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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n 14. 2023

<궤도 이탈> 18년 전 일본의 참사 이후 무슨 일이?


같은 기억을 갖는 게 어떤 의미인지 미처 몰랐다. 독일이 '동독에 대한 기억' 찾기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을 봤다. 전체 시민의 '공통의 기억'을 쌓는 과정이다. 같은 기억을 가지면 5.18 광주, 4.3 제주를 다르게 말할 필요가 없다. 진실과 서사를 뒤집어 버리고 부당한 혐오와 분노를 정당화하는 이들은 다른 서사를 갖고 있다. 하여 공통의 기억은 중요하다. 타인에 대한 혐오가 꿈틀거리는 시대에 사회통합을 위해 이보다 중요한게 있을까?


'보상금 받을 거잖아', '불만 있냐. 심보를 그렇게 쓰니까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것', '차도 바꾸고 집도 재건축한다더라', '몇달 째 일도 안하고 산다니 팔자 좋다', '인재가 아니라 돌풍 탓이다'...참사에 대한 기억도 엇갈린다. 저 거칠고 폭력적인 언사가 쏟아진건 18년 전 일본이다. 2005년 4월25일 후쿠치야마선 열차가 궤도를 이탈했다. 107명이 숨졌고, 562명이 다쳤다. #궤도이탈, 부제는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와 어느 유가족의 분투'라는 논픽션이다. 참사를 겪은 이들에게 이 책은 다르게 다가온다.


"참사의 원인은 제각기 다르지만 참사가 발생하고 유가족이 투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은 놀랍게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부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희생자를 '사망자'로, 참사를 '사고'로 바꾸며 처음부터 참사를 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희생자와 유가족을 조롱하는 2차 가해를 방치하고 지금은 참사에 대한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행태가 내 마음을 더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10.29 이태원 참사 생존자이자 희생자 박지혜의 동생 박진성은 이렇게 말한다. 참사 이후의 이야기는 20년 가까이 흐른 세월의 격차도, 일본과 한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도 무색하게 만든다. 닮았다.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진심 어린 애도와 위로를 하기에 앞서 관련 단체나 지자체, 중앙 정부는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해득실에 따라 진실을 왜곡하고 숨기고 침묵하는 방식으로 참사를 대한다."


'JR 서일본'은 '성의 있는 개별대응'이라는 미명하에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단절시켰다. 그들은 슬픔과 분노 속에 정보도 없이 정신적 고립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가족은 '재난의 사회화' 과정을 걷게 된다. 유가족의 입장을 사회화하는 것이 하나의 책무로 받아들여진다. 평화로운 일상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채로 고통이 중첩되는 이들에게 방법이 뭐가 있겠나.
"나쁜 우연이 겹쳤을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걸 알고 있지만".. 남겨진 이들은 자책이 앞선다. 만약 그날 아침에 10분만 서둘렀으면, 늦췄으면, 그 시간을 안 잡았으면, 그 열차를 타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은 2차 피해로 이어졌다. 사실혼 파트너를 잃고, 유가족 대우도 받지 못했던 한 여성은 자살했다.


아내와 여동생을 잃고, 딸은 크게 다친 아사노 야사카즈를 비롯해 유가족들은 '4.25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들을 돕는 언론인도 있었다. 고베신문 기자 출신인 마쓰모토 하지무 (松本創)는 아사노의 싸움을 끝까지 지켜봤다. 고베 대지진 이후 도시재생 과정에서 시청과 지역 주민의 가교 역할을 맡았던 아사노는 고통을 봉인하고 유가족의 책무에 집중했다. 그는 JR 전현직 사장들을 직접 만나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협상을 이끌었다.


사고 발생 직후 실체를 축소했던 '오보'부터, 아사노가 죽은 아내를 만나기까지 40시간이나 걸린 우왕좌왕 사고수습 과정, "아직 잘잘못이 가려지지 않은 단계에서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사과를 회피했던 JR서일본 사장, 앞서 소개했듯 유가족에게 쏟아진 2차 가해들.. 이런 경과가 하나도 놀랍지 않다니, 모든 참사가 데칼코마니 같다는게 슬프다. 무엇보다 사고원인에 대한 공통된 기억을 방해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고 원인을 JR의 안전경시 문화 대신 사망한 운전사 개인 실수로 몰아갔다. 하지만 상명하복 분위기에 징벌적 직원 교육 등 JR서일본의 조직문화가 안전보다 정시운행을 우선하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구체적이다. 끼리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는 배타적 집단, 독재적 리더십은 공공기관의 독이 됐다. 그들은 반성하지 않았고,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당시 상황을 허위 조작하려 들었다. 사고 열흘여 전에도 오류가 있었다. 문제를 인식할 징조와 신호는 여럿이었으나 막지 않았다.


새로운 신호 시스템 도입 후 보고와 연락 체계를 정비했어야 했는데, 반성할 부분이 많다는 발언은 사고 10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일관되게 부인했던 회사 책임을 인정하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다. 당일 역장, 시설과장, 신호기사 등 실무자들이 과실치사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장과 경영진은 7년 걸린 재판에서 최종 무죄였다. 책임자들은 형사처벌을 피하도록 되어 있다. 10년이나 걸려 그나마 책임 인정 발언이 나온건 아사노 야사카즈 등 유가족이 손해배상 민사소송까지 걸어 싸운 덕분이다. 법의 구멍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해자가 사고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원인을 검증하며, 그 결과를 유가족과 피해자에게 제대로 설명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요구하는 게 우리 유가족들의 사명,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아사노 야사카즈의 말이다.


4.25 네트워크는 4.16 세월호 참사 유가족 및 2003 대구지하철 참사 유가족과 교류해왔다고 한다. 이번에는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이어진다. 이들을 '정치화'한다고 비난하는 이, 이들의 사회적 책무를 방해하는 자가 나쁜 놈이다. 공통의 기억을 쌓는걸 방해하는 이를 기억하자. 책은 일본에서 2018년에 나왔다. 진상규명과 책임 추궁은 오래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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