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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일기 쓰는 아빠 Aug 10. 2020

아빠한테 배우는 아빠

인공지능 때문에 육아에 목숨 걸게 된 아빠의 사연 - part II

육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의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겉에서 감싸 안고 단순히 보호하는 역할이 아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수박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달콤한 속살이 수박 겉껍질 같은 것으로 덮여 있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처럼 딱 그런 모습이었다. 아빠의 역할은 육아의 중심에 서기에는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 육아에 전념하게 된 걸까?


우선은 인공지능 시대가 되었는데도 육아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게 첫 번째 이유였다.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달리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내의 육아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두 번째 이유는, 내 어린 시절의 경험을 아들에게도 물려주는 일은 큰 의미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른들이 말씀하시듯, 아이는 다 그렇게 크는 것이라는 대중적인 생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아빠에 관한 이야기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참으로 많이 간구했던 것 같다. 5살 위인 형이 나를 극진하게도 잘 보살펴 주고 재미있게 놀아주긴 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며 늘 바쁘셨던 부모님은 감수성 예민한 막내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나눠줄 수 없었다.


계란 프라이는 차가운 음식인 줄로만 알았다.


식탁보에 덮인 아침밥을 차려두고 이른 아침에 이불을 빠져나간 엄마와 아빠의 따뜻한 체온을 그리워하던 그때, 난 계란 프라이가 언제나 차가운 음식인 줄로만 알았다. 부모님의 상황을 헤아릴 수 없는 철부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빛바랜 장판이 깔려있는 널찍한 방안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뒷모습이 머릿속에 가장 먼저 그려진다.


좀 더 드라마틱하게 쓰려고 꾸며낸 부분이 있기는 하다. 주말에는 온 가족이 다 함께 식사했을 테니까. 그 언젠가는 따뜻한 계란 프라이를 맛보았을게 분명하다. 하지만 내 기억에 발이 달렸는지, 어딘가 저편으로 넘어간 것 같다.


이제 내 아빠 이야기를 할 차례다. 나는 내 아빠를 정말 존경한다. 우리 아빠가 평생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에 대해선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늘 이해하고 동정해왔다. 다른 친구들의 아빠에 비해 좀 무서운 면모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내 아빠의 잔소리와 꾸중에도 별다른 저항 없이 어린양처럼 굴었던 것도 그런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빠가 아들들과 노는 방식을 회상해 보면 참 서툴렀음을 알 수 있다. 먼 거리에 있는 곳까지 걸음으로 이동해서 등산을 하거나, 목욕탕에 가는 게 고작이었다. 대화를 하거나 관심을 공유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의 아빠들이 그렇듯, 내 아빠도 예외가 아니었다. 드물었지만, 어린이날에는 우리 형제를 데리고 어린이 대공원에 간 적이 있다. 아빠와 놀이공원에 다녀오는 일은 이 세상 어느 것 보다 더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그때 찍은 기념사진 속에는 스트레스와 원망이 모두 담겨있던 건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빠가 회사에서 공식적인 작별을 나눠야 했던 때, 나는 어엿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땐 국민 모두 다 IMF 경제 공황을 겪고 있었다. 어느 날 여드름 난 사춘기 소년에게 점심 먹으러 같이 나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순대국밥의 맛을 들였다. 꼬릿 한 냄새에 뜨거운 국에 말아진 순대는 비위가 약하던 내가 좋아할 리 없는 메뉴였다. 이렇게 메뉴 선정에 이르기까지 내 아빠는 아들과 노는 방식을 잘 모르는 서툰 아빠였음이 분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종일 안방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실랑이를 벌이던 끝에, 내 방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희에게 컴퓨터를 사줄 수 있게 됐어.
 


이 세상에서 가장 천진난만한 얼굴을 한 아빠의 들뜬 분위기에 나는 그만 팽하고 짜증을 냈다. 수많은 시간 동안 그토록 힘들게 일해왔고, 이제는 억울하게 퇴직하게 되었는데, 왜 당신을 위해 쓰지 않고 우리를 위하냐면서. 아마도 내 목소리가 문 밖에 까지 새어 나갔을 것이다.


아빠는 그걸 왜 우리한테 써?!

타인과의 인간관계 속에서 한 번도 자신의 실리를 챙기지 못하고 늘 퍼주기만 하고 서운한 소릴 듣는 내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늘 조마조마했다. 한 번은 아빠가 어린 나를 앞에 두고 자신의 속 마음을 터놓은 적이 있다. 그날도 전화기를 오랫동안 붙들고 있다가 한 말이다.


아빠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서 사는 게 꿈이었어.


나는 되지도 않을 삼수생 시절을 어렵사리 보내다가 내 꿈을 펼쳐보겠다는 일념으로 방송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러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1년 늦게 공군에 입대했다. 늦은 김에 군대에서 좀 더 있어보려고 그랬다. 가진 것 없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없는 사회에서 6개월이라도 더 떨어져 있으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30개월 복무를 마치고 1주일 만에 세일즈맨이 되기로 했다. 그러나 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호주 시드니로 건너왔다. 이 곳에서 내 아내를 만났다. 비로소 삶의 근거를 찾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27살에 남편이 되었다. 그리고 내 아들 선율 이를 만났다.


하나님 아버지,


최근에, 아버지가 뭐길래 그렇게 하나님의 호칭에 붙여서 사용하는 걸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하나님 뒤에 붙는 '아버지'의 호칭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등산을 하거나 목욕탕을 가거나, 꾸중이나 호통을 치는 감시자의 역할 이상을 상상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를 하나님과 연관 짓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반면에 '친구 되신 예수님'이라는 표현은 꽤 산뜻하게 내 가슴으로 와 닿았다. 친구라는 표현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그냥 넘겨선 안될 만한 일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절실하고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이것은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시대에 꼭 필요한 의미이기도 하다.


인공지능 vs 아빠


인간의 두뇌는 믿고 싶은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반복적으로 경험한 것을 사실로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믿거나 경험하지 않는다. 켜켜이 쌓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석하고 인간 지능에 가까운 언어로 표현할 뿐이다. 여기에 아빠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내 아빠는 함께 등산했다. 목욕탕에서 뜨거운 온도를 함께 경험했다. 일개미처럼 일하고 땅에 버려진 전단지처럼 취급받게 되더라도 아들이 기뻐할 만한 그 한 가지를 위해서 마지막 한 줌의 핏방울을 짜냈다.


인공지능은 믿거나 경험하지 않는다.


이젠 아버지가 뭐길래 하나님의 호칭에 사용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내 인간적인 아빠는 사실 나를 잘 읽지 못했던 게 흠이기는 해도 그 진심만큼은 하늘의 하나님만큼 했다. 부디 신성모독이 아니기를 바란다. 


비가 와야 무지개가 돋는 것처럼, 눈물이 흘러야 무지개가 생긴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내 하늘에 무지개를 돋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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