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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Sep 29. 2024

벌써 겨울냄새가 난다

그리운 레인쿠버


올여름은 유난히 짧게 지나간 것 같다. 크게 더웠다고 느낀 날도 며칠 되지 않는다. 내가 더위를 잘 타지 않고 땀을 별로 흘리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주변엔 작년보다 올해가 더 더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쉬는 날인데도 오늘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잠깐의 미적거림을 뒤로하고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여니 찬바람이 거침없이 훅 덮쳐온다. 깊게 들이마신 공기에서 어느덧 찬겨울 냄새가 난다. 하늘에 드리운 구름이 마치 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눈보라 같다.


오늘 아침 하늘과 구름


밴쿠버의 계절은 크게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비가 내리지 않는 4월부터 10월까지가 건기,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거의 없는 11월부터 3월이 우기다. 봄을 느낄 새가 없이 여름이 시작되고 여름의 끝에 가을인가 싶으면 곧 겨울이다. 그래도 봄이면 꽃이 피고 벚꽃이 날리고, 가을이면 어김없이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진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건기와 우기는 뚜렷이 구별되었다. 건기라 불리는 여름은 미적지근하지도 뜨겁게 달구워지지도 않는 딱 중간이었다. 큰 변덕 없이 25도 안팎으로 유지되는 기온에 해는 쨍쨍한데 습기가 없어 따듯한 느낌이었다. 건식 사우나에 있는 듯한 바삭하게 따듯한 느낌, 딱 그 정도였다. 비가 없는 여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기만 했다. 잔디에 드러누워 얼굴에 책을 덮고 잠든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없고 꿀 같은 낮잠에 빠져든 모습이다. 포근한 공기가 책을 보는 눈을 스르르 감기게 했을 것이다.


온도가 높지 않아도 여름 태양빛이 강하기는 했다. 햇빛에 오랜 시간 직접 노출이 되어있다 보면 살이 따가워올 때가 다. 그럴 때 근처에 있는 나무 아래로 그림자를 겹치면 사각거리는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바람에 금세 서늘함을 느끼고는 했다. 밴쿠버의 여름은 따듯함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그래서 여름에도 늘 가벼운 카디건이나 재킷을 챙겨 다녔다.


8월 5일 밴쿠버 공공도서관과 하늘


겨울 쿠버의 닉네임은 인쿠버(Raincouver). 겨울이면 거의 모든 날 비가 내리기 때문에 갖게 된 밴쿠버의 애칭이다. 11월이 되어 보슬비로 겨울의 시작을 알리고 한겨울이 되어도 장대비는 않았다. 겨울철 기온은 온화해 한국에서 가져온 두꺼운 패딩과 코트, 장갑을 쓸 일이 없어 짐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모자 달린 방수 재킷 하나만 있으면 겨울을 났다.


우기가 되면 캐나다 사람들에게 나는 냄새가 있다. 매일 비가 오고 그 양이 많지 않다 보니 우산을 챙겨 다니는 사람이 없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그냥 맞고 다닌다. 매일같이 비를 맞고 다니니 옷이 마를 날 없이 서서히 냄새가 배 거다. 겨울에 그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지에 따라 현지 사람인지 잠시 다녀가는 방문객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밴쿠버의 온화한 겨울은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구나'라고 믿게 했다. 비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레인쿠버 ©Seaside Signs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바삭하게 따듯한 여름이 아니다. 건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비가 내리는 날이 종종 있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하루종일 구름을 드리운 채 후덥지근한 날도 있. 야외에 하루종일 주차를 해두고 퇴근을 하기 위해 차문을 열면 실내공기가 40도를 훌쩍 넘어있기도 하고 실제 기온이 40도를 넘어가기도 한다. 습도까지 올라가는 날이면 숨이 턱 막혀오는 열돔이 이곳을 뒤덮는다.


레인쿠버도 그리운 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짝꿍이 "눈 있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눈사람을 수도 없이 만들고 뭉친 눈을 던져가며 눈싸움을 하며 자란 나에게 그 질문은 실로 낯설게 느껴졌다. 겨울철 휘슬러의 눈밭에서 스키나 보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생활하는 곳에서 눈이 내리는 광경을 보는 건 이곳 사람들에게는 희귀한 경험이었다.


지난겨울 눈이 내린 날


몇 년 전부터 겨울 풍경도 바뀌었다. 이제는 겨울이 오면 눈을 걱정한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 늘어가는 만큼 눈이 오는 날은 많아지고 있다. 심지어 내리는 눈의 양도 엄청나다. 몇 년 동안  눈을 경험하며 눈에 대한 대응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이곳은 대설, 폭설과 같은 상황에 한국처럼 대비가 잘 되어있지 않다. 길을 가다 보면 불쑥 생겨난 '눈산'이 군데군데 있다. 도로의 눈을 한 곳으로 몰아 쌓아 두는 것이다.

 

지난밤 내린 눈이 설벽을 만들어 차를 빼지 못해 출근을 못하거나 도로 제설이 빨리 되지 않아 지각을 하는 건 흔한 일이다. 갑작스레 눈이 내리면 결근을 하는 직원들이 속출하고 문을 열지 못하는 가게들이 생긴다. 관공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지대가 높은 곳에 사는 직원들은 거의 100% 출근이 불가능하다. 높은 곳은 제설차가 오는 것만도 시간이 더 걸린다. 밤새 눈이 내렸거나 아침에 큰 눈이 올 때면 아침뉴스를 꼭 확인한다. 보가 내리고 학교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있으면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


겨울이면 생기는 눈산


나는 유독 추위를 많이 탄다. 체질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환경적인 영향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살던 고향집은 외풍이 심했다. 겨울철 난방을 해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집에서도 오들오들 떨기 일수였다. 웬만해선 이불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집을 수리해 이중난방이 되어 전보다는 따듯하지만 대학 때문에, 직장 때문에, 결혼 때문에 독립을 해 아파트 생활을 해온 우리는 고향집에 갈 때면 여전히 추위와 싸워야 한다. 어릴 때 맞은 외풍이 뼛속 깊이 박혀든 건지 우리 형제 모두 추위라면 질색을 한다. 어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겨울난방은 빵빵하게 해 둔다. 실내에서 옷을 껴입지 않고 활동하기 편할 만큼 난방은 든든해야 한다.


석양에 물든 9월 1일의 하늘


9월이 시작되고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벌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통속적으로 밴쿠버에 비가 내리면 겨울이 시작됐다는 뜻이고 달력을 보지 않고도 겨울임을 알 수 있었다. "Raincouver has come!" 겨울을 맞는 인사말이었다.


엊그제도 하루종일 가 내렸다. 바람도 거셌다. 벌써부터 느껴지는 겨울에 올 겨울은 얼마나 추울지, 얼마나 눈이 내릴지 걱정이 앞선다. 레인쿠버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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