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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반하고, 사귀어 가는 것은 잊지 못할 순간들의 연속이다. 유대인 소년 한스가 귀족 전학생 콘라딘과 우정을 쌓기 시작하는 순간이 가장 설레는 대목이다. 오랜만에 마음을 흔드는 소설이다.
"나는 그날 콘라딘이 내게 무슨 말을 했고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우리가 젊은 두 연인처럼 한 시간쯤 길을 따라 오르내렸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며 서로를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것이 겨우 시작일 뿐이며 이제부터는 내 삶이 더이상 공허하거나 따분하지 않고 우리 둘 모두에 대한 희망과 풍요로 가득 차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우정은 세상을 따뜻하게 빛나는 곳으로 완전히 바꿔버린다. 여느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자부심 혹은 자기방어심리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소년에게 이 우정은 거의 유일한 구명줄이다. 서로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감상을 느꼈는지 생각을 나누고 취향과 예술을 논하는 시간은 황홀할 지경이다. 다만 인간의 마음은 그 다음을 욕심내게 마련이다. 뭔가 미진한 일들이 쌓이면 불안이 다시 싹트기도 하고.. 1930년대 독일에서 두 소년의 우정은 마냥 천진난만하기 불가능했다.
<동급생>은 독일 출신 유대인인 프레드 울만의 짧은 중편이다. 친구 ㅇㅎ님은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너무 놀라서, 앞으로 다시 달려가게 되는 소설"이라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마지막 한줄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독자의 상상을 이어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스의 세상은 새로운 친구에게 온전히 몰입하면서 장미빛으로 변했지만, 실제 현실은 사뭇 달랐다. 1930년대 독일 사람들은 몇년 내 유대인 가정이 겪게 될 운명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한스의 아버지는 히틀러 돌풍을 일시적인 것으로 예측했다.
"경제 상황이 나아지기만 하면 바로 사라질 일종의 홍역 같은 거요. 당신 정말로 괴테와 실러, 칸트와 베토벤 같은 우리 나라의 위인들이 이따위 쓰레기에 넘어갈 거라고 믿는 거요? 당신은 어떻게 감히 우리 나라를 위해, 우리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1만2천 유대인들의 기억을 모욕하는 거요?"
그는 독일인으로서 애국심이 유대인 정체성 보다 뜨거웠다. 귀족은 아니더라도 의사로서 동네 유지의 삶에 아쉬울 것 없던 시민이었다. 사실 괴테와 실러, 칸트와 베토벤의 나라였던 독일이 종족 말살 제노사이드 사회로 퇴행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게 정상이다. 정치인,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도 처음에는 그저 순수했다. 한스의 친구는 이렇게 고백한다.
”오로지 그 사람만이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을 물질주의와 볼셰비즘으로부터 구할 수 있고 그를 통해서만 독일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도덕적 우월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너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독일을 위한 다른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가 없어.”
친구는 ‘그 사람의 사람됨과 성실함에 감동받았다’고 털어놓는다. 실제 만나보니 겉보기에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은 작은 남자지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확신에서 오는 순수한 힘과 강철 같은 의지, 천재적인 강렬함, 예언자적인 통찰에 휩쓸려 들고” 마는 인간이라고. 히틀러에 대한 평가다.
히틀러가 당대 시대정신이었다. 물질주의와 볼셰비즘으로부터 독일을 구할 리더라고 모두 여겼다. 그 시절 스탈린과 히틀러 중에서 히틀러를 선택하는 것에 독일 시민의 자부심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들 마음속 상흔을 어루만져주고, 용기를 갖게 해주는 지도자였다. 우리는 이렇게 엄청난 착각을 종종 한다. 잘못된 판단의 댓가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다.
한스의 동급생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930년대에 10대였던 소년들이 2차 대전을 어떻게 넘겼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각자 저마다 우주가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 소설의 화자인 유대인 한스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소설은 잔혹한 역사 대신 그저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한다. 소년들이 거칠어지는 장면은 어찌보면 못되먹은 아이들의 치기 어린 행동 정도로 보인다. 요즘 학폭보다 순한 맛 수준이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의 운명은 어긋나버렸다.
저자 프레드 울만(1901~1985)은 독일의 법학도였다. 히틀러를 피해 프랑스에서 화가로서 경력을 쌓았고, 스페인으로 갔다가 스페인 내전으로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분명 처음 뜻대로 풀린 인생은 아닐법 하다. 소설 속 한스는 마음 속에 폐허를 품은채 나이 들었고, 독일어를, 독일인을, 독일을 다시 마주하는데 오래 걸렸다. 저자인 프레드 울만은 일흔에야 소설 <동급생>(원제는 Reunion, 재회)을 영어로 발표했는데, 출간 당시에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 책이 주목받은 것은 몇년이 지난 이후의 일이다. 이 짧은 이야기에 눈물 쏟아낸 평들 덕분이다. 이제는 여러 나라에서 필독서로 꼽히면서 유럽에서는 매년 10만 부 이상 판매되는 책이란다. 아이들의 우정이 사랑 못지 않게 아름답고 절절하다는 것만 보여주는 책이었으면 필독 운운하지 않았을게다. 한스와 콘라딘 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것은 분명 다른 이유가 더 있다. 무자비한 녀석들도 분명 있었지만, 한스가 기억하기에 평범한 아이들의 운명이 흔들린 건 누가 책임져야 할까? 신념이 눈을 멀게 하는 일은 어떻게 벌어지는 것일까? 믿음과 확신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 스스로 책임지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생략된 이야기에 마음이 간다. 마지막 한 줄 덕분이다. 스포일러 없이 보시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