 기름 냄새도, 모터의 흔들림도 없이 부드럽게 강물을 가른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가 찾았다는 아스완의 나일강이다. 풍광 말해 뭐 해. 하늘과 구름, 강이 열일한다.
서핑보드에 올라탄 소년이 오더니 갑자기 노래를 불러준다. 1달러 팁을 1분 만에 얻는 BM이 괜찮다.
펠루카를 모는 누비아 인들은 흥을 안다. 환대하는 후렴구 우알레레? 노래를 불러주더니 어느새 손을 잡아 끈다. 우리는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나일강의 바람을 즐겼다. 속세의 우아하고 고고한 체면을 벗자 해방이다. 이래서 어른들이 버스를 타든 유람선을 타든 노래를 불렀구나. 주변에 우리 밖에 없어 민폐는 아니었으리라. 그저 즐거웠다. 인생은 음미체라는 우리 팀 회장님의 말씀이 진리란 걸 알았다.
이집트에 와서 가장 비싼 체험비용 10달러를 내고 펠루카 뱃놀이 1시간. 그런데 한참 노래하며 놀다가 모포를 벗기니 좌판이다. 다 1달러, 2달러 하는 누비아 공예품들. 적당히 흥정해 반값으로 깎았지만 그래도 바가지일 게 분명하다. 재벌 기분으로 호쾌하게 돈을 썼다. 오전에 필레 신전 가는 배에서도 똘망똘망 소년의 미소에 맘이 약해져 거금 2달러에 나무 팔찌를 샀다. 그런 미소를 2달러에 샀으면 잘한 거라고, 이집트에서 계속 팔찌하고 다니다가 한국 가면 풀라는 덕담을 들었다. 하지만 요런 나무팔찌를 한국에서도 차고 다니는 용자가 나다. 부적처럼 차야지. 나일강 상류의 누비아 보부상들에게 1달러씩 쓰면 부자의 헤픈 씀씀이를 즐길 수 있다. 내 관대하고 너그러움에 오만해지는 것도 경험이네.
그나저나 아스완 숙소는 인생 최고 수준. 나일강의 섬에 있다.
건너편 식당, 그러니까 나일강변 식당 살라딘 점심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일단 사카라 맥주를 파는 곳이라 다들 기분이 풀어졌다. 이번 여행 첫 건배사도 나왔다. 타진이라는 뚝배기에 나일강 물고기를 요리해 줬다. 진한 토마토소스의 뜨거운 생선 요리를 버터볶음밥 같은 것에 끼얹어 먹는데, 이건 진짜 별미다. 가지와 토마토 양파를 이용한 샐러드도 괜찮고, 후무스도 어제보다 훨씬 맛있어서 자꾸 퍼먹었다. 생과일 주스는 약간 물이 들어가 100% 걸쭉한 수준이던 카이로 식당 주스에 금세 길들여진 우리에겐 좀 아쉽.
Porto sonu 저녁은 후무스와 샐러드 종류가 뷔페식인 데다 맛도 괜찮았다만. 이미 배가 다 찼을 때 파스타와 닭고기가.. 다행인지? 파스타는 안습. 닭은 괜찮았지만 이렇게 과식을…
내일은 먼 길 간다. 4시 집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