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수효과. 이 단어는 어느 무능한 대통령을 비판할 때 처음 등장했다. 92년 전 미국 대공황 시절 코미디언이자 사회평론가 윌 로저스가 원조다. 물과 달리 돈은 오히려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사실을 모른다며,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풍자했다. 낙수효과 따위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낙수효과는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핵심 키워드가 됐다.
대처와 레이건 (1981).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를 상징하는 부자 감세와 낙수효과는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정책과 표어가 됐다.
[경제신문이 말하지 않는 경제 이야기], 1장의 에피소드다. 경제 이슈를 점점 피하는 나에게 내심 불안해하며 경제 좀 알고 싶어 펼쳐 든 책이었다. 살짝 들춰보다가 초장부터 훅 빨려 들어갔다. 쉽게 풀어쓴 문장에 친절한 설명, 금방 읽었다. 낙수효과란 말의 유래를 몰랐기 때문에 당황했고, 내가 놓치고 있는 문제가 이렇게 많았나? 새삼 부끄러웠다.
명백히 진보적 관점에서 다시 살펴본 경제는 경제신문이나 보수 언론의 보도 내용과 사뭇 다르다. 미국의 경제학자는 다수가 진보인 반면 우리는 압도적으로 보수라 했던가?(이준구, 2016) 최소한 평소 자주 접하지 못했던, 다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책, 놓치면 내 손해였다.
법인세를 깎아주면 경제가 성장한다? 이건 미신에 가깝다고 했다. 이번엔 코미디언이 아니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말이다. 낙수효과를 믿고 법인세 인하를 주장하는 것은 ‘무당경제학’이라 했다. 이 말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공화당 경선 중에 레이건을 겨냥한 슬로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습게 보지 말자. 미신도 열심히 믿으면 신념이 된다. 윤석열 정부는 저 주술을 믿는다.
팩트는 이렇다. IMF가 1980~2012년 159개국에서 조사했다. 부자들(소득 상위 20%, 5분위)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포인트 높아지면 향후 5년간 경제성장률이 0.08% 후퇴했다. 반면 서민(소득 하위 20%, 1분위)들 소득 비중이 1%포인트 늘어나면 5년간 0.38% 경제성장 효과가 나타났다. IMF나 OECD나 법인세 인하, 부자 감세 정책이 세수 감소로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경제적 불평등을 키워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세계적 추세에 역행한다.
과거 이명박 정부는 법인세를 25%에서 22%로 낮춰주고 기업의 투자 확대 등 낙수효과를 기대했다. 기업들은 26조7000억 원의 세금을 덜 냈지만 투자 규모는 23조 원에 불과했다. 법인세 깎아주기 4년 전보다 오히려 10조 원이나 투자가 줄었다. 대신 10대 그룹 사내 유보금이 2008년 20.6조 원에서 2014년 612.3조 원으로 30배 늘었다. 100대 기업 사내 유보금은 2021년 1000조 원을 넘겼다.
인플레이션 시대에 대대적 부자 감세 발표했다가 금융시장이 작살나자 44일 만에 물러난 영국 총리도 있다. 감세, 함부로 밀어붙이면 정권이 뒤집힌다는 얘기다. 대체 윤석열 정부 감세 후폭풍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투기 조장한 정부들
부동산세는 그 존재만으로 진보 진영 필패의 굴레 마냥 여겨진다. 최근 민주당에서 종합부동산세를 포기하려는 조짐이 분명하다. 그러나 종부세가 어떻게 등장했던가? 부동산의 경우, 정책에 시차가 있단다. 집이란 게 뚝딱 짓고 팔아치우는 재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때 부동산 활성화 대책을 마구 쏟아낸 것은 김대중 정부였다. IMF 불황 극복이 목표였다. 취득세 양도세 줄여주고 분양권 전매를 허용하며 경제성장률과 집값을 끝내 다 살렸다. 하지만 정권을 물려받은 노무현 정부는 임기 내내 부동산 가격 급등을 막는 데 급급했다. 마침 2000년 이후 저금리 기조와 과잉유동성으로 인해 전 세계 부동산이 폭등하던 시기다.
노무현 정부는 종부세를 비롯해 온갖 대책을 다 쓴 끝에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에야 투기 심리를 진정시켰다. 당시 모든 언론은 비난 일색이었다. 하지만 저자 임주영은 “만약 노무현 정부가 그 정도로 막강한 부동산 정책을 내놓지 않았다면 투기 열풍을 감당하지 못해 부동산은 물론이고 경제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줬을 것을 100% 확신한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부동산 규제책을 죄다 풀었다. 미국에서 부동산 서브프라임 사태로 월스트리트가 무너지던 시절이다. 투기 조장에 가까운 대책들이 쏟아졌는데 당시 시장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전 세계가 금융위기로 침체한 상황이었다.
만약이란 게 부질없다만, 진짜 만약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규제책을 쓰지 않은 채 투기 열풍 집값이 치솟은 상태에서 금융위기를 맞았다면? 임주영은 “부동산발 거품이 붕괴되면서 부동산 대출을 늘려온 금융 기관 줄도산이 이어지고 경제가 흔들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론이 충분히 나올 수 있지만 이런 해석을 곱씹어 볼 여지는 분명히 있다. 조금 떨어져서 큰 흐름으로 과거를 다시 보자. 이어 가계부채가 급속히 늘어나는 와중에 “박근혜 정부는 부동산 투기의 문을 활짝 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집값이 급등했다.
임주영은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에 관해 “부동산 투기에 꽃길을 깔아준 셈인 임대사업자 등록제를 정권 초기에 그대로 둔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라면서 “지난 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과 글로벌 초저금리 시대의 막대한 부동자금 등의 시장 상황을 고려한다면 애초부터 강력한 부동산 대책이 필요했지만 그에 미치지 못한 정책들도 아쉽다”고 했다.
다만 이전 10년, 이명박근혜 정부는 모든 규제를 풀고 빚내서 집을 사라고 했다. 그 부작용과 후유증은 어디까지 따져볼 수 있을까? 투기를 억제하는 정부와 투기를 조장하는 정부,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저자는 “소방관의 실력을 탓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방화범을 지지해서야 되겠냐?”고 했다. 이와 별개로, 2022년 기준 부동산 부자 100명이 2만8000채의 집을 갖고 있다. 우리 국민 45%는 무주택자다.
저자는 환경을 파괴하며 4대강 사업을 할 때 GDP(국내총생산)는 증가하는 현상도 주목한다. 평일에 휴가를 내고 가까운 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 GDP는 내려간다. “인생의 행복을 GDP는 알지 못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아마티아 센이 공동으로 펴낸 보고서의 제목은 [GDP는 틀렸다]였다고. 국내외 모든 정치인은 늘 1인당 GDP 공약에 난리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이 실패했다는 보수 진영의 시각은 편협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는 “복지혜택을 축소하고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보수우파의 전통적 시장주의 경제정책의 성패”였다고. 맥락을 엉뚱하게 짚었다는데, 이 실험 성패를 나 역시 잘못 이해하고 있었나? 이건 좀 시간을 두고 더 살펴볼 이슈다.
2021년 수출로 세계 7등, 무역수지도 13년 연속 흑자를 내던 우리나라 무역에 적신호가 들어온 것도 심각하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2022년, 2023년 내리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는데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가? 적신호가 켜지면 통상 어떤 일들을 해왔으며, 지금은 하지 않는가? “정치가 밥 먹여준다”는 말은 어떤 맥락일까?
이미 몇 달 전부터 베스트셀러인 책이라, 어지간하면 굳이 리뷰를 보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했듯 ‘이 책을 통해 독자가 얻는 것은 경제를 보는 눈’이다. 얄팍하고 자극적인 구호에 넘어가지 않도록, 흥분해서 한쪽으로 몰고 가는 언론 보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더 많은 이들이 차분한 눈을 가졌으면 한다.
우리나라는 사실 경제 정책에 있어서 전 세계 모범 국가다. 그래서 지금도 괜찮은가? 대책 없이 그나마 있던 자산도 다 까먹고 있는 가장을 두고 있는 기분이다. 개인이 근면성실하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더 많은 이들이 경제 이슈에 좀 더 관심 갖는다면, 정파적 선동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