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은 19세기 사회의 불평등 구조와 19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상속과 세습 자산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가장 뛰어나게 묘사한 문학작품이다. - 토마 피케티
『고리오 영감』은 오티움 북클럽 '명작소설로 보는 경제학'에서 함께 읽은 두번째 책. 첫 책이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이어 잇따라 봤더니 사랑과 연애, 결혼에 대해 당혹감만 남는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19세기 영국 여자들이 남편감들을 찾는데 열 올리도록 압박받는 상황에 이어, 이번엔 프랑스 청년의 연상 부인들 사랑이 예사롭지 않다.
가난한 귀족 출신 법학도 외젠 드 라스티냐크. 그가 지내는 하숙집에는 고리오 영감이 있다. 한때 큰 돈을 벌었다는데 궁색한 남자다. 성공을 꿈꾸는 외젠은 친척의 도움을 빌어 사교계에 발을 들이고, 레스토 백작부인과 뉘싱겐 남작부인에게 차례로 구애하는데, 이 두 여자의 아버지가 고리오 영감이라는데 첫 현타. 알고보면 고리오 영감은 딸들을 괜찮은 남자와 결혼시키기 위해 80만 프랑의 지참금을 썼고, 자신은 연 1만 프랑의 연금으로 지내는데 세상이 뒤집어지면서 사위들에게 홀대받는 처지다. 프랑스 혁명(1789), 루이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참수(1793), 나폴레옹의 쿠데타(1799), 황제 등극(1804), 부르봉 왕조의 왕정복고(1814), 나폴레옹이 엘바섬 탈출(1815) 등이 숨가쁘게 이어지면서 신흥 자본가들이 다시 귀족들에게 밀리던 시점이다. 다시 혁명으로 공화국이 들어서는 건 1848년, 고리오 영감 출간(1834) 이후의 일이다. 불과 반세기 만에 세상이 많이도 뒤집혔던 시절, 사람들은 어디에 기댔을까.
경제 공부하는 차원에서는 고리오 영감과 다른 하숙생들의 연금 얘기도 흥미롭지만 나는 그들의 연애에 꽂혔다. 외젠은 변호사가 되어 성실하게 경력을 쌓기 보다 부유한 여성을 사로잡는 전략에 사로잡힌다.
"고매하게 살면 연봉 1천프랑에 감지덕지하면서 시골의 법률가로 시작할 거야. 서른에 연봉 1200프랑의 법관이 될 거고, 마흔이 되면 매년 6천프랑의 연금을 받는 여자랑 결혼할 수 있을 거야. 혹시 후원자라도 있으면 서른에 연봉 3천프랑을 받는 검사가 되고 마흔에 검사장이 될 수도 있지. 그렇게 이십 년간 사는 동안 네 여동생들은 결혼도 못하고 노처녀가 될걸. 게다가 검사장은 이십만 명이 도전하지만 전국에 스무 명뿐이라고.”
외젠은 연봉 몇천 프랑의 삶 대신 부자 마담들에게 빌붙는 제비족을 택하는데, 그저 사랑일 뿐이다. 실제 그는 우아한 부인들에게 홀딱 빠진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돈을 빌리거나, 투자를 받거나, 뭐 그런 것. 부인들은 청년의 구애를 받는 게 몹시 자연스럽고, 심지어 남편 앞에서도 거리낌 없다. 고리오 영감조차 딸의 애인을 지지하니 원. 어차피 조건 보고 결혼한 남편들은 모두 예쁘고 어린 정부들이 따로 있고, 부인도 따로 애인을 갖는 구조. 결혼에도 돈이 오가지만, 연애도 나이 많은 남녀 부자가 청년들에게 돈을 쓴다. 요즘 청년들이 코인으로 한탕을 기대하듯, 그때 청년들도 연애만 잘하면 한탕에 성공한다.
내가 당황한 것은 발자크의 실제 생애가 외젠과 닮았다는 사실이다. 발자크는 23세때 45세 베르니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베르니 부인에게 돈을 빌려 사업하다 말아먹는 일을 반복했다. 30대에는 한스카 부인을 펜팔로 만났고, 이후 과부가 된 그녀와 51세에 결혼했다가 얼마 안되어 생을 마감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중년 남자들이 청년들의 연인이자 뒷배가 되고, 그 청년들이 다시 중년이 되면 어린 청년을 만나 서로의 쾌락과 성장을 돕는 관계를 맺었다더니, 19세기 프랑스 풍경도 신박하다. 결혼은 그냥 하는 거고, 사랑과 연애는 부부가 각자 알아서 하면서 상부상조하다니. (그런데, 이게 현재와 다른가?)
신현호님이 이끄는 '명작소설로 보는 경제학' 북클럽의 세번째 책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채권 거래인으로 뉴욕에서 일하는 닉 캐러웨이가 화자다. 그가 옆집 사는 거부 개츠비를 만나면서 겪는 일이 이야기의 뼈대. 이 아름다운 소설을 이딴 식으로 앙상하게 설명하는게 부끄럽긴 하지만, 닉의 친척인 미녀 데이지, 그녀의 남편인 전통 부자 톰, 톰의 평범한 정부, 옛 여친(?) 데이지에게 보여주려고(?) 보려고(?)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바다 건너편에 대저택을 지어 흥청망청 날마다 파티를 벌이는 졸부 개츠비가 서로 신경전도 벌이고 심각한 실전까지 일으키는 얘기다.
톰의 정부가 의외의 인물인 것도 인상적이지만 군대 시절 잠깐 만난 데이지를 잊지 못해 온갖 삽질을 마다않는 졸부 개츠비의 사랑이란. 열렬한 마음에 공감도 해보고, 데이지가 좋으면 뭔 상관인가 싶지만, 어찌보면 스토킹. 가진 것 없는 제임스 개츠가 있는 집안의 성공남 제이 개츠비로 변신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놓친 사랑을 되찾아야 완성이다. 졸부가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데는 뼈대 있는 부잣집 아가씨가 필요한건가. 올드머니의 상징 톰이 폐차장 주인의 아내를 정부로 삼은 것은 다 가진 이의 욕망이 정반대로 향한 것이라는 S님의 해설에 무릎을 쳤다. 다 가진 이들이 오히려 exotic한 매력에 꽂히게 마련이라나. 아주 예쁜 부인을 두고 말도 안되는 여자와 바람 피는 이야기가 흔한 것처럼.
욕망은 결핍과 한 셋트이고, 닿지 못하는 곳이어야 낙원이다. 개츠비의 사랑은 파국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 않게도 개츠비 역시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분신이다. 그는 프린스턴대 2학년이던 18세 때 '상속녀'라고 불릴 정도로 부유했던 지네브라 킹(Ginevra King)과 사랑에 빠졌다가 그녀의 집안 반대로 헤어졌다. 이후 지네브라의 결혼 소식을 들은 피츠제럴드는 3일 뒤 젤다 세이어(Zelda Sayer)에게 청혼해버렸다. 법관 집안의 그녀도 만만치 않았는데 결국 피츠제럴드는 젤다와 약혼했다 파혼했고, 베스트셀러로 성공한뒤에야 그녀와 결혼했다. 사랑은 해도 결혼은 집안 간 비즈니스란 법칙이라도 있는게지.
피츠제럴드는 결혼 후에도 여배우 로이스 모런(Lois Moran)과 바람 피우며 젤다 속을 썩였고, 여자가 엄청 많았다고. 젤다도 남자 많았고 남편이 헤밍웨이와 사귄다고 의심하기도 했단다. 헤밍웨이는 젤다를 욕했고, 실제 젤다는 멘탈 문제로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그녀가 정신병원에 있을 무렵 피츠제럴드는 알콜 중독자였고, 가십 칼럼니스트 쉴라 그레이엄(Sheilah Graham)과 동거중이었다. 피츠제럴드도 그렇지만, 지네브라, 젤다, 로이스, 쉴라까지 모두 미인. 다들 뜨겁게 살던 시대인가봐..
제인 오스틴과 오노레 발자크, 스콧 피츠제럴드까지 명작소설을 차례로 읽다보니, 아니 작가의 현실 생애까지 들여다보니 지고지순한 일부일처제는 판타지. 오로지 결혼에만 매달리게 하는 시대든, 각자 연애하며 바람 따라 흘러가던 시대든, 결혼은 오히려 자산과 뼈대를 따지는 조건만남이고 사랑은 또 다른 이야기. 하여 삶의 풍파는 남녀상열지사가 으뜸이다. 사랑 밖에 난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