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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Apr 02. 2024

내 수퍼바이저는 영국 남자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주정부 입사를 앞두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쇼핑을 했다. 캐나다에 와서 학교를 다니고 영주권을 받기 위해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옷 입는 것에 한동안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다. 그런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옷을 챙겨 입는 게 불편해지기도 했다.


막상 출근을 하려니 입을 옷이 마땅치 않다. 청바지, 레깅스, 후디 재킷, 면티, 운동화들뿐이다. 그래서 너무 캐주얼해 보이지 않게 그렇지만 너무 포멀하지도 않게 보이는 재킷과 신발을 샀다. 그리고 우연히 눈에 꽂힌, 내 시선을 사로잡은 스카이 블루색 가방. 계획에도 없던 가방까지 사버렸다. 충동구매이긴 했지만 기분은 한없이 좋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첫 출근 날. 새로 산 재킷에 검정 바지, 새로 산 신발과 가방을 들고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나는 배정받은 오피스에서 트레이닝을 받게 됐다. 트레이닝을 받으며 오피스 분위기도 익히고 직원들과도 친해질 수 있으니 시작부터 운이 좋다. 직원의 호의를 받고 미팅룸에 자리 잡은 나는 같이 트레이닝을 받게 될 동기를 기다렸다.


우리를 가르칠 트레이너를 비롯해 몇몇의 직원이 미팅룸에 모여 있는 가운데, 내 동기는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복장이 나를 놀라게 했다. 첫날부터 지각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아이는 과감하게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나의 반응과는 다르게 모두들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그 아이는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사소한 대화를 시작한다.


미팅룸에서 서로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는지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오피스 투어를 했다. 나머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둘러본 오피스. '아.. 캐나다 관공서는 이렇게 생겼구나..' 한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여기는 캐나다니까~' 그것도 기분이 좋았다.


인사를 마치고 트레이닝이 시작될 무렵 우리의 직속 수퍼바이저가 미팅룸으로 왔다. 깔끔한 와이셔츠에 똑떨어지는 팬츠, 진한 갈색의 구두를 신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내 수퍼바이저는 환한 미소로 우리와 인사를 한다.


그런데 이분.. 영국 남자다. 캐나다 영어도 잘 안 들리는데 이제 영국 영어를 알아들어야 한다. 뿌리 깊은 브리티시 엑센트를 가졌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20%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난감하다.


이 영국 남자는 우리에게 단 한마디의 말을 남기고 유유히 미팅룸을 걸어 나간다.


"You should never abuse government time."


알을 막 까고 나온 오리 새끼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라 생각하고 따르는 것처럼 내 직속 수퍼바이저가 해 준 이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나의 원칙이 되었다.


내 수퍼바이저는 바름이 몸에 배어 있다. 항상 정갈하고 근면 성실을 실천한다. 제시간에 출근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나서야 할 타이밍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직속 팀원이 곤란한 상황이 되면 어디선가 나타나 방패를 쳐준다.


내 영어 능력에 대한 우려의 시선이 있었다. 캐나다에 와서 영어 공부를 시작한 내가 주정부에 입사했을 때는 캐나다 생활 6년째가 되는 해였다. 나 스스로도 내 영어가 불안했다. 미팅룸으로 나를 부른 수퍼바이저는 그사이 나를 다 파악한 듯하다. 나를 격려해 준다. 혹시라도 들킬까 봐 판도라의 상자에 꽁꽁 숨겨놓았던 불안이 뚜껑이 열리는 순간 흩어져 사라졌다. 들키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감출게 없어지니 한국인 근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근면,

집념,

꾸준함,

유연성,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기보다 빠르고 정확한 업무 능력.


긴장 속에 6개월의 프로베이션 probation (수습기간으로 이 기간 동안 업무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일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끝났고 난 주정부의 직원으로 안착했다. 수습 딱지를 떼던 날, 나와 동기는 서브웨이에서 점심 샌드위치를 먹으며 조촐한 자축 행사를 했다.


시크하기 그지없는 영국 남자. 내 수퍼바이저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포인트만 전달한다. 무미건조한 유머 감각과 섞이지 않는 성격 때문에 직원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그런데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츤데레 수퍼바이저다.


없는 말로 맞장구를 치거나 띄워주는 건 못하지만 잘한 일은 모두가 알게 한다. 한 번씩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일을 하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 아깝다며 더 나은 포지션으로 가라고 용기를 준다. 아무런 인맥이 없는 내 뒤에서 묵묵히 나를 지지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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