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사람들의 말을 꿰매며 & 인권에서 동물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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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권이 짓밟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장애인이나 부랑인 수용소의 생존자 같은 이들을 만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어이 말하게 하고 그것을 글로 바꾸는 일이다. 삶이 부서진 사람들의 말은 갈가리 찢기고 조각나 있기 일쑤였다. 장애 때문이기도 하고 낮은 교육 수준이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했다. 그 파편들을 모아 거기에 논리와 서사를 부여하는 일,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게 내 역할이다.”
홍은전, [나는 동물], 봄날의책: 2023.
기록하는 사람 홍은전은 저렇게 자기 일을 설명한다. 삶이 부서질 때 말도 함께 부스러진 사람들의 말을 꿰는 일이었다. 그런데 홍은전은 이 이야기를 침팬지 부이(Booie) 사례에서 꺼냈다. 부이는 50개 이상의 단어를 외웠고, 세계에 대해 논평하는 똑똑한 침팬지였으나 동물실험에 팔려 간 뒤 우리에 갇힌 채 13년을 보냈다. 그에게 말을 가르친 박사와 재회한 부이가 수어로 인사하는 장면이 TV로 나가면서 사람들은 부이를 구하라고 난리였다.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잠깐. 수어를 모르는 침팬지는 마냥 가둬놓아도 상관없고, 언어를 이해하면 꺼내줘야 하나? 우리가 구하는 것은 침팬지인가, 언어라는 인간적 능력인가? 홍은전이 고뇌하는 인간의 속성, 그리고 동물과 더불어 해방되는 이야기가 첫 에피소드다.
책은 홍은전이 썼던 칼럼 모음집이다. 스물셋에 장애인 운동을 시작했고, 서른여섯부터 인권 기록 활동가로 살다가 마흔에 고양이 카라를 만나 동물권에 눈뜬 이다. 일단 의도적으로 홍은전, 이라는 이 작가의 이름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기록은 내 안에 잠들어있던 슬픔과 분노, 무지를 깨울 만큼 힘이 세다. 그의 글은 날 것의 예리함과 묵은 것의 깊이를 함께 담고 있다. 중간중간 숨이 멎고 가슴이 철렁한다. 아릿하고 묵직하다. 글에 홀리다가, 그가 전하는 서사에 속절없이 빠져든다.
사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시위가 격해질 무렵, 박경석 전장연 대표에 관한 홍은전의 글을 만났다. 우연히 들어간 링크였는데 연작 기사인 것을 보고 앞뒤로 다시 다 찾아 읽었다. 비마이너라는 매체, 홍은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박경석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사진은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 공동대표로 있던 2001년 8월 이동권 쟁취를 위해 자신의 손과 휠체어를 버스손잡이에 수갑과 쇠사슬로 묶은 채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모습. sadd.or.kr.
‘1조원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있는 박경석 대표. 1조원은 2017년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활동보조 제도화 투쟁의 성과로 편성된 2018년 예산 규모(중앙정부 0.67조+지방정부)가 얼추 1조원이라 점에 착안해 동료 활동가가 붙여준 별명이다. 경실련 제공.
“사람들은 비장애인인 내가 장애인 운동을 하는 것을 ‘연대’라고 하거나 다른 이의 해방을 돕는 것이라 여긴다.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장애인 운동이란 이 세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목소리이자 이 사회의 설계를 완전히 바꾸는 운동이다. 버스를 점거하고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뛰어든 그들은 내 인생도 아름답게 망쳐놓았고, 그것이 나를 구원했다.”
홍은전,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한겨레 칼럼, 2021.04.26.
운동가, 활동가, 기록자로서 그는 속세의 기준과 다른 길을 택했다. 인생을 아름답게 망쳐놓았다고 고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구원이라고 말하면 일희일비하지 않고 계속 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장애시민 불복종]이라는 책에서 당장 이기지 못해도 당연한 권리를 위해 오늘도 패배하는 이들의 마음을 짐작하게 됐다. 이기고 성공하는 것에만 매달려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감탄했더니, 홍은전은 그것을 구원이라 한다.
책은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었다. 저마다 차별과 소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거나 모른 척하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고, 동물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솔직히 조금 무겁고 버겁고 부담스럽다는 고백이 나왔다. 그게 우리의 오늘 모습이다.
과거 청와대 국민청원에서는 동물권 관련 청원이 여러 차례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동물에 연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일도 더 자주 일어난다. 고기를 먹는 인간도 동물에게 연민을 가질 수 있거늘, 한없이 잔인한 일이 벌어진다.
함께 읽은 책 [물건이 아니다] (박주연, 글항아리: 2023)에는 애꿎은 돼지의 사지를 뜯어낸 능지처참(거열형) 시위 사례가 나온다. 사지를 찢어 죽였다. 21세기 일이다. 정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그런 일을 해버린 이들은 과연 괜찮을까 생각하다가, 그 돼지에 생각이 미친다…
기존 법은 동물 학대 행위자의 잔혹함, 보호자의 태만 등을 엄벌에 처하지 못했다. 2022년 개정된 동물보호법은 동물 학대를 처벌할 근거를 마련했지만, 우리가 보호하는 동물은 또 어디까지인가? ‘동물권 변호사’ 박주연이 동물보호법 등 법적 이슈를 분석한 [물건이 아니다]에 따르면, ‘물고기는 지각 있는 생물로 죽을 때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과학적 증거가 충분하다’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가 선포한 게 2009년 일이다.
식용 어류라 해도 먹을 목적이 아닌 이유로 학대하는 것은 금지됐다. 식용을 위해 죽일 때도 운송, 도살 과정에서 고통을 최소화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동물권 의식이 높은 스위스에서는 척추동물 뿐 아니라 게, 바닷가재 등 무척추동물도 도살 전에 기절시켜야 한다. 혹시 살아있는 새우, 낙지 등을 산채로 익히면서, 그들이 몸부림치면 신선하다는 식으로 먹어본 기억이 없는가? 찜찜했어도 먹는 걸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게 나다. 돌이켜보니 소름 끼친다. 부끄럽다.
동물을 잡아먹을 때조차 그들의 고통과 두려움을 최소화하자는 논의와 규칙이 이미 나왔다. 양식 어류에 대해서도 운송, 기절, 도살법에 구체적 기준이 등장했다. 다른 나라 얘기라고 하지만, 우리도 선진국이고, 생명 존중 문화 수준도 높아졌다. 무엇보다 동물복지를 과학적으로, 정책적으로,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시대가 됐다. 생명체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를 줄이려는 노력은 인간의 책무다. 어차피 다 잡아먹는 데 유별나다고 하지 말자. 그들도 다 느낀다니까.
동물보호법은 ‘최소한의 사육 공간 및 먹이 제공 등 소유자의 사육·관리 의무를 위반해 상해나 질병을 유발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면 동물 학대로 처벌받도록 했다. 3년 이하의 징역,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이것은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렇게 해도 국내에서 매년 유기되는 동물이 10만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반려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버려지는 동물도 늘어난다.
한해 488만 마리가 동물실험에 동원되며 그중 절반이 ‘극심한’ 등급의 고통을 겪는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무조건 동물실험을 금지하자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잔학성을 줄이는 방식으로 고민해야 한다. 동물권은 동물이 학대받고 고통받지 않을 권리를 넘어 행복할 권리를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가 헌법에서 국민주권(1조)을 가장 중요하게 떠들다가, 행복추구권(10조)으로 넘어가고, 인간다운 생활, 복지(34조)까지 눈높이가 높아진 것처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지만 “또한 협력적이며 정의롭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문명이란 덜 잔인한 방향으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것도 다시 한번 성찰해야 하는 지점이다.
생명에 대한 감각을 예리하게 깨워보자. 모두 평등하게 숨 쉬는 존재다. 그들의 권리가 나의 권리다. 상대를 지켜줘야 나도 안전하다.
헷갈리죠? 나는 동물? 인간은 인간인데? 인간이라는 종이 왜 다르죠?
약육강식,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게 동물의 본성이라고요?
장애인 권리, 어디까지 알고 있었어요? 혹시 놀란 지점이 있나요?
동물권에 대해 인지한 경험을 나눠주실래요?
채식주의에 대한 고민 해본 적 있어요? 그냥 취향과 욕망이 내 세계관보다 앞서는 걸까요?
동물복지 인증 축산물이 대안이 될까요? 자본주의는 학대를 정당화할 근거가 되나요? 우리의 원칙과 기준은?
장애인의 권리를 위한 세금, 우리가 빼앗았다고요? 그렇다면 돌려줄 수 있어요?
저항하는 인간이 아름답다고요? 전장연, 그렇게 바라보고 있나요?
책을 읽은 뒤 뭔가 달라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