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이름을 떨친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세이야. 개인적으로 소싯적 <광기와 우연의 역사>, <어제의 세계> 등에 푹 빠졌으나 이후 잊고 살던 이름인데.. 사실 다사다난 한해를 마무리하며 소개해드릴, 얇고 가볍고 말랑말랑한데 감동이 있는 그런 책 없을까? 찾다가 걸렸어. 이분이 끝내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남겼더라고.
나치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 갔던 시절 기록인데 지금껏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에세이 9편을 묶어서 독일에서 2023년에 나왔더라고. 2차 세계대전을 목격하며 좌절한 유럽의 지성, 당시 이분이 어둠 속에서 무엇을 봤을까? 환할 때는 별이 보이지 않잖아. 지금 어두운 시기라면 우리가 무엇을 봐야 할까?
9편 에세이 중 사실 첫번째, ‘걱정 없이 사는 기술’을 읽다가 매료됐어. 안톤이라는 남자가 나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인 돈을 주체적으로 피하는 기술, 그리고 단 한명의 적도 만들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기술. 매우 어려운 이 두 가지 기술을 내게 보여준 사람이 있다. 그를 잊는다면 그것은 배은망덕일 것이다.”
길가다가 개가 버둥대는데 갑자기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거지인가 싶은데 선뜻 진드기를 잡아주고 쿨하게 손흔들고 가버리지. 자신을 희생하거나 생색내는 일 없이 원하는 대로 자기 일을 하고 홀홀 가버린 사람. 그런데 요리사가 “아, 안톤을 만나셨군요” 다들 아는거야. 그 남자. 뭐하는 남자냐고 직업을 물었더니 “아무것도 안해요”, 모욕이란듯 “직업 같은게 왜 필요하겠어요?” .. “그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사람들이 기꺼이 죄다 내주거든요:”
백수? 안톤은 온종일 산책하는 남자지. 그러다 마차를 세우고 말의 굴레가 잘못 씌워졌다고 알려주고, 울타리 썩은 기둥을 새로 칠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일 맡기면 성실하게 해내고. 신발을 고치고, 임시 웨이터를 하고, 아이들 데리고 산책하고, 근데 특이하게도, 여러 시간 힘들게 일해도 하루 필요한 것보다 많은 보수는 거부해. 필요한게 없는 날에는 아예 받지 않고. “나중에 필요하면 올게”라고.”
후줄근한 이 청년은 철저히 반자본주의적 새로운 시스템을 발명했다고 작가는 평가해. 그는 사람들의 인성을 믿었어. 작은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도덕적 의무라는 유동자산을 저축하는 거지. 모든걸 흔쾌히 당연하게 해버리면 사람들이 마음의 빚을 지잖아. 모두가 반갑게 인사하고, 악수하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삶의 비밀이 그에게 있었지. 한결같이 쾌할하고 태평한 사람. 이런 상호 신뢰의 비결을 모두가 배운다면, 경찰도 법원도 필요없을 거라고. 선량한 백수를 모두가 신뢰하고 좋아하는 풍경은 드라마에서나 봤지..
‘나에게 돈이란’ 에세이. 1923년에 작가는 1만부 선인세를 수표로 받았는데 현금화하는데 걸린 열흘 동안에 돈의 가치가 떨어져서 원고를 보낼 때 썼던 우편요금에도 못미치는 사태가 발생해. 1년 농사가 나흘 만에 사라졌다고. 독일-오스트리아 통화 인플레이션으로 달걀 한알이 40억 마르크. 깨진 창문 교체하는 비용이 4층 건물 가격보다 비싸지고.. 아침에 눈을 뜨면 재산의 절반이 사라진 상황. 독일 정부가 전후 배상금을 청산하는데 이용하려던 인플레이션이래. 근데 사람들은 살아가.. 오히려 돈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삶의 오랜 가치(일, 사랑, 우정, 예술, 자연 등)가 더욱 중요해졌고.. 돈을 믿지 못하면서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의 진수를 깨닫는 사연이 나와. 예전 같으면 3년은 살 수 있는 돈뭉치를 내밀고 빈 오페라 티켓을 샀고, 난방이 되지 않아 코트 입은 채 따닥따닥 붙어 앉아서, 그 어느때보다 완벽했던 공연 감상. 돈의 미친 죽음의 춤이 3년이나 계속됐다는데.. 이후 돈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게 됐다고.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재산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고.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가 처형되는 극적인 날에,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센강에는 수많은 낚시꾼이 여느 떄아 마찬가지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보고 작가가 놀란 얘기가 나와. 역사적 순간에 그런 이기적 무관심이라니. 근데 우리도 프랑스혁명이나 종교개혁 못지않게 극적인 시대에 살고 있고, 매주, 매일이 역사적 사건으로 가득하지만.. 매시간 주의를 기울여 참여할 수 있을까? 이 시대의 대다수는 역사가 아니라 언제나 오직 자신의 삶을 산다고. 일상생활은 평범하게 이어진다고..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마음을 파괴하고, 시대가 우리에게 연민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우리의 지친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더 줄어든다고.. 우리는 작은 심장 하나를 가졌어.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하고.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역사적 시대’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고, 감당할 힘이 부족할 뿐 선한 의지가 없는게 아니라고. 자연법칙은 사람들 일부가 무참히 파괴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끈기 있게 인내하며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갈 요구해. 무너져 가는 세계의 폐허를 계속 노려보는 대신 더 나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이가 있어.
두번째 책은 제목이 넘 인상적이라 펼쳐보게 된 책이야. 그런데 부제가 ‘요양원으로부터의 사색’이야.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1960년대에 발표된 노랫말이라는데, 그 시절 어르신들은 진짜 일만 했잖아. 책의 주인공들은 그 험한 세월을 지나 이제 요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어르신들이야. 저자는 ‘페리도나’라고 닉네임을 썼는데, 전직 성공회 여성 사제로서 느지막이 사회복지사 자격을 얻어 요양원에서 어르신들과 매일 아침 국민체조 하고, 치매 어르신들과 놀이 프로그램 하는 분이야. 자칫 지루하게 반복될 수 있는 일상과 때론 좌충우돌하는 나날들을 유쾌 발랄한 문장과 때론 잔잔한 감동의 언어로 정리했어. 죽음이라는 비극을 농담처럼 환기하는 솜씨가 일품이야.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캐릭터를 생생히 살렸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하게 만들어.
우리도 언젠가 오락가락 하겠지? 수건 염색 좀 해볼라고 하면 “그런 그지 발싸개 같은 걸 무엇하러 하냐!”고 투덜거리다가도, 염색도 제일 먼저 하고, 자랑하는 모습이 반전인게 어르신들이야. “이렇게 바보 같은 나에게 이런 시간이 있어 감사하다”고도 하고. 안먹어 안먹어 하면서 한 입씩 다 받아드시는 분들..
오늘내일 하는 어르신 귀에 대고 “사랑해요 할머니”..갑자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아무 말도 못 알아들으신다고 생각했는데.
시각 장애를 가진 영감님이 요양원의 할머니 면회를 왔다 돌아가신뒤, 할머니가 바로 전화를 해. “여보, 내가 깜빡하고 못한 말이 있어요. 사랑해요.” 어르신 침대 위에 영감님이 가져오신 반찬통에는 미역줄기볶음이 얌전히 들어있는 풍경..
백한살 어르신이, 여든 두살 어르신에게, “한창 때네”하며 부러워하는 장면.
100세가 된 늙은 어미는
이제 눈물도 말라
창밖의 아들을 보며
가슴으로 우는데
창밖에 앉은 목사 아들
엄마, 요즘 기도는 하시냐며
설교 끝에 기계음 같은 기도를 한다.
늙은 엄마는 말한다.
어여 가거라.
어여 가거라.
우리 삶의 마지막 정류장 요양원, 그것도 치매 노인들과 날마다 지지고볶는 일상 풍경이지만 어둡지 않아.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 살아지는 이유를 키득거리며 살펴보기를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