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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Aug 04. 2024

종합선물세트에 딸려온 스페셜에디션

20. 번아웃의 씨앗

2010년 3월, 프라하에서는 국제검사협회(IAP) 집행위원회의가 열렸다. 2011년에 있을 제16차 국제검사협회 연례총회제4차 세계검찰총장회의의 개최지 선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 주관으로 2년마다 개최되는 세계검찰총장회의의 차기 개최지는 이미 칠레로 결정이 났었다. 하지만 2010년 2월 칠레에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개최지 선정 1년 만에 행사를 반납다. 같은 남미국가인 아르헨티나가 칠레를 대신해 강력히 개최를 희망했지만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집행위원회 만장일치로 한국이 차기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준비기간 1년을 잃어버린 상태라 개최국의 행사 준비 능력을 크게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G20 정상회의가 끝나고 진행된 세계검찰총장회의 입찰에서 우리는 협상대상 2순위가 되면서 행사 수주에 실패했다. G20으로 자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의 패배라 아쉬움을 삼키고 있던 중 뜻하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업체와의 협상결렬이었다. 그 업체가 소송에 휘말려 검찰 조사 대상이 되면서 검찰청이 주관하는 행사의 협상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 사실상 협상 부적격이 된 것이다. 이런 일은 컨벤션업계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예상치 않은 변수로 차순위였던 우리에게 행사가 왔다. 마치 칠레가 행사 개최를 포기하면서 한국이 개최국이 된 것처럼 말이다.


세계검찰총장회의는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행사였다. 국제행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시도가 있었고 내가 맡거나 봐왔던 행사 중 콘텐츠나 장식면에서 가장 풍성했다. 2.5일간의 공식일정에 결과보고서만 600장에 이른다. 그만큼 할 일이 많았고 준비하는 6개월 동안 매일이 행사 직전처럼 비상체제였다.


업무를 시작한 직후부터 해외 초청이 진행됐다. 205개 국가와 25개 국제기구가 대상이었다. 공식 초청서한이 두 차례 나갔고 11명의 직원이 지역별로 초청업무와 행사 전까지 커뮤니케이션을 분담했다. 주한 외국공관 간담회를 개최해 행사 취지를 알리고 자국 검찰총장의 참가를 독려했다. 참가자가 많을수록 행사의 위상이 높아지고 참가자 확정이 빠를수록 행사 준비가 수월하다. 개회식을 비롯한 오만찬 행사의 국내초청은 행사 한 달 전 진행되었다.


출입국 의전을 위해 공항에 전용입국심사대 설치와 귀빈실, 안내데스크 운영 등을 협의해 나갔다. 개최국에 대사관 또는 영사관이 있는 경우 자국에서 오는 고위급 인사의 영접과 영송을 직접 챙기는 게 일반적이다. 공관이 없는 경우는 주최국에서 의전을 한다. 따라서 각국 대사관과의 의전계획 협의도 우리 커뮤니케이션에 포함된다.


동반자와 함께 오는 대표단을 위해 회의가 진행되는 시간 동안 동반자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행사 전과 후 관광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현장 지원을 위한 서포터스 100여 명을 선발해 사전 오리엔테이션과 발대식을 진행했다. 선발된 서포터스는 행사기간 중 공항 안내, 호텔 안내, 참가자 수송을 비롯해 회의장, 오만찬장, 부대시설 운영 등에 배치됐다.




120개국 검찰총장 및 검사장급 인사, 유엔마약 및 범죄사무소, 국제형사재판소, 유고전범재판소, 유럽연합사법기구 등 국제기구 고위급 관계자 약 500명이 한국을 찾았다. 회의기간 동안 당시 1조 6천억 달러에 이르는 해외 은닉 범죄자금의 추적과 환수, 인신매매범죄와 범죄취약계층 보호, 신종 및 국제범죄 대응 등 국제범죄를 척결하기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공식행사 첫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리셉션이 열렸다. 세계검찰총장회의에 앞서 5일간 열린 국제검사협회 연례총회의 마지막 일정인 환송연이자 세계검찰총장회의의 환영연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두 그룹이 조우해 리셉션을 진행한  통합 만찬 위해 코엑스로 이동했다.



시각 코엑스에서는 리셉션으로부터 돌아오는 두 행사의 참가자들을 맞을 준비에 한창이었다. 로비에는 전통차 시음행사가 준비되었고 만찬장에서는 리허설이 있었다.

도착한 참가자들이 재현된 사헌부 다시청을 체험한다. 이어 취타대가 도열해 참가자들의 만찬장 입장을 도왔다.  대학에서 전통차 시음행사와 함께 만찬 문화공연을 준비했다.



취타대의 행사장 입장 환영을 비롯해 만찬 중 조선시대의 서민의상, 일상의상, 그리고 궁중의상 패션쇼가 이어졌다. 안숙선 명창의 판소리 공연도 패션쇼 중간에 있었다.



둘째 날 개회식 시작에 앞서 30분간 VIP 접견행사 진행됐다. 개회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이 회의에 참가한 각국 검찰총장 및 국제기구 수장 120명 모두를 직접 대면하는 자리다. 행사 전 먼저 도착해 비표를 받고 회의장에 자리하고 있던 대표단이 대통령 도착시간이 되어 리셉션장으로 줄을 지어 이동한다. 리셉션장 입장에 앞서 미리 준비한 콜링카드배포되었다.


*비표: VIP 행사 참석을 위한 신원확인을 마쳤다는 뜻으로 명찰과 함께 제공하는 식별.
*콜링카드(calling card): 개인의 국가, 소속, 직위, 이름만을 간단히 적은 종이로 주로 최상위 의전행사에서 사용한다. 한 번에 접견하는 인원이 많을 경우 사용되는데 의전비서관이 받아 접견하는 인사가 누구인지 VIP께 소개한 후 악수와 인사가 이루어진다. 호명시 실수가 없도록 발음 그대로 한글로 적는 경우가 많다.



전체회의가 이어진 개회식 당일 저녁. 신라호텔에서는 국무총리 주최 공식만찬이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코엑스에서 단체로 수송된 참가자들이 만찬 전 영빈관 야외에서 식전 스탠딩 리셉션을 가졌다. 국제행사는 네트워킹이다. 토론에 집중하는 회의시간 밖에는 참가자들 간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준다.



셋째 날 지역별 회의로 시작된 일정은 오후까지 전체회의로 이어졌고 폐회식을 끝으로 회의는 종료됐다. 기간 중 양자회담을 원하는 국가들의 신청을 받고 미리 준비된 회담 장에서 국가 간 개별 만남도 진행되었다. 폐회식 후 난타 공연과 함께 월드팝을 주제로 한 환송만찬을 끝으로 공식일정이 모두 끝이 났다.


제4차 세계검찰총장회의 기념우표




당시 검찰총장은 굉장히 높은 수준의 안목을 갖고 있었다. 국제행사 참석 경험이 많은 이유도 있겠지만 한국의 콘텐츠를 최대한 많이 노출하고 싶어 했다.


준비하는 6개월 내내 나를 붙잡은
두 가지 아이템이 있다.


첫째는 검찰총장이 고른 맛집, 박물관, 미술관, 공연, 산책로 등을 소개하는 PG's Picks다. 책자 제작을 위해 처음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던 장소들은 이후 총장의 검토를 거치며 대부분 교체되었다. 수십 번의 행사를 했지만 수장이 이토록 구체적으로 세심하게 챙기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름 그대로 PG's Picks였다. 장소별로 소개에 들어갈 내용을 만들고 확정 짓는 일도 기나긴 여정이었다.


*PG: Prosecutor General의 약자로 검찰총장을 약칭


책자에 들어갈 사진 역시 많은 공을 들였다. 전문 사진기사를 섭외해 수십 곳에 이르는 장소를 밤낮으로 직접 다니며 사진촬영을 했다. 미리 촬영일정을 잡고 필요한 곳에는 협조요청공문을 보냈다. 덕분에 유일무이한 예술사진들이 나왔다.

이렇게 신중을 기해 만들어진 책자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책자의 크기부터, 제본 방식, 종이, 간지 등을 나 역시도 까다롭고 독특하게 구상했다. 발주하는 시점에 비가 오면서 인쇄물이 충분히 마를 시간이 부족해져 종이의 재질을 살리지 못하고 부분 코팅을 해야 했던 건 아쉬웠지만 누가 봐도 공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 탄생했다.



둘째는 도자기 퍼포먼스였다. 개회식에서 검찰총장들이 도자기 점토에 사인을 하고 그걸 구워서 폐회 전 디스플레이를 한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도자 제작 과정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이천 도예마을에 있는 모든 공방을 수소문했다. 대답은 하나같이 '불가능'이었다. 점토 형태로 120개의 형상을 현장에 들여오는 것은 불가능했고 굽는 과정에서 깨지기라도 할 경우 대안이 없었다.


몇 달 동안 회의가 이어졌다. 구상대로 '안 되는 이유'를 수차례 보고한 끝에 간소화되고 변형된 형태로 도자기 퍼포먼스는 진행되었다. 가까스로 곳을 설득해 초벌구이를 마친 사각형의 도자 250개를 공급받사인을 할 수 있는 안료와 붓을 각 테이블에 준비했다. 현장에서 2개씩 서명을 받아 회수한 후 손상이 가지 않도록 모두 개별포장하여 다시 공방으로 보냈다. 보름간의 기간을 거쳐 재벌구이를 마친 후 실물이 나왔고 1개는 각국 대표단에게 해외우편으로 발송되었다. 나머지 한 세트는 대형 도자기 디스플레이로 제작되어 검찰청에 전시되었다.



매주 정례회의가 있었다. 회의를 하고 논의된 사항을 정리해 회의록을 공유하는 것까지 하루가 꼬박 걸린다. 그리고 후속조치를 한다. 검찰청 준비기획단은 매주 월요일 아침에 총장보고가 있었다. 후속조치를 포함해 총장께 보고될 자료들은 주말 작업을 해야 했다. 총장보고가 끝나면 결정된 사항과 변경, 추가사항이 온다. 보고 당시 설득이 되지 못하고 변경, 추가사항으로 나온 것들의 백업자료를 만들어야 한. 밀어붙여야 하는 안건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2안, 3안을 준비한다. 그리고 정례회의를 한다.

행사 하나를 하기 위해 끊임없는 회의가 이어진다. 나는 종종 우스갯소리로 "'회의'를 기 위해 '회의'한다"말을 하곤 했다. 회의와 보고가 많으니 방해가 없는 한밤중이 되어야 할 일을 했다. 6개월간 정신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인고의 과정이었다.


행사를 하며 나에게 한계가 왔다. 둘째 날 코엑스 3층에서 대통령 접견행사와 개회식이 끝나고 나는 1층 오찬장에 먼저 내려가 오찬 준비를 했다. 며칠간의 밤샘이 현장까지 이어졌다. 이때까지는 남아있는 마지막 한가닥의 정신력으로 버텼다. 오찬장에 도착한 해드테이블 인사들과 참가자들을 착석시키고 식사가 잘 제공되는 것까지 확인한 후 그날 저녁에 있을 국무총리 만찬 준비를 위해 나는 현장을 나왔다. 먼 거리도 아닌 사무실을 향해 가는데 걸을 수가 없다. 벽에 기대어 한 걸음씩 뗀 기억을 끝으로 나는 남은 행사의 현장을 지키지 못했다. 차순위였던 우리에게 온 종합선물세트에는 '번아웃'이라는 스페셜에디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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