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평은 슬로우뉴스로도 발행됐다.
“아, 요즘 시간이 없어서 못봤어”
내 목소리가 마치 변명처럼 들렸다. 유행을 놓친게 내 탓인 것 처럼, 꼭 봐야 하는데 아직 못봤으면 불안한 것 처럼. 영화든 넷플릭스든, 돈만 내고 방치한 애플이나 '무빙' 나오면 결제할 디즈니라든지, 웨이브, 티빙, 쿠팡은 그렇다치고 난 카카오페이지, 네이버시리즈 호구다. 볼 게 너무 많은 시대가 문제다. 하여, 사람들은 ‘빨리 감기’를 택한다.
책 제목을 듣고 웃었다. #영화를_빨리_감기로_보는_사람들. 나도 어쩌다 휙휙 넘겼지만 '빨리 감기'를 거부하는 반려 탓에 제 속도로 보지 않는게 반칙 마냥 찜찜했다. 그런데 다들 그렇단다. 이 유행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19년 넷플릭스가 폰과 패드로 볼때 재생속도 선택 기능을 넣었다. 0.5, 0.75, 1배, 1.25, 1.5배. TV에서는 10초 앞으로, 10초 뒤로 가능하다. 유튜브는 0.25~2배까지 된다.
책은 일본인 영화 칼럼니스트가 썼다. 2021년 일본 조사에서 20~69세 '빨리 감기' 경험이 있는 이는 34.4%. 20대 남성은 54.5%에 달한다. 10초 건너뛰기 시청을 자주 혹은 때때로 한 이들은 75.8%! 나도 여기에 들어간다.
왜? 첫째,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 역사상 가장 많은 영상을 가장 값싸게 볼 수 있는 시대란다. 넷플릭스에서 검색만 하다 나온다는 얘기, 공감한 적 없나?
둘째, 시간 가성비다. 저자는 "방대한 시간을 들여 몇백 편, 몇천 편의 작품을 보거나 읽는 과정,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기만의 관점을 얻는 과정, 결국에는 인생작을 만나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과정을 전혀 선호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낭비는 악이고, 가성비는 정의란다. 영화 요약 유튜브 영상이 패스트무비 시식코너처럼 잘나가는 이유다. 그들에게 '빨리 감기'는 속독과 다름 없다. 저자는 ‘성공하려면 OO가지만 기억하라’, ‘잘나가는 사람들의 OO가지 비밀’ 같은 '치트키'가 유행하는 이유와 연결한다. 꾸준하게 노력해봐야 보상이 따라올 보장이 없는 탓이란다. 이제 '작품'을 감상하기 보다 '콘텐츠'를 소비한다. 명사 뿐 아니라 동사도 바뀌면서, 목적이 달라졌다. 감상이 행위 자체에서 독립적 기쁨과 희열을 얻는다면, 소비는 실리적 목적이 분명하다. 이슈를 따라잡고 대화에 끼어들어야 한다.
세번째,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시대다. 기쁜지, 슬픈지 대사로 일일이 설명한다는 걸, 책의 지적을 보고 알았다. 인물의 미묘한 감정 변화와 눈빛, 손짓, 몸짓이 아니라 대사가 상황이나 인물 감정을 전달한다. 미술과 소도구, 현장 분위기는 그렇다치고, 연출의 리듬도 중요하지 않다. 시나리오의 핵심이 완급조절이라고 하면 옛날 사람이 되어버린다.
영화 비평하던 저자가 오죽했으면, 이런 책을 썼을까. 그는 '빨리 감기'가 드러내는 시대 변화를 차분하게 봤다. 내게는 '요즘 친구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이해?
'이해하기 쉬운 것'이 대접받는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총감독 안노 히데야키는 “재미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여주지 않으면 잘되기 힘든 시대"라며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내용을 즐기는 사람들이 줄어든 세상”이라고 했다. 즉 제목도 달라졌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되는 걸까?',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직관적 서술형 제목이다. 극단적 선정적 의견을 짧고 시원하게 외치면 주목받는 시대적 특징이 여기에 연결된다. 사회를 바라보는 해상도가 낮아졌다. 새로운 이야기, 좋은 것을 보는데는 체력이 필요한데, 다들 기운이 바닥인 시대란다. 작품을 잘못 고르는 실패조차 피하려다보니 스포일러를 오히려 환영한다.
자기소개서에 적을 뭔가가 필요하고,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찾고 싶은데 어떻게 찾을지 잘 모르겠고, 하고 싶은게 뭔지도 모르겠다는 이들에겐 콘텐츠 소비도 탐구생활이다. 치트키로 최고가 되는 것이 차라리 좋다. 다른 세계로 흘러가보니 능력자였다는 식의 '회빙환'. 회귀, 빙의, 환생 이야기가 유행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반인이 회빙환 이후 그 세계에서 현대의 지식과 경험을 살려 압도적 능력자가 되는 것은 독자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게 중요하다.
“디테일한 부분이야 상관 없어. 스토리만 알면 돼”
“건너뛸 수 있는 작품을 만든 게 잘못이지”
“어떤 식으로 보든 그건 내 마음이야”
예나 지금이나 유치한 관객은 있었다. 그들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은 SNS. 게다가 수시로 접속하는 습관은 공감을 강제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제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 대신, 비판과 지적을 당하지도 않는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일은 피곤하다. 기분 상하지 않으려면 불편한 일은 피해야 한다. 밀레니얼은 '동조압력'과 방어의식이, Z세대는 '동조지향'과 표현의식이 특징적이라거나, 해설이 꽤 솔깃하다.
이 책은 #트레바리 #디지털탐구생활 2023년 3월 모임에서 함께 읽었다. 요즘 이렇단 말인가, 신선하게 받아들인 나같은 독자가 있는 반면, "다 아는 얘기, 내 얘기였다"는 K님 같은 밀레니얼 독자도 있었다. 나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정 과목만 중시하는 교육은 모든 것을 효율의 측면에서 바라보게 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배움은 가성비를 따질게 아니라, 5년 10년 로드맵을 가져야 하는데, 이제는 꿈에서도 가성비를 찾는 시대다. 불편함을 멀리하는 게 불편해졌지만, 내 발제문이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1. 2023년 당신은?
- 넷플릭스 빨리감기는 2019년 등장했다는데, 당신은 언제 빨리감기에 빠져들었는지, 기억해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기술 역행 경험 있나요?
-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고, 가성비도 챙겨야 하고, 대사만 봐도 되는 작품 트렌드가 있고. 혹시 다른 이유로 빨리,건너를 옹호할 수 있나요? 혹은 비판하신다면?
- 이야기의 핵심은 완급조절. ‘완’이 사라지고 있나요? 당신은 괜찮아요? 요즘 세상 속도?
- 창작자의 예술을 감상하는게 아니라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감각을 실감해요?
- “어떤 식으로 보든 내 마음”이라는데, 당신이 예술가라면 빨기감기에 최적화 노력? 혹은 작가주의를 고수할 건가요?
2. 가성비의 시대
- 무서운건 못봐도, 요약본으로 보면 괜찮다? 요약정리가 영상에도 등장한 건 수순일까요? 만족했거나 불편한 경험은요?
- 이야기든 제목이든 떠먹여줘야 하는 시대라고요? ‘이해하기 쉬운 것’이 대접받는 세상은 당연한가요? 문제는 없나요?
- 시시한 작품에 시간 낭비하는 것도 실패라는데, 실패가 나빠요?
- 기분 상하지 않도록, 쉽고 가볍고 안전하게. 혹시 ‘불편함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나요?
- 이게 SNS 탓? 각박한 자본주의에 쥐어짜인 탓? 우리 삶 가성비를 따져본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